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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준가르족 강압에 볼가강 유역으로 이주…러시아 탄압에 다시 중국 신장으로 민족이동
140년만의 귀향…투르후트족의 기구한 사연
2019. 08. 20 by 김현민 기자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 공화국이 있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 카스피해 서쪽, 볼가강 유역에 있는 칼미키야 공화국(Republic of Kalmykia)이 바로 그곳이다.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인데, 인구 30만명에 몽골계 칼미크족이 전체의 57.4%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47.6%가 티베트 불교를 믿고, 러시아 정교 4%, 이슬람 3%.

이 칼미크족과 같은 종족이 중국 서부 신장(新疆)에 살고 있다. 같은 종족이 수천km를 떨어져 사는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칼미키야 공화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칼미키야 공화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명청 시기에 중국 신장, 카자흐스탄 서부, 시베리아 남부 일대에 몽골족의 일파인 오이라트족이 살았다. 오이라트족은 준가르, 두르버트, 투르후트, 허수트 등 네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중 투르후트(土爾扈特, Torghut) 부족이 현재 러시아 칼미키야와 중국 신장 서부에 살고 있는 종족의 뿌리다. 투르후트인들은 다른 오이라트족처럼 티베트의 라마불교를 믿고 있었다.

1600년경 준가르의 카라쿨(Kharkhul)이 부족장이 되면서 다른 세 부족의 복종을 강요했다. 투르후트의 부족장 코 오를룩(Kho Orluk)은 부족회의를 열어 준가르의 지배를 벗어나 새 땅을 찾기로 의견을 모았다.

투르후트인들은 북극해로 흐르는 오브강의 상류 이리티시 강 유역에 살고 있었는데, 1618년부터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 부족이 이동했는데, 그 규모가 20~25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동 행렬은 투르후트족이 다수였고, 두르버트(杜爾佰特) 부족 일부도 참여했다. 그들은 시베리아를 지나고 우랄산맥 남부를 넘어 1630년 마침내 볼가강 하류에 도착했다.

그곳은 칭기스칸 후예인 아스트라한 칸국(Astrakhan)과 노가이 칸국(Nogai Horde)이 있던 곳인데, 러시아가 1550년대에 이미 합병해 버리고, 몽골 또는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에 귀속해 살고 있었다. 투르후트 부족은 선주민들을 코카서스 산맥으로 내쫓고 터전을 잡았다. 그곳에 요새를 건설해 주둔하던 러시아군도 이들의 정착을 저지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은 코사크족이나 투르크인들을 앞세워 수시로 투르후트족을 공격했고, 투르후트 병사들도 러시아 도시를 쳐들어갔다.

 

칼미크족의 전통가옥 /위키피디아
칼미크족의 전통가옥 /위키피디아

 

마침내 투르후트 부족은 러시아 차르의 신민(臣民)이 되기로 약속하고, 대신에 자치권을 달라고 했다.

러시아는 당시 볼가강 하류를 국경으로 했기 때문에 몽골족을 국경수비대로 활용할 가치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몽골 기병의 뛰어난 전투력을 인정하면서 투르후트에게 후하게 대우했다. 차르는 몽골 부족장과 귀족들에게 많은 선물을 하고, 자치정부로서 칸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투르후트족의 캐러반(隊商)에게 러시아내에서 무역을 하도록 허용하고, 관세를 물리지 않는 특혜를 부여했다. 몽골족이 볼가강 하류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후에 러시아인들은 이들을 칼미크족(Kalmyks)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나라를 칼미키야 칸국이라고 했다.

대신에 러시아는 수시로 몽골 기병을 차출했다. 러시아는 이란, 투르크인 등 이슬람 세력과 전투를 벌일 때 불교도인 칼미크 기병을 동원했다. 칼미크 기병은 유럽 전역을 누비고 다녔고, 오스만투르크,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러시아는 칼미크 병사를 선봉에 세웠기 때문에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1800년대 초 칼미크 칸국의 인구는 30~35만에 이르렀는데, 당시 러시아인구가 1,500만이었던 점으로 감안하면 상당히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러시아가 수시로 병력을 차출하는데 염증을 느껴 부족장 아워치(阿玉治)는 사신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2년 남짓 시베리아를 돌아 1712년에 베이징에 도착한 사신들은 강희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강희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강희제의 입장에서는 투르후트가 동족인 준가르와 합세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사신들은 강희제의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그해 강희제는 곧바로 만주 귀족 툴리센(鬪理珗)을 투르후트에 보냈다. 툴리센 일행도 시베리아로 에돌아 2년만인 1714년에 아워치의 주재지에 도착해 투르후트가 준가르와 합세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투르후트족의 대이동(그림) /위키피디아
투르후트족의 대이동(그림) /위키피디아

 

아워치 칸이 죽은 후 칼미크에 내분이 일어나 여러 분파가 싸웠고, 러시아 차르는 칼미크 칸국의 자치권을 조금씩 빼앗기 시작했다. 차르는 러시아인과 독일인을 볼가강 하류에 정착하도록 해 몽골족의 생활기반을 좁혀 들어갔고, 새로운 이민자들은 몽골족의 가축을 훔쳐 달아났다. 게다가 차르는 칼미크 칸의 위에 위원회를 두어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칼미크족에게 불교를 버리고 러시아정교를 믿으라고 강요했다. 몽골족들은 더 이상 이곳이 희망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아워치의 증손자 우바시(渥巴锡)가 새 칸이 되었는데, 러시아 조정이 그를 책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미크 귀족들에게 칸을 바꾸라고 지시하며, 우바시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가려고 했다.

