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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유태인 음모론, 영국 배후론, 외환투기자의 조작론 등 제기하며 서방자본 비판
[1997 아시아 투기세력③] 마하티르의 공세
2019. 08. 15 by 김현민 기자

 

1997728일 말레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아세안 총회가 열렸다. 마히티르 모하마드 총리를 대신해 말레이시아의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 외무장관이 개막연설을 했다. 그는 올브라이트 면전에서 야비한 행동이니, “국제적 범죄니 하는 썰렁한 단어를 써가며 조지 소로스와 외환 투기꾼들을 공격했다. “아세안 국가들은 외환투기자들의 야비한 사보타지에 의해 외환위기를 겪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이들에 대한 반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미국에서 대표로 나간 스튜어트 아이젠스탯(Stuart Eizenstat) 국무부 차관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허락을 얻고 발언대로 올라갔다. 그는 말레이시아 수뇌부의 음모론을 맹공격했다. “통화 하락은 국가가 경제를 잘못 판단해서 생긴 일이다. 투기자들은 이에 편승했을 뿐, 이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나갔다. “아까 개막연설에서 말한 사보타지란 말은 잘못됐다. 그렇게 투기자들을 비난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는가. 아세안 국가의 경제를 망쳐놓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국 외무 당국자들간에 설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마하티르는 좀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서방국가를 비난했다. 그는 심지어 과거엔 양극체제 때문에 아시아국가들이 고통을 겪었는데, 지금 단일 체제가 됐지만, 별 나은 것이 없다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은근히 비아냥 거렸다.

올브라이트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남의 말에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면전에서 직설적인 말을 삼가지 않는 그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기회는 그날 저녁에 있었다. 각국 외교관들이 만찬을 가지면서 장기자랑을 하는 장소였다. 올브라이트는 영화 에비타의 여주인공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해 미국에서는 마돈나 주연의 영화 에비타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었다) 곡명은 에비타의 주제곡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라는 곡을 개작한 아세아인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Don't Cry for Me, Aseanies)였다. 아세아인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 정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 나는 당신네 지도자들과 이야기하러 여기에 왔소/ 그런데 그들은 모두 골프장에 가버렸소/ 그래서 나는 홀로 돌아와 조지 소로스를 불렀소/ 그와 함께 시장의 힘과 음모론을 이야기 나눴소/ 그것은 역사였소

외교관답게 부드럽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올브라이트는 시장의 힘에 아시아 경제가 망한 것이지, 소로스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노래로 응답했다.

 

아시아 외환 위기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음모론을 낳았다. 모두가 외형적으로 정교한 듯 했지만, 논리적 설득력이 부족했다.

마하티르 총리의 유태교의 예정설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세계 금융시장을 쥐고 있는 유태인들이 성공한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내세웠다. 그가 말하는 이슬람교는 말레이시아를 비롯, 인도네시아가 포함된다. 그렇지만, 유태인 예정설은 불교국인 태국과 기독교국가인 필리핀 통화폭락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마하티르는 1년후 유태인 음모설을 부정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IMF가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이것저것 거시정책에 간섭을 하자, 집권층에서 음모론이 나왔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아들 밤방(Bambang Suharto)은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고통은 자신을 겨냥한 국제적 음모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는 IMF 구제금융이 아버지를 와해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명예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IMF 요원들이 구제금융 지원패키지를 제시하면서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은행을 파산시킨 것을 그 예로 들었다.

태국 정치인들은 미국 자본이 자국 시장을 개방시키기 위해 경제를 교란시켰다고 비난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아시아 위기 뒤에 영국이 뒤에 있다는 루머가 떠돌아 다녔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넘기고 나서 과거 식민지를 파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칼럼니스트 장 이핀은 인민해방일보 1면에 실린 낸 기고문에서 장막 뒤에 보이지 않은 검은 손이 있다면서 그 손은 서방세계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금융중심지인 홍콩을 와해시키려는 음모라면서 서방의 검은손은 홍콩을 무너뜨리기 위해 주변국을 하나하나 붕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많은 중국사람들에게 먹혀들었다. 이제 막 서구식 자본시장을 도입한 중국인들은 서방세계 특히 미국의 우파세력들이 홍콩 경제를 교란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세계를 와해하려한다고 믿었다.

음모론은 경제 혼란이 아시아 전역을 휩쓸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아시아 경제를 거꾸러뜨리려는 악랄한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주가가 무릎을 꿇고 통화가치가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와 조지 소로스 회장 /멜레이시아 투데이 캡쳐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와 조지 소로스 회장 /멜레이시아 투데이 캡쳐

 

920일에는 마하티르와 소로스의 정면 대결이 있었다. 이번엔 무대가 홍콩에서 열린 IBRD(세계은행)-IMF 연례총회였다.

마하티르가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총리는 지난번처럼 소로스를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외환거래자를 투기꾼’, ‘악당’, ‘범죄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격렬한 표현을 동원하며 몰아부쳤다. 그는 아예 외환 거래 자체를 부정했다.

