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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플라시-북사르 전투 이후 벵골 지역에서 세금징수권 확보…제국주의로 전환
영국의 야욕…동인도회사, 징세권 빼앗다
2019. 08. 22 by 김현민 기자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시기는 1600년이지만, 인도에 영토를 확보한 것은 1757년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1764년 북사르 전투(Battle of Buxār) 이후부터다.

두 전투 이전의 인도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무굴 제국으로부터 해안에 교역거점을 허가받아 무역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무굴제국의 중앙지배력이 약화되고, 각지의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적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후들이 무력으로 상대방 국가를 침략하고, 음모와 모략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일이 빈발했다. 중국 주()나라 후반,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이전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같은 상황이 인도에서 벌어진 것이다.

지방의 권력자들이 영국, 프랑스등 서양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도 서로를 제거하기 위한 싸움에 제후국들을 활용했다.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 이어 7년전쟁(1756~1763)을 벌이며, 피비린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 전쟁은 인도에서도 연장되었다.

 

플라시 전투 이전의 인도 /위키피디아
플라시 전투 이전의 인도 /위키피디아

 

영국과 프랑스는 1746~1763년 사이에 인도 남동부에서 세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를 카르나티크 전쟁(Carnatic Wars)라 한다.

1707년 무굴제국의 강력한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가 죽자 지방 통제력을 잃었고, 데칸 고원에 있던 하이데라바드(Hyderabad)를 비롯해 카르나티크(Carnatic), 마이소르(Mysore) 등이 각각 독립했다. 이들은 나와브(Nawab)이라 부르며, 겉으로는 무굴제국의 봉신이라 자칭하면서 제국의 간섭을 배제했다.

인도 남동부의 제후국 카르나티크에는 영국의 무역거점인 마드라스(Madras)와 퐁다셰리(Pondicherry)가 함께 있었다. 이곳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영국은 한쪽 편을 들고, 프랑스는 다른 편을 들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늦은 1664년에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인도에 진출했다. 인도를 선점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1715년에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조세프 프랑솨 뒤플렉스(Joseph François Dupleix)라는 호전적인 인물을 퐁디세리 총독으로 보냈다.

본국이 영국과 교전을 벌이자, 뒤플렉스가 카르나티크 내전에 끼어들어 영국군 기지 마드라스를 공격했다. 전투는 1746~1748, 1749~1754, 1756~1763에 걸쳐 세차례 벌어졌다. 최종 승리는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이끄는 영국군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과 프랑스 동인도회사 사이의 전쟁에서 영국 회사가 이긴 것이다. 당시 유럽 무역회사는 군대와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카르나티크와 그 상국(上國)인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국의 말을 잘 듣는 괴뢰(傀儡)를 지방정권 수반에 올렸을 뿐이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미르 자파르를 만나는 장면(유화) /위키피디아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미르 자파르를 만나는 장면(유화) /위키피디아

 

이번에는 벵골의 제후(나와브)가 영국에 도전해왔다. 벵골 제후 시라지 웃다울라(Siraj ud-Daulah)는 기골이 장대하고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많은 이익을 내는데 분노했다. 웃다울라는 캘커타에서 요새 건설을 중단할 것을 영국에 요구했다. 영국이 거절하자 웃다울라는 17566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캘커타를 함락하고, 체포한 영국군을 포트 윌리엄스(Fort William) 요새의 지하 감방에 쳐넣었다. 6명을 수용할 감방에 146명을 수용하다 보니, 대부분이 질식사, 심장마비 등으로 죽었고, 다음날 문을 열었을 때 23명만 살아 나왔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보복을 결의했다. 이듬해 19일 클라이브는 2,400(영국군 900, 세포이 1,500)을 이끌고 제후의 요새와 시설물을 파괴했다. 웃다울라는 캘커타와 영국인 재산을 돌려주고 배상금까지 지급하겠다고 약속하고 빠져나갔다.

하지만 웃다울라도 반격을 결심했다. 웃다울라는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고, 동시에 병력을 총동원했다. 벵골 제후 웃다울라의 병력은 총 5만명(보병 3, 기병 2)이었고, 영국 클라이브의 병력은 3,000이었다. 여기에 프랑스 포병 50명이 벵골측에 붙었다.

