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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청조, 러시아-준가르 동맹 와해시키고, 투르후트 유인 전략에 성공
캬흐타 조약…러시아-외몽골 국경선 긋다
2019. 08. 17 by 김현민 기자

 

청조에 몽골의 막서(幕西)를 차지하던 오이라트족은 준가르, 두르버트, 투르후트, 허수트 등 네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네 부족중 준가르 부족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두르버트와 허수트를 복속시켰다. 하지만 투르후트(土爾扈特)는 끝내 준가르에 흡수되지 않고 저항했다. 투르후트는 17세기초에 자신이 살던 초원을 떠나 수천마일 떨어진 볼가강 하류로 이주해 러시아 차르의 통치권 아래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역만리 서양인들의 땅에 사는 게 힘든 일이었다. 러시아는 몽골에서 이주해온 투르후트 부족에게 차르의 신민이 되라고 요구했고, 과도한 세금을 물렸다. 러시아는 이주한 몽골족에게 러시아 정교를 믿으라고 강요하고, 해외 군사원정에도 참여하라고도 했다.

투르후트 부족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부족장 아워치(阿玉治)는 강력한 통치자 갈단이 사라진 준가르와 화해를 청하고, 청 강희제에게도 사신을 보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투르후트 부족은 준가르와 청나라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청의 입장에서 투르후트가 준가르와 합세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준가르의 입장에서는 동족을 대동단결시킬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명나라 말기의 민족이동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캡쳐
명나라 말기의 민족이동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캡쳐

 

투르후트 부족장 아워치는 자신의 딸을 준가르의 지배자 체왕랍탄에게 시집을 보냈다. 유목민족에게서 결혼은 동맹을 의미했다. 체왕랍탄은 아워치와 결혼 동맹을 맺고, 그동안 청에 고분고분하던 태도를 바꾸었다.

준가르는 러시아에서 무기 원조를 받아 다시 청의 서역 거점을 공격했다. 체왕랍탄은 청나라 변방의 목마장들을 습격해 말을 대량으로 빼앗아 가고, 투루판을 기습 공격해 청나라를 놀라게 했다. 또 티베트 내정에 개입해 달라이라마 6세를 내쫓고 친준가르 승려를 새 달라이라마로 세우기도 했다.

 

러시아 칼미크 공과국의 몽골계 인종. 오이라트 투르후트족의 후손들이다. /위키피디아
러시아 칼미크 공과국의 몽골계 인종. 오이라트 투르후트족의 후손들이다. /위키피디아

 

강희제는 투르후트 부족을 청에 복속시키고 준가르와의 연대를 끊게 하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투르후트 부족은 러시아 영내에 있었다. 황제의 사신을 직접 보낼수 없었다.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은 러시아에 외교사절단을 보내되, 투르후트에만 다녀오는 행로를 잡은 것이다.

1712년 만주 귀족 툴리센(鬪理珗)을 대표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투르후트에 보냈다. 툴리센 일행은 베이징을 출발해 시베리아로 에돌아 2년만인 1714년에 볼가강에 도착해 아워치의 주재지에 도착했다. 툴리센은 이 여행기록을 담아 이역록’(異域錄)이란 책을 썼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투르후트 부족은 청나라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마다 명절 복장을 갈아입고 찾아와 인사를 올렸고, 툴리센이 강희제의 성지(聖旨)를 높이 들고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고 한다. 툴리센은 강희제가 내린 하사품을 아워치에게 전달하고, 몽골 공주가 청나라 황후가 되었고, 많은 몽골 왕궁들이 칸으로 책봉되었다고 설명했다.

중국측 기록은 이때부터 투르후트 부족이 청나라와 밀잡한 관계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체왕랍탄은 실망했다. 아워치의 딸까지 아내로 맞았지만, 결국 투르후트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청의 입장에서는 투르후트가 준가르와 동맹을 맺어 준가르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1722년 강희제가 죽고 그의 아들 옹정제가 청 황제로 등극했다. 옹정제의 걱정은 투르후트가 아니라 러시아였다. 러시아와 준가르가 동맹을 맺어 북쪽과 서쪽에서 침공할 경우 힘든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옹정제는 러시아를 중립화해 준가르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캬흐타 조약 이후 청-러시아 국경 /위키피디아
캬흐타 조약 이후 청-러시아 국경 /위키피디아

 

한편 청과 러시아의 동부 국경을 획정하는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1689) 이후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무역이 활기를 얻었다. 1693년 러시아 시절단이 베이징으로 와 3년마다 한번씩 대상(隊商)을 파견하기로 동의를 얻었다. 대상 규모는 200명으로 하되, 베이징에 80일 체류하기로 했다. 또 양국의 무역에 대해 관세를 물리지 않기로 했다. 1698~~1718년 사이에 러시아 대상들이 10번이나 베이징을 다녀갔다.

