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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하세쿠라 쓰네나가, 멕시코 거쳐 스페인, 프랑스, 로마 방문…귀국전 쇄국령으로 무산
일본, 400년전에 유럽에 사절단 보내다
2019. 08. 15 by 김현민 기자

 

16131028, 180명을 태운 다테마루(伊達丸)호가 일본 중부 쓰키노우라(月浦) 항을 떠났다. 이 배에는 센다이 번 출신 사무라이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가 도쿠가와(徳川) 막부의 명을 받고 사절단장으로 승선했고, 막부에서 보낸 사무라이 10, 센다이번 출신 사무라이 12, 일본인 상인과 선원, 하인등 120,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 40명이 탔다.

게이쵸 견구사절단(慶長遣歐使節團)이라 명명된 이 사절단은 태평양을 횡단해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뉴스페인(멕시코)를 거쳐 유럽의 스페인, 프랑스, 로마를 거쳐 6년만에 귀국했다. 일본이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사절단이었다. 하지만 사절단이 돌아오기 앞서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고, 그들의 외교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이 다시 유럽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이로부터 250년이 지난 1862년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유럽사절단을 보낸 것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자 카톨릭 리더국인 스페인과 로마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쿠가와 막부 초기여서 해외에 개방적이었다.

앞서 1609년 필리핀 전총독이었던 로드리고 데 비베로(Rodrigo de Vivero) 일행이 멕시코에서 일본으로 오던 중에 태풍을 만나 센다이 번 이와다(岩和田)의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지역주민에게 구조된 로드리고 일행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접견하고 스페인과의 통상과 일본 사절단의 스페인 왕실 방문을 논의했다.

이후 스페인이 일본을 바짝 당겼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일본에 카톨릭을 전파하고 금과 은의 보고라는 지팡구(Zipangu)를 탐험하는 것이었다..

1610년 다케다 쇼스케(田中勝介)라는 기술자를 중심으로 22명의 일본인들이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William Adams)의 자문을 받아 만든 선박을 타고 뉴스페인의 중심지인 멕시코를 다녀왔다. 이들이 일본이 건조한 배(San Buena Ventura)로 태평양을 건넌 최초의 일본인이었다.

이듬해인 1611년 멕시코에 있던 스페인 탐험가 세바스찬 비스카이노(Sebastián Vizcaíno)가 뉴스페인 총독의 명을 받고 에도 막부와 지방의 여러 다이묘들을 방문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막부와 지방 다이묘들을 실망시켰다. 그는 일본 문화를 깔보았고, 카톨릭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을 강조하고, 특히 금과 은을 찾으러 일본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기상악화로 실패했다.

막부는 세바스찬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1612년 자신이 건조한 배를 멕시코로 출항시켰지만, 일본 해역에서 좌초되었다.

세 번째 사절단 파견이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었다. 사절단이 탄 다테마루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복이었던 센다이(仙臺) 번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비용으로 센다이 번에서 건조되었기 때문에 선명이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건조 기술자는 막부에서 파견되었고, 막부의 지시로 5개월만에 건조되었다. 이 배는 후에 유럽식으로 산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호로 개명되었다. 배수량 기준 500톤에 전장이 55m, 당대 일본 기술이 총동원된 최대의 선박이었다.

 

일본 이시노마키에 세워진 산후안 바우티스타호 모형선 /위키피디아
일본 이시노마키에 세워진 산후안 바우티스타호 모형선 /위키피디아

 

사절단을 실은 배는 16131028(음력 915)에 쓰키노우라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스페인 왕국의 수도인 마드리드와 교황청 수도 로마였다. 스페인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Luis Sotelo)를 정사로 하고, 하세쿠라 쓰네나가 자신은 부사가 되었다. 승선인원은 180.

그들은 태평양을 건너,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의 멘도시노 곶(Cape Mendocino)에 도착한 다음 남하해 1614125일 멕시코 아카풀코(Acapulco)에 도착했다. 쓰네나가 일행은 멕시코의 스페인 당국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쇼군이 준 선물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놓고 사무라이들과 배를 함께 탄 스페인의 비스카이노 무리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칼부림이 있었고 비스카이노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스페인 당국은 일단 평화롭게 문제를 풀면서 스페인 영토에서 일본인들의 공격은 허용하지 않으며, 쓰나네가와 사무라이 8명을 제외하고 귀국할 때까지 무기를 회수했다.

이 소동이 끝난후 그들은 육로로 324일 멕시코 시티에 도착했다. 곧이어 멕시코 대서양 연안의 베라쿠르스(Veracruz) 항에서 스페인 선박을 갈아 타기 위해 대기했다. 그곳에서 뉴스페인 총독을 만나고, 하세쿠라를 비롯해 카톨릭교도들은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가 뚤리지 않았던 시절이라, 산후안 바우티스타가 남미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돌기에는 시건이 엄청 걸렸다. 배는 아카풀코에 정박시켰다. 스페인 입국비자를 받은 사람은 63명이었다.