우바시는 부족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멸족의 재난에 직면해 있소. 지금 러시아 조정은 나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협박하고 있소. 우리에게 말 잘듣는 노복이 되라는 거요. 어떻게 하면 좋겠소.” 1)

여러 의견이 나왔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자는 주장도 나왔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있었다. 결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칼미크족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서 길일을 받아두었다. 출발은 볼가강이 어는 17711월로 잡았다. 출발에 앞서 칼미크족은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 참여해 상당한 무기를 비축해 두었다.

그들은 볼가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볼가강 양쪽의 부족들이 꽁꽁 얼어붙은 볼가강을 건너 합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해 겨울 볼가강은 얼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다는 소문이 차르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수도 없었다. 하는수 없이 볼가강 서안의 부족들은 달라이 라마가 선택해준 날에 이동을 했고, 동안의 부족들은 남게 되었다. 이동한 수는 17만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칼미크의 인구가 30만을 넘었던 것으로 추산되므로, 절반이 이동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부족은 이산하게 된다. 함께 살던 두르버트 부족도 남기로 했다.

러시아의 차르 예카테리나 2세는 투르후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귀향했다는 보고를 듣고 노발대발했다. 그는 즉시 대군을 편성해 투르후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투르후트족도 무장을 하고 있었고, 전투력이 만만치 않았다. 차르는 카자흐 족, 키르키즈족 등 이슬람 칸국을 부추겨 투르후트의 이동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종교 갈등을 이용한 셈이다.

러시아와 이슬람 투르크인족의 협공으로 수많은 투르후트족들이 죽었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고, 여성과 아이들이 함께 이동했기 때문에 매번의 전투에서 피해가 막심했다. 러시아는 투르후트인들이 이동하는 지역의 숲과 초원에 불을 지르고 산짐승을 죄다 잡아 식량과 땔감, 가축사료들을 없애 버렸다.

투르후트의 고난의 행군은 7개월이 걸렸다. 러시아군을 피해서 사막이나 늪지로 가야 했고, 험한 산을 넘어야 했다. 그들은 마침내 중국 영내인 발하시 호수(Balkhash Lake)에 도착했다. 도착 인원은 66,073명으로, 출발당시 인원의 3분의1만 귀향에 성공했다.

그때엔 준가르 제국이 청에 의해 패망하고 대학살(1756~1758)이 일어나 준가르족이 멸족한 상태였다.

강희제는 자신의 치하에 몽골족들이 돌아온 것을 반겼다. 강희제는 우바시와 함께 사냥을 데리고 나가고, 연회도 베풀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투르후트인들은 고향에서 독립한 칸국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그들이 독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우바시는 쥐리크투(卓理克圖) , 용감한 칸으로 봉해졌지만, 그는 이리장군의 지휘를 받게 했다. 또 투르후트인들에게 유목생활을 버리고 정착농민으로 전환토록 해 부족의 전투성을 약화시켰다.

 

몽골족의 분포도 /위키피디아
몽골족의 분포도 /위키피디아

 

한편 러시아 칼미키야에 남아있던 투르후트족에게 차르의 압박이 강화되었다. 남아있던 귀족들은 러시아인들에 붙잡혀 처형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칸국의 지위를 박탈하고, 러시아인 통치자를 내려보냈다. 부족 대표는 부칸(副汗)으로 격하시키고, 얼마후 그 자리를 두르버트족에게 주었다. (아직도 칼미키야 공화국의 수반은 러시아 대통령이 지명하고, 칼미키야 의회의 비준을 받는다.)

현재 투르후트족은 중국 신장지역에 15, 몽골 호브드(Khovd) 지역에 1,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에 17만명이 살고 있다. 러시아 칼미키야는 불교 지역으로는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다.

 

칼미키야 공화국의 전통악기 공연 /위키피디아
칼미키야 공화국의 전통악기 공연 /위키피디아
칼미키야의 불교사원 /위키피디아
칼미키야의 불교사원 /위키피디아
민족대이동을 주도한 우바시 칸 /위키피디아
민족대이동을 주도한 우바시 칸 /위키피디아

 

 


1) 박덕기, 중국역사이야기 (2008, 일송북)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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