러시아도 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베이징에 종교 사절단을 두는 문제를 청나라와 협의할 필요가 있었다.

1725년 예카테리나 1세는 옹정제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100명이나 되었으며, 1,500명의 병사가 호위했다. 이 방대한 사절단은 무려 13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172610월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사절단 대표 사바 블라다슬라비치 라구진스키(Sava Lukich Vladislavich-Raguzinsky)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은 6개월동안 베이징에 머물면서 툴리센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 대표와 협상을 벌였다. 그들은 30여차례나 회동했다. 프랑스 국적의 예수회 수사 파레닌이 두 사절단의 의향을 전달했다.

협상의 서명은 베이징에서 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상대방 수도에서 협상을 체결한 선례가 없다며 국경에서 서명하자고 했다. 중국도 러시아를 빨리 끌어 들여 준가르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외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캬흐타(Kyakhta)에서 서명하기로 했다. 17276823일 러시아의 라구진스키와 청의 툴리센이 캬흐타에서 국경조약을 맺었다. 이를 캬흐타 조약(Treaty of Kyakhta)이라고 했다.

 

캬흐타의 위치 /위키피디아
캬흐타의 위치 /위키피디아

 

캬흐타 조약은 네르친스크 조약의 연장이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청-러시아는 동부 국경을 흑룡강(아무르강)으로 정한데 이어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두 나라는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을 그었다.

조약은 몽골과 시베리아 국경은 청-러 공동위원회가 측정해 확정한다 (이때 그어진 국경이 현재 몽골인민공화국과 러시아의 국경이다) 러시아 대상(隊商)200명에 한해 3년에 한번씩 베이징에 갈수 있다 카흐타와 아르군 강변에 교역장을 설치한다 베이징에 러시아 정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와 어학 연구생을 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조약 내용은 러시아어, 라틴어, 만주어로 작성되었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바이칼호와 그 일대를 러시아에 내주었다. 또 러시아 정교사절단을 중국에 둘수 있게 되었다. 어찌보면 중국이 손해를 보는 조약이었다.

청의 입장에서 바이칼호에서 내려오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준가르와 러시아의 동맹을 와해시키려고 조약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후에도 러시아는 국경문제를 거론했다. 몽골의 비적떼들이 국경을 넘어 말, 낙타, , 양들을 약탈해갔다고 불만을 터트렸고, 중국 상인들이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이에 옹정제는 1729년 러시아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중국이 유럽 국가에 파견하는 첫 번째 사절단이었다.

사절단 단장은 만주족 투어스가 맡았고, 명목은 표트르 2세의 대관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투어스 일행의 사절단은 17311월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는데, 그때엔 표트르 2세가 죽고 조카딸인 안나 이바노나(Anna Ivanovna)가 여제에 올라 있었다.

러시아는 31발의 예포를 쏘면서 중국 사절단을 환영했고, 크레믈린궁에서 각별하게 예우했다. 투어스는 러시아 군주를 만나 중국식 고두례(叩頭禮)를 행하고 옹정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사절단은 러시아 여황제에게 중국군이 오이라트를 토벌하다 실수로 러시아 국경을 넘을 경우 적대적 행위를 하지 말 것 오이라트 부족이 러시아 영토로 도망갈 때 추격할 권리를 줄 것 러시아 영내에 있는 오이라트 부족장과 귀족들을 청에 인도할 것 청의 사절단이 볼가강 유역에 있는 투르후트 부족을 방문하게 할 것 등이었다.

러시아의 안나 여제는 청의 요구에 절반만 들어주었다. 청군이 러시아 영내에서 오이라트부족을 추격할 수 잇는 권리를 주겠지만, 그 부족의 부족장과 귀족들을 중국에 인도하거나 투르후트 부족을 만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투어스 사절단은 요구사항의 절반만 얻어냈지만, 러시아로 하여금 준가르와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대체로 성공한 셈이다. 이제 청은 본격적으로 준가르를 초토화하는 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캬흐타 조약 전후의 상황 /위키피디아
캬흐타 조약 전후의 상황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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