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아시아위기
고정환율제 도입해 위기 돌파 의지, 미국과 IMF는 반대…수하르토 7연임 성공
[1997 인도네시아⑤] 수하르토 권력연장
2019. 09. 09 by 김현민 기자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부는 미국과 IMF의 강요로 수모를 참아가며 IMF 협정에 서명했다. 수하르토 정부는 19 981월까지만 해도 협정 준수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수하르토는 미국에 등을 돌려서는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고, IMF와 싸우다간 국제 외환딜러, 채권은행등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8119IMF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5개 은행에 대한 합병을 단행했다. 두달전 16개 은행 폐쇄가 가져온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IMF 돈을 얻어 쓰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가 불안해 지자 외국 은행들은 인도네시아 은행에 빌려준 돈을 회수했고, 은행 부실이 가속화됐다. 인도네시아 은행의 전체 여신 중 25%가 악성 여신으로 돌변했다. 상장 금융기관 228개사 중 22사만이 자산이 부채보다 많았고, 나머지는 자본잠식 상태에 있었다. 수하르토 정부는 이중 가장 부실한 5개 은행을 합병함으로써 그 동안 중단한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다시 시작할 것임을 국제 금융시장에 알렸다.

그리고 며칠후 수하르토 정부는 후속 조치로 폐쇄 또는 피합병 은행에 대한 예금자 보호 금융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제한 철폐 은행의 부실 여신을 청산하기 위한 특별 기구 설립 등을 발표했다.

은행 폐쇄가 재개되자, 예금자를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예금인출 사태가 다시 확산됐다. 얼마 전까지 더 이상의 은행 폐쇄가 없다던 정부가 IMF의 압력에 다시 은행의 문을 닫으니, 예금자로서는 건실한 은행마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예금자들은 민간은행에 부어두었던 돈을 빼내 안전한 정부투자 은행 또는 외국은행에 계좌를 옮겼고, 많은 사람들은 현금으로 보유했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금고가 날개돋친 듯 팔렸다. 예금자이 현금을 선호한 방증이었다.

예금자로선 가장 안전한 자금 도피처가 달러였다. 루피아 하락이 멈추지 않는 한 달러로 전환해놓으면 안전하고, 절하폭만큼의 이자를 챙길 수 있다.

 

수하르토 정부는 루피아 애호운동(I love Rupiah)을 벌이는 한편 인도네시아 경제력의 3분의2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들에게 달러 본국 송금운동에 나서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은행 합병에 불안을 느낀 예금자들의 외화 도피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고 루피아화는 가속 페달을 밟은 양 폭락했다.

IMF2차 협정을 체결하고 1주일이 지난 123일 루피아는 장중 한때 1달러당 16,500으로 폭락했다. 하루만에 43%나 폭락한 것이다. 금융시스템이 완전 마비상태에 들어갔고, 인도네시아가 포괄적인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이라는 루머가 국제 사회에 설득력 있게 전달됐다. IMF 처방은 인도네시아의 병을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데도, 미국 재무부는 IMF 조건 이행 요구를 되풀이했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IMF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것만이 경제안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1)

 

이런 와중에서 수하르토의 장기집권욕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하르토는 32년간의 집권도 모자라 7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또 나서려고 움직였다. 국제 금융시장의 외환 거래자와 투자자들은 수하르토를 싫어했다. 그들은 수하르토가 재집권을 위해 움직일 때마다 루피아를 떨어뜨렸다.

선거라는 정치제도는 공화정을 유지하는 나라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지구촌에 단일 금융시장이 형성되면서 선거는 국제투자자들의 투기의 조건이 됐다. 독재국가이든, 민주국가이든, 선거를 앞둔 집권자들은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국제시장의 투자자들보다는 국내 유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내놓기 때문에 시장원리를 왜곡하거나 국제시장의 요구에 거스르기 쉽다.

인도네시아 선거는 한국에서 과거 유신시절 체육관 선거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수하르토가 마음만 먹으면 당선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런데 국제투자자들의 보이지 않은 손은 수하르토의 재집권에 역방향으로 움직였다.

 

스티브 행크 교수와 수하르토 /스티브 행크 교수 트위터
스티브 행크 교수와 수하르토 /스티브 행크 교수 트위터

 

선거를 한달 앞둔 2월초 수하르토에겐 환율 안정이 최상의 목표였다. 그때 그에게 처방전을 알려준 사람이 미국 명문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스티브 행크(Steve Hanke) 교수였다. 그는 때론 인도네시아의 경제고문으로, 때론 수하르토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나섰다.

행크 교수는 미국 경제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업적을 담은 보고서와 보도자료를 산더미 같이 돌렸지만, 미국 언론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행크 교수의 이론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는 스타로 변했다.