국제 외환거래는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이며, 전적으로 비도덕이다. 외환거래를 불법화하고 중단시켜야 한다. 동남아 통화위기는 동남아의 경제발전을 바라지 않는 지극히 부유한 몇몇 사람과 언론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그들의 부는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풍요를 누리고 있다.”

총리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는 의미로 말레이시아에서 외환거래를 무역대금 자체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로스가 정면공세로 나섰다. 그는 지금까지 마하티르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굳게 침묵을 지켜왔다. “외환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한 마하티르 박사의 주장은 대단히 부적절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 자본 거래를 제한하는 조치는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하티르 박사야말로 그의 나라에 위협요소다.”

소로스의 발언 강도 마하티르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가시돋힌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 동안 마하티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가며 자기 실책으로 빚어진 책임을 나에게 덮어씌워 왔고, 국내 언론통제를 통해 그러한 말로 국민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의 말은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언론 자유를 제한하고 부패를 눈감아주는 독재정권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그는 연설이 끝나고도 성이 차지 않아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는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주식시장이 붕괴해 피해를 입은 말레이시아인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그러나 마하티르에 대해선 조금도 그런 마음이 없다. 그에게 (경제를 망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는 서구적 가치’(Western Value)에 대항해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를 주창해온 정치인이다. 그는 소로스가 반격하자, 서방세계의 가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커지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크지 못하는 것은 당신네들이 우리가 큰 사고를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노력했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이 잘사는 것처럼 우리라고 잘살 수 없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돈만 있으면 대규모 건설공사를 할 수 있는데, 당신네들은 우리가 그 돈을 갖지 못하도록 통화를 폭락시켰다.”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에 세계 최고의 빌딩, 아시아 최대의 공항, 미국 실리콘밸리를 모방한 첨단과학단지, 대형 수력발전용 댐을 짓겠다는 웅대한 꿈을 가지고 추진해왔다. 그러나 경제를 밀고 나가는 기관차는 탈선해버렸다. 링기트화는 20~30%나 폭락했고, 달러에 대한 빚이 그만큼 불어났다. 외국돈이 일시에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가는 바람에 건물과 다리, 공항의 건설을 중단해야 했다. 국민 소득이 뚝 떨어져, 국민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던 것마저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컸다. 그는 소로스등 외환딜러들의 장난에 잘 나가던 말레이시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국제대회에서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며 국제자본과 대항했다.

 

다음은 마하티르 총리가 미국의 비즈니스 위크(985)와 가진 인터뷰의 한 대목.

- 조지 소로스와 유태인의 음모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요.

한 부분은 예스이고, 다른 부분은 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소로스에 관한 한 그가 (아시아 위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할 때는 다른 무리들이 그를 따르지요. 좋은 표현이 아닐지 모르지만, 리더가 정하는 방향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버팔로(들소)떼들 같다고나 할까요.”

- 유태인 음모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유태인 음모론은 대부분의 외환거래자들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듭니다. 이런 사실이 동아시아 이슬람국가에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은 이를 유태인의 음모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나는 유태인 음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유태인 (외환)거래자들이 말레이시아를 망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원할 뿐입니다. 통화 폭락 과정에서 단기투매를 할 경우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모두가 돈을 원합니다. 나라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수십억 달러를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통화 폭락의 폭풍이 스쳐지나간 동남아 국가들의 지식인들은 마하티르 총리의 주장을 심정적으로 동조했다. 태국의 타농 비다야 재무장관은 국제 외환 투기자들이 통화폭락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네시아의 한 신문은 외환딜러를 100 달러 짜리 지폐를 마스크로 하고 나타난 무장테러리스트로 표현하고 루피아를 지키자, 인도네시아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만화를 실었다.

 

국제투기자본에 대한 반감이 아시아에서 번져나가자, 이번에는 월가의 백전노장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미국 재무장관이 나섰다. 그는 지난번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같이 소로스를 직접적으로 두둔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하티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잘못을 지적해주었다. 루빈은 월가에서 26년간 근무했고, 월가의 내로라는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에서 회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는 국제 투자자들의 입장을 잘 이해했다. 투자자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의 살림살이를 꾸려온 노련한 사람이다.

그의 연설은 마하티르를 겨냥한 것임에 분명했다. “마하티르 총리의 주장대로 외환 거래를 중단하고, 자국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국제투자자들이 말레이시아를 이탈하게 된다. 국제적 투자자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빠져나올 자세(숏 포지션)를 취하면, 말레이시아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하티르는 그의 정책을 180도 수정하게 될 것이다.”

루빈은 시장, 정확히 말하면 국제금융시장의 논리를 믿었다. 그는 시장이 때때로 극단적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시장논리를 수용한 나라에는 보답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처벌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국제자본시장의 논리를 잘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거대경제를 운용하고 있는 미국 행정부로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빈의 말은 맞았다. 마하티르 총리는 동남아의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 강하게 국제자본시장을 격렬히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국제자본의 논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울펜손(James Wolfensohn) 세계은행 총재도 중재에 나섰다. 총재는 마하티르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소. 그러나 자본 거래를 중단시킬 경우, 기술 이전이 중단될 위험이 있소라며 은근히 겁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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