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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사업가이자, 금융투기꾼 자인…‘열린 사회’ 지향하는 칼 포퍼에 매료
[1997 아시아 투기세력④] 조지 소로스
2019. 08. 16 by 김현민 기자

 

아시아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린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민주주의 후원자와 돈 많은 외환투기꾼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풍운의 사나이다. 1992년엔 영국 파운드화 폭락에 개입했고, 1997년엔 동남아 외환시장을 공격, 국제적인 투기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그렇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세력 붕괴에 일조를 했고,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사로도 알려져 있다.

청년 시절 공산치하의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주, 뉴욕 월가에서 자리를 잡은 그는 막강한 정보력, 날카로운 분석력과 엄청난 자본 동원력을 바탕으로 세계 정치, 경제 문제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7년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을 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동남아 외환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소로스를 만나 지원을 요청했을 정도다. 그는 서방 선진 7개국의 원로격 모임인 G7 평의회에 정식멤버로 추대받고 있으며, 세계적인 경제 회의에 늘 초청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핫라인을 통해 친분을 맺었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매사추세츠 공대(MIT)도 그에게 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바 있다.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인 1944년 헝가리는 독일 나치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했다. 나치들은 유태인 낙원을 건설한다며 점령지역의 유태인들을 모두 한곳으로 집결시켜 학살했다. 소로스는 아버지 덕분에 살아남았다.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을 거친 경험이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나치의 명령을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친은 많은 돈을 들여 가족들의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숨어서 살 곳을 마련했다.

소로스는 나치 치하에서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나중에 투자의 원리를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술회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어떻게 판단해야 하며, 누구와 협조해야 하는가를 재빨리 결정해 상황을 바꿔 나가는 원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투기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패하면 영원히 매장되고, 성공하면 한번에 일어설 수 있다는 배짱이 있어야 하고, 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나치 치하에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숨어살면서 투기의 원리를 배웠고, 동시에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슴에 새겨 나갔다.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전하자, 헝가리는 소련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소로스 일가는 1947년 영국 런던으로 도망을 쳤다. 거기서 소로스는 반공주의 철학자 칼 포퍼 교수를 만났다. 소로스는 포퍼 교수로부터 열린 사회’(open society)라는 개념을 배웠다. 포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열린 사회는 어떠한 생각과 철학이든 자유롭게 주장될 수 있는 사회를 말하고, 나치나 공산주의는 열린 사회를 억압하는 독재의 범주에 포함됐다. 나중에 그가 만든 자선단체 이름이 열린 사회 재단’(Open Society Foundation)이라 명명한 것도 여기서 나왔다.

소로스는 포퍼 교수의 가르침 속에서도 투자의 원리를 터득했다. 이른바 반사 이론’(reflexivity)이었다. 이론의 토대는 인간이 항상 총명하지 못하며, 잘못된 판단, 불완전한 정보에 의해 행동한다는 것. 금융시장이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투자자들은 항상 현명한 판단으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시장 가치 이상으로 투기를 하거나, 가치 이하에서 손을 뺀다는 것이다. 정부도 시장을 정확하게 판단해 제어하는 것이 아니므로, 투자자 군중과 정부의 시장 조작 사이의 틈에서 투자를 할 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영국 파운드화 매각에 나섰을 때 철저히 반사 이론에 입각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철학은 배고픈 학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기로 했다. 돈을 벌어 그의 철학을 뿌리내리려 했던 것일까. 한국식으로 말하면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써라는 생각이 어린 소로스의 마음속에 싹텄던 것인지도 모른다.

1956년 소로스는 세계 최대 금융시장이 있는 뉴욕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유가증권을 사고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재정거래’(arbitrage) 사업에 손을 댔다. 그는 세계 각국의 통화가치가 오르고 내리는데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0년대말 그는 제법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행한 시절이었다. 그는 동업자와 헤어졌고, 아내와도 이혼을 했다. 아이들도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맨해튼의 조그마한 아파트를 얻어 거의 은둔하다시피 했다. 돈도 엄청나게 잃었다. 돈을 번다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것인 줄 몰랐다. 그는 정신적으로 방황을 했다. 그때 그를 구제한 것이 자선사업이었다.

