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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바하마, 케이만군도, 불법탈세 자금의 도피처…외환투기꾼 소굴화
[1997 아시아 투기세력⑦] 조세회피처
2019. 08. 19 by 김현민 기자

 

미국 플로리다 서남쪽 해상에 바하마(Bahama)라는 인구 25만의 섬나라가 있다. 캐나다나 인도처럼 영연방 국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를 국왕으로 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다. 크리스토퍼 칼럼버스가 발견한 이 섬나라는 1년 내내 기온이 따듯하고, 섬과 바다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어, 미국인들이 무거운 직장 생활의 억압에서 벗어나 며칠씩 쉬어 가는 휴양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또 각종 세금과 규제를 피하려는 돈의 피난처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외국 법인에 대한 우대정책을 쓰고, 금융업이 전체 GDP8%를 차지할 정도로 세계 금융센터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부자들은 자신이 번 돈에 정부가 세금을 물리는 것을 싫어한다. 또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를 속속들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세금을 면제해주고, 돈의 비밀을 지켜주는 곳에 돈을 묻어두려고 한다. 스위스 은행이 그랬다. 스위스 은행들은 독일 나치정권이 유태인으로부터 뺏은 돈도 받아주었고, 아시아의 독재자들의 돈도 스위스 은행은 고스란히 보관해주었다. 카리브해의 바하마나 케이만 군도(Cayman Islands)도 바로 그런 곳이다. 프랑스의 인기영화배우 아랑들롱이 스위스 제네바에 대저택을 두고, 미국 영화배우 숀 코네리, 미국 뮤튜얼펀드의 전설적 영웅인 존 템플턴 경이 바하마에 별장을 두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외환 거래로 돈을 많이 번 조셉 루이스라는 사람도 바하마에서 왕족과 같은 삶을 영위했다. 그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 대저택을 짓고, 주변엔 야자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았다. 조금만 나가면 개인 골프장이 있고, 호화 요트가 집 앞에 정박해 있었다. 호화 주택의 가격만 해도 5,000만 달러를 넘는다. 뉴욕타임스지는 바하마에 은신하고 있는 61세의 외환 투기꾼 루이스씨를 집중 조명한 적이 있다.

루이스씨가 가지고 있는 개인 재산은 대략 25억 달러. 소로스와 함께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했고, 1995년엔 멕시코 페소화 폭락에도 개입해, 엄청난 돈을 모았다. 그가 1997년 하반기에 태국 바트화, 한국 원화 폭락에서도 상당한 이문을 남겼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 각국 통화 폭락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들었다.

영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루이스는 1979년 상당액의 현금을 갖고 바하마로 이사했다. 그가 바하마에 이주해온지 몇년후 세계 외환시장이 크게 동요했고, 그는 외환 거래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는 특정 통화를 공격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금 중에서 10~15억 달러를 빼내 베팅을 걸었다.

그러면 루이스와 같은 투기꾼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저택에서 어떻게 거액의 외환 거래를 하는 것일까.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전화와 컴퓨터 온라인 망이다. 그는 외부적으로 트래비스톡 그룹(Travistock Group), 잉글리시 내셔널 인베스트먼트(English National Investment)라는 회사 이름으로 외환 거래에 나선다. 그는 해안의 한적한 저택에 트레이딩 룸(trading room)을 설치해놓고, 바하마 은행에 비축해놓은 넉넉한 군자금을 동원, 자신의 대리회사를 통해 국제적인 사냥에 나섰다.

루이스와 같은 거물들은 서로 밀접한 연락망을 갖는다. 어느 통화가 불안한가, 얼마나 투자를 할 것인가를 서로 의논을 한다. 일반 은행의 외환 딜러도 갑자기 특정 통화가 흔들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물 거래자들이 집단으로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 체이스맨해튼 은행등 뉴욕 월가의 큰 은행들도 루이스와 같은 큰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간 투기꾼의 명석한 판단력과 든든한 자금력과 보조를 같이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내부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월가 은행들이 바라는 바였다.

외환 거래자들은 자신들을 투기꾼을 모는데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루이스는 분명한 것은 시장이 언제나 옳고, 정치인들은 늘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외환 거래)은 시장을 형성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외환 거래는 자본이 전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일 뿐이다.”고 말했다.

 

바하마의 블루라군섬 /위키피디아
바하마의 블루라군섬 /위키피디아

 

카리브해는 외환 거래자뿐 아니라 미국등 세계 주요은행들도 지점을 개설해 자금을 대피시켰다. 이른바 페이퍼 지점(Paper Branch)이다. 페이퍼 지점에는 직원을 두거나, 건물을 둘 필요가 없다. 서류 상으로 지점을 등록해놓고, 돈을 적립시키면 된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는 카리브해 안틸레스 군도(Antilles Isles)에 예금을 적립해 두고, 뉴욕 사무실에는 딜러와 트레이더들만 북적거렸다. 예컨데, 뉴욕의 딜러가 태국 바트화를 공격하려고 할 경우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안틸레스 군도에 터놓은 계좌에서 자금을 동원하면 되었다.

