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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위기
자국 자본에 이어 해외자본도 빠져나가자 수하르토 정부, IMF에 구제금융 신청
[1997 인도네시아②] IMF에 구제금융 요청
2019. 08. 28 by 김현민 기자

 

19977월말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먼저 달러를 빼내 도피하자, 미국의 뮤튜얼 펀드들도 인도네시아를 탈출해 루피아로 투자된 돈을 달러로 전환해 탈출하기 시작했다.

샌디에이고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니콜라스-애플게이트(Nicholas-Applegate) 뮤튜얼 펀드는 인도네시아 증시에 600만 달러를 투자했다. 7월말이 되자 루피아 하락폭이 2%에 이르렀다. 한달 사이에 절하 폭이 연간 평균절하폭의 절반에 이르자 일단 투자 회수문제를 논의해볼 필요가 생겼다.

727일 일요일. 니콜라스-애플게이트의 펀드매니저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매니저들 사이에 의견이 오갔다. 회의에서는 2%의 루피아 절하가 폭락의 시초요, 조짐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수석 펀드매니저인 페드로 마칼(Pedro Markal)씨는 메릴린치 증권의 자카르타 지점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메릴린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결론은 투자회수였다. 이 뮤튜얼 펀드는 즉각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돈 전액을 빼 냈다. 이 펀드의 회수 시점은 적절했다. 그후부터 루피아는 폭락했고, 더 이상 손해보기 직전에 돈을 뺐으니, 펀드매니저들의 판단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뮤튜얼 펀드들도 니콜라스 펀드의 길을 줄줄이 따라가면서 인도네시아 증시에 루피아로 바뀌어 투자됐던 달러자금이 대거 철수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달을 넘겨 8월이 되자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했다. 중앙은행은 11%였던 3개월 짜리 단기 금리를 두배 이상인 28%로 인상했다. 이자를 많이 줄테니 달러를 빼가지 말라는 신호였다. 게다가 중앙은행은 200억 달러나 남아있는 외환 보유액을 써서 어떻게 해서라도 루피아 하락을 막으려고 했다. 인도네시아 재무부는 국내 기업들로 하여금 루피아를 매각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와 중앙은행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루피아 하락을 저지하지 못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안간힘을 쓸수록 국내는 물론 해외투자자들은 저지 노력이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달러 사재기(자금 해외도피)에 열중했다.

814일 드디어 중앙은행은 더 이상 루피아 방어를 하지 않겠다며 항복을 선언했다. 즉시 환율은 1달러당 3,000 루피아를 돌파하며 곤두박질쳤다.

그날은 자카르타 증권감독위원회(Bapepam) 창립 20주년 기념일이었다. 자카르타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1천여 명의 증권인과 기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하르토 대통령이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났다. 증권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수하르토의 딸이 기념 연설을 마친 후, 중앙은행 총재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환율 밴드를 풀고 변동환율제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순간 침묵이 스쳐지나갔다. 중앙은행 총재는 그 자리에 모인 많은 투자자들에게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물론 수하르토 일가도 패배자였다.

인도네시아의 기업과 외국인 투자자들은 루피아 하락에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 서로 루피아를 팔고 달러로 전환하는데 경쟁적으로 움직였다. 루피아는 1달러당 4,000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108일 자존심이 강한 수하르토 정부는 마침내 IMF에 구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틀후인 10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들을 자카르타로 초청, 인도네시아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정부 관리들은 외환투기자들이 인도네시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반역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반역행위는 사형에 해당한다. 그들은 사형에 처할 투기자들에게마저 고개를 숙이며 애원했던 것이다.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자카르타에 모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투자자의 신뢰감을 얻었다. 1달러당 3,700대까지 떨어졌던 루피아는 하루만에 3,500선을 회복했다. 자카르타의 언론들은 헤지펀드들이 인도네시아에 많은 돈을 투자할 것이라고 희망적인 보도를 했다. 그러나 유독 투자를 한 헤지펀드는 타이거 펀드 하나밖에 없었다. 타이거 펀드는 15,000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루피아가 다시 하락하자 금새 돈을 빼돌렸다.

한국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헤지펀드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를 만나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계가 있었다. 투자자들의 심리를 일시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으나, 결정적인 이문이 남지 않으면 결코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마지막 선택은 IMF밖에 없었다. 1031일 수하르토 정부는 IMF 패키지를 수락하고 43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선택했다.

미국은 태국의 IMF 구제금융에 한푼도 내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에는 30억 달러를 내겠다고 나왔다. 아시아 위기가 번지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태국보다 경제력이 크고 펀더멘털이 좋은 인도네시아가 흔들리고 있다는데 미국은 당황했다. 위기의 전염이 여기서 그치지 않으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IMF가 인도네시아에 돈을 주면서 요구한 것은 수하르토 일가의 기업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타깃이 국민차 생산 공장에 수하르토 아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미국과 IMF는 정경 유착의 자본주의가 인도네시아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IMF의 강력한 요구에 수하르토 정부는 수하르토의 아들 후토모 만달라 푸트라(Hutomo Mandala Putra)를 사장 자리에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을 앉혔다. 새 사장도 수하르토 기업의 인물이었다. IMF 요구에 마지못해 따르기는 했으나, 그것 자체가 IMF를 자극하는 요소였다. IMF와 수하르토 정부의 팽팽한 긴장이 시작됐다. 1)

한국의 기아 자동차는 이 회사를 지원했다. 김선홍 회장이 수하르토 아들과 친분관계를 이용해 기아의 동남아 진출 기지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두 회사의 합작은 국제적인 망신 거리가 됐다. 한국은 기아 사태 이후 IMF에 가게됐고, 인도네시아도 국민차 생산공장이 IMF의 타깃이 됐으나, 우연치고 정말로 이상한 우연이다.

 

어쨌든 IMF와 구제금융 합의가 이뤄진 후 루피아는 일시적이나마 회복세를 보였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통화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함에 따라 아시아 시장이 다시 흔들렸고, 125일에는 수하르토 와병설이 나돌았다. 그는 당초 계획했던 여행을 포기하고 병상에 누웠다. 인도네시아를 32년간 통치한 절대권력자의 와병설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루피아화는 보름 사이에 1달러당 3,700에서 5,600으로 폭락했다. 1218일 수하르토가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나 건강을 과시함으로써 루피아 자유낙하가 일단 멈췄으나, 인도네시아 경제는 치명타를 입고 있었다.

 

 

1) NYT, 971031US is set $3 billion to help bolster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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