 

조지 소로스 /위키피디아
조지 소로스 /위키피디아

 

1980년대 들어 소로스는 헝가리 출신 미국인들을 모아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 공산치하 헝가리에 자유주의를 심어주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사진 복사기를 전달했다. 자유세계의 생생한 모습을 헝가리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헝가리 공산정부의 폭정을 자유세계에 전달하는데는 사진만큼 중요한 매체가 없었다. 그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향해 공산국가에 미디어 네트워크를 설립하는데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는 동유럽의 자유주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방세계에서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소로스는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영국의 대처수상에게 전후 유럽부흥계획이었던 마샬 플랜을 부활, 동유럽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그는 월가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지 않은 인물이었다.

소로스는 무언가 세계인의 눈에 띠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견해낸 타깃이 영국 파운드화였다. 중요한 것은 소로스는 1992년 파운드화 투기에 성공, 10억 달러의 거금을 손에 넣음으로써 영란은행 파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지만, 국제사회에서 소로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그는 이점을 노렸다.

소로스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당시 나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파운드화에 개입했다. 확실히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번 사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로스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그는 본격적으로 동유럽 민주화에 불을 당겼다. 소로스는 약 50억 달러로 추정되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자선사업에 부었다. 소로스 재단(Soros Foundation)은 구공산권을 중심으로 세계 수십여개 국가에 지점을 설치했다.

그의 자선단체는 열린사회의 적들과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독재국가인 구아테말라에도 개입했고, 인권 유린 국가인 미얀마가 아세안에 가입하는 것도 반대했다. 특히 고국인 헝가리등 중부 및 동부 유럽에 대해서는 미국의 공식 대외원조액의 5배인 12,000만 달러를 투입,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지원했다. 소로스는 1997년말 러시아의 교육과 보건 사업에 5억 달러를 쾌척하겠다고 발표,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미 국무차관보를 지냈던 리처드 홀루크씨는 소로스에 대해 철강왕 카네기 이후 가장 중요한 자선사업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는 곳곳에서 적을 만난다. 벨라루스 대통령은 1997년 민스크의 소로스 재단이 스파이 활동과 탈세를 했다는 혐의로 300만 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은행계좌를 압수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1994년 집권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루카솅코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통합을 주창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외국의 지원을 받는 야당 세력을 탄압해온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져 있다. 클린턴 미국 행정부도 유럽 국가를 부추겨 벨라루스가 소로스 재단에 대한 제재를 풀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소로스는 뉴욕 맨해튼 7번가에 자신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뉴욕시 바닷가에 멋진 저택을 갖고 있고,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에 전원주택을 보유했다. 그는 주로 웨체스터의 집에 철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정치인들을 초대, 자신의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논의를 했다. 그는 학자들과 의논을 거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데, 마약 문제, 범죄문제, 죽음의 문제 등에 돈을 내놓았다. 물론 학자들의 의견과 자신의 사색 끝에 내린 결론이다.

자본주의 자체에도 공격을 가했다. 그는 한 잡지에 낸 글에서 월가 금융시장에서 규정하는 지나친 개인주의가 전통적 가치에 위배된다고 썼다. 그는 통제받지 않는 (금융) 시장이 전제주의 이데올로기보다 열린 사회에는 더 큰 위협 요소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 공산주의나 독재주의가 아니라 서방 자본주의가 가져온 약탈 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투기꾼임을 인정하는 모순을 범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주면서 어떤 칭호를 붙여주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자신을 금융가이면서 자선사업가적이고, 철학적인 투기꾼”(financial, philanthropic and philosophical speculator)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는 돈을 보람 있게 쓰는 자선사업가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투기꾼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소로스는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퀀텀 펀드 이외에도 여러 개의 펀드를 운영했다. 투기꾼 소로스를 상징하는 퀀텀 펀드는 자본금 200억 달러로, 자금은 카리브 해상의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섬에 예치했다. 그곳은 어떤 종류의 돈에 대해서도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세회피처였다. 뉴욕에는 펀드매니저들이 그 자금을 운영했다.

 

조지 소로스 /위키피디아
조지 소로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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