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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M 파산
뉴욕 Fed 실사 이틀만에 구제금융 전격 결정…“LTCM을 살려라”
[1998 LTCM 위기②] 채권 대부의 파산
2019. 09. 13 by 김현민 기자

 

뉴욕 연방준비은행 부총재였던 피터 피셔는 당시의 심정을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직관이 필요했다. 이 헤지펀드는 허리케인의 눈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피셔의 보스인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 뉴욕 연준 총재(64)는 오래전에 예정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 있었다. 피셔는 런던으로 전화를 걸어 상황의 긴박함을 알렸다. 맥도너와 피셔 두사람이 직관적으로 내린 결론은 LTCM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뉴욕 증시가 개장하기 두시간 전인 1998922일 아침 730, 피셔 부총재는 총재를 대신해 월가의 기라성 같은 금융인을 뉴욕연준 회의실에 비상 소집했다. 맥도너 총재가 밤비행기로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하오 830, 월가의 기라성 같은 금융인들이 속속 뉴욕 연준 석조건물에 도착, 회의실로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따끈한 음료수만 놓여 있을 뿐 러시아에서 불어닥친 냉기가 감돌았다.

피셔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느 은행이 얼마를 내놓아야 한다는 따위의 구체적인 말을 피했다. 그렇다고 공공자금을 퍼부어 헤지펀드를 구제하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선 상황이 심각함을 알렸다.

이 헤지펀드가 무너지면 금융시장에 큰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를 살리는데에 우리 모두의 이해가 걸려 있습니다.”

월가에서 뼈가 굵은 금융인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구제금융이었다.

피셔는 월가 은행들이 공동으로 LTCM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라는 뜻을 은연중에 밝혔던 것이다. 이로써 씨티, 체이스맨해튼, 골드만 삭스, 살로먼 스미스바니등 월가 16개 은행은 362,500만 달러의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 자금을 지원했다. 그것도 투기를 일삼는 헤지펀드에 막대한 자금 지원을 종용함으로써 미국 중앙은행은 스스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범하고 말았다.

 

존 메리웨더
존 메리웨더

 

그러면 뉴욕 연준이 실사 이틀만에 구제금융을 주기로 직관적으로 판단한 롱텀캐피털 매니지먼트(LTCM)이란 헤지펀드는 어떤 회사인가.

LTCM의 창업자는 존 메리웨더(John Meriwether)였다. 당시 나이 51. 그는 뉴욕 금융시장을 아수라장으로 몰아넣은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집은 뉴욕시 북동쪽 웨체스터 카운티에 있다. 대지면적만 67 에이커, 한국식 평수로 계산하면 82,000 평의 호화저택이다. 숲속 한가운데 골프장만한 잔디밭이 가꿔져 있고, 뒷녘으로 저택과 창고, 말 구유간등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잡지인 포천지는 헬리콥터를 동원, 그의 저택을 찍어 게재한바 있다.)

이 조용한 저택이 19989월 이후 시끄러워졌다. 사진기자들이 닥치고, 저널리스트들이 함밤중에 찾아와 메리웨더와 인터뷰하겠다고 덤벼들어 그의 부인이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다. 미국의 도하 언론들은 웬만한 인기스타에 못지 않게 그의 스토리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도대체 메리웨더가 어떤 인물이길래 그 야단들이었을까.

 

그는 1970년대에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뉴욕 금융시장이 그의 경제학의 이상을 실현할 가장 좋은 실습장이라고 판단, 월가에서 직장을 구했다.

1984년 월가에서 손꼽히는 투자은행 살로먼 브러더스(Salomon Brothers)에서 채권 거래 팀을 확보했다. 그의 팀은 살로먼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내는 팀의 하나였다. 미국 연방정부는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국채발행으로 소화했다. 연방정부가 발행하는 재무부 채권(TB: Treasury Bond)은 급팽창했고, 채권 이자율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갔다. 영리한 투자자라면 채권시장의 변동에서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리웨더는 채권 전문 펀드매니저로 성장해갔다.

그 무렵 살로먼 브러더스는 미국 채권시장의 개척자로서 골드만 삭스등 경쟁회사를 따돌리고, 가장 잘나가고 있던 회사였다. 살로먼에서 채권투자의 대부는 존 굿프렌드(John Gutfreund) 회장과 그의 직계 펀드매니저인 크레이그 코우츠(Craig Coats)씨였고, 메리웨더는 이들의 화려한 명성에 눌려 있었다.

 

메리웨더의 명성은 10년전 블랙먼데이(Black Monday)로 거슬러 간다. 블랙먼데이는 19871019일은 뉴욕 주가가 역사상 가장 큰폭으로 폭락한 날을 말한다. 금융시장의 혼란은 국가의 쿠데타 발생한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월가의 승자와 패자는 호황 때 판별되지 않는다. 불황이 그들을 가늠한다. 낡은 투자방법에 의존하던 재래식 금융그룹이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새로운 투자기법을 가진 그룹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메리웨더는 뉴욕 증시 대폭락을 역으로 이용, 굿프렌드를 따돌리고 월가 채권 시장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미국 채권시장의 대부로 통했다. 그가 창업하고 운영하는 거대한 헤지펀드가 파산 위기에 몰리자 미국 중앙은행이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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