행크 교수는 자신의 이론은 통화위원회 제도(Currency Board)를 인도네시아에 적용할 것을 설득해, 수하르토가 이를 받아들였다. 통화위원회 제도는 환율을 달러, 또는 마르크 등 특정 기축통화에 고정시키고, 금리를 자율조정하는 방식이다. 통화위원회 제도 옹호론자들은 중앙은행이 외환수급 상황에 맞춰 환율 등락을 조정하는 방식보다 이 제도가 외환위기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통화위원회 제도를 도입한 나라에서는 정부가 헌법 또는 법률로 환율을 정해 놓는다. 홍콩은 1983년 이 제도를 도입했고, 아르헨티나는 1991년 행크 교수의 권고로 이 제도를 채택했다. 행크 교수는 이어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등 공산주의를 버리고 새로이 자본주의를 선택한 국가들이 이 제도를 채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통화위원회 제도는 외환이 부족할 때 금리를 폭등시켜 주가가 폭락하는 위험이 있다.

행크 교수는 통화 위원회 제도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TV에 출연해 세계적으로 통화위원회 제도가 실패한 나라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위기 해결책으로 통화위원회 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사람은 행크 교수만이 아니다. 인도네시아가 IMF2차 협정을 체결하기 직전인 112일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 방어를 위해 통화위원회 제도를 도입해 볼만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2)

통화위원회 제도의 옹호론자들은 외환 위기를 겪은 맥시코와 아르헨티나를 비교하면서 이 제도를 도입한 아르헨티나가 위기를 쉽게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멕시코 중앙은행은 95년초 페소화 가치를 50% 이상 절하했으나, 아르헨티나의 카발로 도밍고 재무장관은 환율을 달러에 고정시키고,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95년 멕시코의 GDP는 전년대비 31.8%나 감소한 반면 아르헨티나의 GDP는 그해 1% 감소에 그쳤다. 그후 아르헨티나는 완만한 경제 성장을 달성했지만, 멕시코 경제는 회복된 후에도 97GDP가 위기전인 94년의 수준에 못 미쳤다. 아르헨티나는 연간 2%의 인플레이션을 달성한 반면, 멕시코는 페소화 폭락으로 50% 이상의 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홍콩은 통화위원회 제도가 잘 운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주변 국가들의 통화가 폭락하는데도 홍콩은 통화를 방어할 수 있었다.“

 

미국 경제학계에서 통화위원회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머튼 밀러(Merton Miller)는 행크 교수가 탁월한 이론가라며 칭찬했고, 버클리대 아이헨그린 교수, 하버드의 스티븐 라델렛 교수, 알링턴대의 슐러 교수들이 행크 이론에 동조했다.

 

그러나 미국과 IMF는 수하르토의 계획에 반대했다. 수하르토와 IMF의 일대 결전이 불가피했다.

213일 미셸 캉드시 IMF 총재는 홍콩과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한 통화위원회 제도가 언젠가 인도네시아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며 미국내의 일부 통화위원회제도 옹호론자를 의식한 듯 완곡한 표현을 썼다. 그러나 그는 만일 인도네시아가 지금 그 제도를 도입한다면 실패할 것이고,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캉드시는 자신의 입장이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합의된 사항임을 재삼 강조했다. IMF는 한수 더 떠 3월중에 제공하기로 예정돼 있던 30억 달러를 중단할 가능성도 있다며, 통화위원회제도 철회에 압력을 넣었다.

 

그날 행크 교수는 자카르타에 가 있었다. 그는 정부 수뇌들을 두루 만난 후 통화 위원회 제도 도입을 IMF와 협상할 것이라고 밝히며 인도네시아의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행크 교수는 1달러당 5,500 루피아에서 환율을 고정시키는 방안을 타진하고 있었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수하르토의 아들들이 통화위원회 제도의 도입을 위해 행크 교수를 지원하고 있다는 설이 돌았다. 뉴욕 월가에서는 수하르토 정부가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이 운영하는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성공가능성이 없는 제도를 도입하려고 한다는 혹평이 나왔다.

218일 수하르토는 통화위원회 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소에드라자드 디완도노 중앙은행 총재를 해임하고, 하급직에 있던 스자릴 사비린씨(Sjaril Sabirin)를 신임 총재로 임명했다. IMF와 본격적인 싸움을 벌일 생각이었다.

양측간에 대결이 팽팽하자, 미국은 2월말 부통령을 지냈던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씨를 인도네시아에 특파했다. 미국은 IMF가 수하르토를 자극하고 있다고 판단, 직접 고위층을 보내,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선거를 열흘 앞둔 지금, 수하르토는 IMF에 또다시 굴욕적인 항복을 할 수 없었다. 선거를 나흘 앞둔 37IMF30억 달러의 자금 제공을 중단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수하르토는 4일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11일 수하르토는 일곱번째로 7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호소했다.

우리는 지난 4반세기 동안 누려왔던 경제 성장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풍요를 누릴 수 있지만, 국가는 더 이상 낭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눠 가져야 할 것입니다.”

칠순을 넘긴 수하르토는 취임 연설을 경제 위기 극복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국민들의 마음은 이미 수하르토를 떠나고 있었다.

 


1) NYT, 98123Indonesia currency falls hard, clouding recovery

2) WSJ, 98112Saving Asia, 1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