전투는 1757623일 플라시에서 전개되었다. 전투는 프랑스 포병의 발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투는 하루만에 싱겁게 끝났다. 클라이브는 벵골측 지휘관 미르 자파르(Mir Jafar)를 매수해 제후 자리를 보장했고, 개전과 동시에 자파르는 군대를 되돌려 버렸다. 웃다울라는 도주했으나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플라시 전투 이후 미르 자파르는 영국에 의해 벵골 제후에 올랐고, 영국은 인도에 설치한 프랑스의 무역거점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미르 자파르가 제후 자리에 오르자 영국의 간섭은 심해졌고, 영국의 팽창욕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영국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은 1759년 네덜란드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자파르를 퇴위시키고, 그의 조카인 미르 카심(Mir Qasim)을 제후에 올렸다.

영국에 의해 제후에 오른 카심도 영국에 도전했다. 카심은 영국 상인들의 면세특권을 폐지했는데, 동인도회사가 또다시 제후를 갈아치울 조짐을 보였다. 카심은 무굴 제국과 이웃한 이와드 제후의 도움을 요청해 병력을 모았다.

17641022일 벵갈-무굴-이와드의 연합군이 영국 동인도회사군과 인도 북부 북사르(Buxar)에서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은 4만의 병력을 확보했고, 영국군은 7천명 정도였다. 영국군의 대부분이 인도인 용병 세포이였다. 이번에는 이탈자가 없었지만, 인도 연합군은 패배했다. 영국군의 화력을 당해낼수 없었던 것이다. 전투는 병력수로 하는 게 아니라 화력으로 하는 것임을 입증했다.

북사르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이듬해 무굴제국과 알라하바드 조약(Treaty of Allahabad)을 체결해 동인도회사는 벵골(Bengal), 비하르(Bihar), 오리사(Orissa) 세 지방의 징세권을 인정받았다. 이 조약 이후 클라이브는 17655월에 세 지역을 담당하는 동인도회사 초대 디완(diwan, 조세징수관)이 되었고, 사실상 인도 동부의 총독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 /위키피디아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 /위키피디아

 

1757년 플라시 전투, 1764년 북사르 전투 이후 인도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동안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상관을 둔 무역회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 번의 큰 전투 이후 동인도회사는 벵골, 바하르, 오리사의 세지역에서 세금을 걷어 수익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세 지역에는 무굴제국의 제후 나와브(Nawab)를 두었지만, 그 자리는 동인도회사에서 연금을 받는 명목상 지위에 불구했다.

당시 세 지역에서 징수되는 세금은 연간 165만 달러였다. 1720~1730년 사이에 동인도회사의 연간 매출이 150~200만 파운드였다. 물건을 사서 머나먼 길을 배에 싣고와 팔아 낸 한해 이익금 만큼을 아무런 밑천 없이 세금으로 뜯어낼수 있었으니, 동인도회사의 장사는 거저 먹는 것이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세금징수기관(국세청)을 디와니(diwani)라고 했는데, 디와니 업무는 국가가 해야 하는 몫이다. 징세권은 영토와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벵골등 세지역의 징세권은 회사(company)가 아니라, 국가(nation)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 영국 정치권에서 나왔다.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의 지위를 둘러싸고 영국정부와 동인도회사간에 이해다툼이 벌어진다.

영국 정부가 본토보다 넓은 땅을 지배하는 동인도회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치인들은 상업회사가 영토를 지배하는 권력기관으로 변신한데 대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동인도회사측은 영토가 무굴 제국의 현지 제후(나와브)의 것이고, 징세권의 수익만 얻기 때문에 주식회사가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업과 정치가 부딛칠 때에는 입법권을 가진 쪽에서 이긴다. 18세기 후반에 영국 의회는 노스 규제법(North's Regulating Act), 피트의 인도법(Pitt's India Act) 등을 제정해 동인도회사의 권력을 줄이고, 영국정부의 기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인도에 대한 영국정부의 개입은 점점 영국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길을 걷게 했다.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 이후 영국 지배지역(붉은 선) /위키피디아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 이후 영국 지배지역(붉은 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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