세금 도피처에 예치돼 있는 돈은 국제적으로 투기자본으로 활용되었다. 바하마나 케이만군도에 예치돼 있는 달러는 미국이나 영국 돈이 아닌 초국적 자본이다. 루이스는 국적은 영국인이지만, 바하마의 은행에 쌓아둔 돈은 영국 돈이 아니다. 소로스는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안틸레스 군도의 퀀텀 펀드 자금은 미국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을 넘나들며 이윤을 극대화했다. 이들 자본이 영국 파운드화 공격에 나섰고, 멕시코 페소화 폭락에도 사용되었다.

케이만 군도에 적립된 예치금은 1990년대말에 5,00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결제은행(BIS) 조사에 따르면 19979월 현재 케이만 군도에 4,610억 달러, 바하마에는 2,140억 달러가 각각 예치돼 있었다. 전통적으로 예금자 비밀을 보장해주고 있는 스위스에 4,060억 달러가 쌓여있는 것에 비하면 카리브해 해상에 엄청난 유동성 자금이 모여있었다. 미국 금융시장의 자금이 카리브해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케이만 군도는 쿠바 남쪽 해상에 있는 인구 35,000명의 조그마한 섬이다. 영국이 카리브해 장악을 위해 전초기지로 만들어 놓았던 이 식민지는 아직 완전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다. 이 섬이 세계 8위의 금융중심지로 우뚝 서있는 것은 미국 등 선진국의 핫머니에게 세금을 피해 숨을 곳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만 군도 자치정부는 국경을 떠도는 유동성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예금자 비밀주의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이 섬에서 예금자의 정보를 공개하는 은행가는 엄청난 벌금을 물고, 징역까지 살아야 했다. 예금자가 누구든, 얼마나 예금을 하든, 한푼의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따라서 마약거래로 돈을 번 마피아 자금도, 국제외환 시장에서 투기한 자금도 이 섬으로 몰려들었다.

카리브해 이외에 세금 도피처로 이용되고 있는 곳으로 스위스와 영국 주변의 저지(Jersey) , 건지(Guernsey), 맨 섬(Isle of Man)등 자치군도들이 있다. 영국령 자치군도들이 세금 도피 소굴로 많이 활용된 것은 일찍부터 금융산업이 발달한 영국의 영향을 받았던 탓이다.

 

그러나 해양 군도들이 언제까지 세금 도피의 안전 지대로 남아 있기 어렵게 되었다. 미국, 유럽등 선진국들이 세수 확대와 범죄 방지를 위해 탈세자에 대한 예금 비밀을 공개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19985G7 재무장관들은 세금 범죄를 마약 거래자의 돈세탁과 동일한 범주에서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선진국 모임인 OECD도 세금 사기범을 도와주고 있는 세금 도피처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내용의 협약을 제정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미국 국세청(IRS)도 마약거래자와 탈세자들이 카리브의 섬으로 도피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들 군도에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국제적인 압력에 못 이겨, 19981월 스위스 정부는 미국인의 탈세 자료 제출을 요구할 경우 은행의 예금정보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겠다고 양보했다. 이어 그해 2월 로빈 쿡(Robin Cook) 영국 외무장관은 자치령 총독들을 모아놓고 외국 수사기관의 요구에 충분히 협조하라고 지시하며, 자치령의 금융관련 법안을 개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서 가장 반대가 심한 곳은 당연히 눈먼돈을 가장 많이 유치해 놓은 케이만 군도였다.

케이만 군도 자치정부는 만일 미국등 선진국 수사기관의 요구에 따라 예금자 비밀을 공개할 경우 돈 주인들이 모두 떠나버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케이만 군도 측은 미국 등 선진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돈은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갈 것이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며 본국(영국)이 자치령 경제를 망치려고 작정을 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케이만 군도도 1996년 카리브해 군도에선 처음으로 마약범죄에 한해 예금 비밀을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을 제정했고, 경찰서 내에 마약반을 신설, 미국 수사당국에 협력했다. 또 사기죄로 구속된 플로리다 거주 미국인 부부의 예금계좌를 동결하는 등 종전의 안전한 자금 도피처로의 명성을 잃어갔다.

케이만 군도가 자금 도피처로서의 기능이 퇴색해지자, 바하마가 케이만 군도를 떠나려는 자본을 유치하는데 적극 나섰다. 바하마는 영국에서 완전 독립했기 때문에 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금자 비밀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역외 펀드(off-shore fund) 예금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코앞에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미국 수사당국의 요구를 바하마가 막아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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