그들은 멕시코를 떠나 쿠바의 하바나 항에 들러 배를 갈아타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스페인 기록에 따르면, 쓰네나가 일행이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Sanlúcar de Barrameda)라는 스페인의 작은 항구도시에 도착한 것은 1614105일이었다. 이어 1023일 하세쿠라 일행은 세비야(Seville) 항에서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행해도 /위키피디아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행해도 /위키피디아

 

이듬해인 1615130일 하세쿠라 사절단은 마드리드의 왕궁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Felipe III)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서신을 국왕에 전달하고, 스페인과의 조약 체결을 제의했다. 이어 하세쿠라는 필레페 3세의 개인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고 펠리페 프란시스코 하세쿠라(Felipe Francisco Hasekura)라는 우럽식 이름도 받았다.

사절단은 스페인을 여행한 다음 스페인이 마련해준 프리킷함 세척을 타고 로마로 향했다.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 사절단을 태운 선박은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상트로페(Saint-Tropez)에 들렀다. 그곳에서 프랑스 지방영주들의 영접을 받았다. 프랑스인들은 일본 사절단이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 부드러운 화장지로 코를 풀고 버리는 것, 그들의 예리한 칼 등에 관해 기록으로 남겨놓았는데,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사절단의 프랑스 방문은 일본인으로선 처음이었다.

 

로마에서 교황을 알현하러 가는 하세쿠라 행렬도(17세기 일본 그림) /위키피디아
로마에서 교황을 알현하러 가는 하세쿠라 행렬도(17세기 일본 그림) /위키피디아

 

사절단은 로마로 향했다. 161511월 사절단은 로마에서 바오로 5(Paul V)를 알현했다. 그해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에서 심문을 받던 해였다. 하세쿠라는 일본어와 라틴어로 된 두통의 서신을 교황에게 제출했는데, 그 안에는 스페인과의 통상조약을 맺고, 일본에 카톨릭 사제를 보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서한은 아직도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교황은 사제들을 일본에 보내는 것은 허용했지만, 스페인과 통상 허용은 답을 하지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하세쿠라에 명예 로마 귀족과 시민으로 인증했고, 하세쿠라는 그 인증서를 일본에 가져갔다. 이 서류는 센다이에 보관되어 있다.

16164월 하세쿠라 일행은 스페인으로 돌아와 펠리페 3세를 다시 알현했으나, 통상조약에 관해서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페인 왕실이 하세쿠라 사절단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표가 아니라, 센다이 영주의 대표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세쿠라 일행은 16166월 세비야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했다. 이때 사절단 일행중 6명의 사무라이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에 잔류했다. 잔류 일본인의 후손 700여명이 세비야 근처의 코리아 델 리오(Coria del Rio)라는 마을에 아직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하폰(Japón) 또는 자폰(Xapon)이란 성을 아직도 쓰면서 일본인의 후손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들이 낳은 아이들에게는 몽골 반점이 있다고 한다.

 

스페인 남부 코리아 델 리오에 세워진 하세쿠라 쓰네나가  /위키피디아
스페인 남부 코리아 델 리오에 세워진 하세쿠라 쓰네나가 /위키피디아

 

그들은 통상교섭에 성공하지 못하고 1620920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로에 필리핀을 들러 도쿠가와 막부와 센다이 영주에게 줄 선물들을 챙겼다.

 

하세쿠라가 필리핀에서 획득한 인도네시아와 실론 칼 (센다이 박물관)/위키피디아
하세쿠라가 필리핀에서 획득한 인도네시아와 실론 칼 (센다이 박물관)/위키피디아

 

하지만 하세쿠라가 유럽을 오가던 사이에 일본에선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쇄국령과 카톨릭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하세쿠라는 실의에 빠져 16228월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기 앞서 1640년 아들 쓰네요리(常頼)가 하인이 기독교 신자라는 까닭으로 처형당하고 그의 가문은 단절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1668년 쓰네요리의 아들 쓰네노부(常信)의 대에 이르러서야 사면을 받고 하세쿠라 가문의 이름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갖고 돌아온 게이초(慶長) 유럽 파견 사절단 관계 자료는 센다이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200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중에는 유럽인들이 그린 쓰네나가의 초상화가 있는데, 일본인을 그린 유화로써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세쿠라가 유럽방문중에 쓴 일기가 1812년까지 남아 있었으나, 그후 사라졌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하네쿠라 쓰네나가 초상화 /위키피디아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하네쿠라 쓰네나가 초상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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