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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안와르 부총리, 화교 억제법 ‘부미푸트라스’ 철폐…마하티르에 도전하다 실각
[1997 말레이시아②] 화교 자본으로 위기 탈출
2019. 08. 23 by 김현민 기자

 

말레이시아 인구의 24.6%가 화교다. (2010년기준) 중국인들은 15세기때부터 말레이 반도에 유입되어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뿌리 내렸다. 수도 쿠알라룸프르와 같은 대도시엔 화교가 절반이 넘는다.

말레이시아 화교는 말레이시아 경제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다. 그들은 전세계 화교망을 연결해 사업을 벌이고, 특히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다양한 사업분야에 진출해 있다.

19977월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자, 말레이시아의 이브라힘 안와르 경제부총리는 화교 자본에 눈을 돌렸다. 화교들이 돈을 풀도록 해 금융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계획이었다.

 

말레이시아 경제는 10년 이상 장기 집권한 마하티르 정권의 부패 그 자체였다. 권력과 대기업은 다른 아시아 국가 만큼이나 밀접한 유착관계에 있었다.

안와르의 금융개혁 조치는 여기에도 뻗쳤다. 해를 넘겨 19982월 안와르는 마하티르 정부의 상징인 부미푸트라스’(Bumiputras) 정책을 폐지했다. 부미푸트라스는 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에 토착 말레이족에 각종 혜택을 주는 정책을 말한다. 일종의 토착민 우대주의였다. 말레이시아 인구 중에 말레이족등 원주민이 59%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이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와 인도족 9%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교들은 소수민족이었지만, 말레이시아 경제의 주도권을 쥐었다. 1970년에는 원주민인 말레이족 기업인이 운영하는 회사 중에서 쿠알라룸푸르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회사가 전무했다. 화교들이 경제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었다. 화교의 상권독점에 반발하는 원주민의 폭동이 빈발했다.

1971년 말레이시아는 경제적 약자인 말레이족을 우대하고, 화교를 차별하는 부미푸트라스를 시행하고, 말레이족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대형 공사를 발주할 때 말레이족 기업을 우선 낙찰시켰고, 화교는 입찰에 참여조차 배제했다. 덕분에 1998년에 쿠알라룸푸르 증권거래소에 거래되는 주식중 말레이족 기업인이 경영하는 회사가 20%를 차지했다. 말레이시아 항공, 레농 그룹, 에크란 그룹등 말레이시아 굴지의 기업이 모두 말레이족이 운영하는 기업이다. 이들 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이 마하티르의 친척이거나 친구라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하티르의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lan) 일환으로 25년간 지속돼온 부미푸트라스 정책이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됐다. 마히티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장해온 기업과 은행들이 엄청난 부실 여신과 부실 채권으로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자본을 구하기 앞서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이민족, 즉 부유한 화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부도에 임박한 국가로선 왕관에 박힌 보석마저 팔아야 할 형편이다. 대영 제국도 영국인의 자존심이라던 롤스로이스마저 독일 기업에 팔았고, 미국도 한때 헐리우드의 컬럼비아 영화사,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일본에 매각해야 했다. 말레이시아 원주민의 지지로 장기집권해온 정권이지만, 나라가 망해 가는데 과거의 정책에 연연해 할 수는 없었다.

안와르 부총리는 화교들이 말레이족의 대기업에 구제금융을 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민족 차별 정책을 해체했다. 말레이족이 지배하던 기업이라도 부도가 날 경우 화교에게 경영권을 넘길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코 큰 서양 사람들에게 기업을 넘기기 보다는 소수민족이지만 자국인들에게 기업을 맡기는 것이 백번 낳은 조치였다.

안와르는 또 정부 차원의 구제금융은 일체 없다고 강조했지만, 기업간, 개인간 구제금융은 인정했다. 한국에서도 진행된 바 있는 이른바 빅딜’(big deal) 방식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국인이 부실 기업과 은행을 사줌으로써 파산의 연쇄효과를 막는다는 발상이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의 중국인 거리 /위키피디아
말레이시아 페낭의 중국인 거리 /위키피디아

 

이웃나라인 태국, 인도네시아가 순식간에 넘어지고, 모델로 삼았던 한국마저 무너져 내렸어도 말레이시아가 굳건히 버틴 것은 한국이나, 태국과 달리 외채 비율이 낮았고, 대신에 해외직접투자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단기 외채는 이익이 나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지만, 직접투자는 말레이시아 땅속에, 기업 속에 묻혀 있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GDP 대비 직접투자(FDI)를 볼 경우, 1993년 현재 말레이시아는 26.0%로 동아시아에 가장 높았다. 1994년에는 16.1%로 다소 낮아졌으나 홍콩(23.5%) 다음이다. 이에 비해 1993년 한국은 0.5%, 태국 3.5%, 인도네시아 3.8%였으며, 1994년엔 한국 0.6%, 태국 1.1%, 인도네시아 3.6%였다. 한국은 남의 돈을 빌려쓸 줄 알았지만, 다른 나라의 자본을 한국에 유치할 생각을 못했다.

이에 비해 말레이시아는 그 동안 외국인 직접투자를 많이 유치했기 때문에 통화 폭락의 태풍을 만나 크게 흔들리기는 했으나, 붕괴되지는 않았다. 마하티르는 국경을 넘나드는 핫머니성 단기자본을 싫어했지만, 말레이시아 땅에 돈을 묻어두려는 외국 자본은 언제나 환영했고, 그 덕을 톡톡이 본 것이다.

 

<동아시아국가의 해외직접투자 현황(81~94>

(GDP 대비 비율, 단위:%)

연도

국별

81~85

86~90

91

92

93

94

말레이시아

10.8

10.6

23.8

26.0

22.5

16.1

싱가포르

18.1

33.9

33.5

13.3

24.6

23.5

홍 콩

6.5

13.6

2.3

7.7

7.1

8.2

대 만

1.5

3.5

3.0

2.4

2.4

3.5

인도네시아

1.0

2.0

3.6

3.9

3.8

3.6

태 국

3.2

5.9

4.9

4.8

3.5

1.1

일 본

0.1

-

0.2

0.3

-

0.1

한 국

0.5

1.3

1.0

0.6

0.5

0.6

(자료:UNCTAD)

 

그러나 개혁은 어디서나 저항이 있는 법. 오랫동안 말레이시아 구석구석에 뿌리내린 고질병은 어느날 갑자기 개혁 조치를 단행한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안와르 부총리가 IMF에게서 처방전을 빌려와 고질병을 치유하겠다고 덤벼들었지만, 권력과 밀착한 대기업들은 여전히 구제금융을 바라고 있었다.

총리실과 재무장관실(부총리실)의 견해가 달랐다. 국제투기자본을 공격하던 마하티르 총리는 애지중지하던 기업이 망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만 없었다.

그는 19983월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나스(Petronas)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도직전의 선박회사를 후한 값으로 매입하도록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총리가 정책 결정의 거의 전권을 행사했는데, 안와르의 개혁 조치도 마하티르가 인정 또는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총리실에서 다른 의견이 나올 경우 주무 부처에서는 애를 먹었다. 경제 위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마하티르와 안와르 사이에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져 갔다.

 

51세의 안와르는 공공연히 자신의 보스인 마하티르에게 도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마하티르는 6월말 경제문제를 직접 관장하는 특별기능부를 총리실 산하에 신설해, 장관으로 안와르의 전임자이자 라이벌인 다임 자이누딘(Daim Zainuddin) 전 재무장관을 임명했다. 다임을 시켜 안와르의 경제정책을 견제하고 나아가 힘을 빼버리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결정인 것이다.

안와르에겐 마하티르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19989월 마하티르는 안와르를 해임하고, 동시에 외환 거래를 통제했다. 국제 금융시장에 정면 도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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