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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비잔티움 시대에 축조…에페수스 항구가 폐쇠되면서 요새도 방치
터키 셀축의 상징, 아야술룩 요새
2019. 09. 14 by 김현민 기자

 

터키 이즈미르 주(İzmir Province)의 셀축(Selçuk)은 중국 몽골고원에 유목생활을 하던 투르크족(돌궐)이 수세기를 걸쳐 소아시아 반도(아나톨리아)로 이동해오면서 당대 동로마제국(비진티움)을 쫓아내고 점거했던 도시다. 오스만 투르크가 세력을 확대하기 이전에 이란과 터키 일대를 지배하던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에서 이름을 따왔다.

면적 280, 인구는 34(2012)의 셀축은 고대 그리스·로마 도시인 에페수스에서 북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셀축 시내에 들어오면 아야슬룩 언덕(Ayasuluk Hill)에 높게 솟아 있는 성채가 눈에 띤다. 성채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 초승달과 별을 그린 대형 터키 국가기 드리워져 있다.

저 성은 누가 지었을까. 터키는 왜 저 성에 대형 국기를 걸어 놓았을까.

성의 이름은 아야술룩 요새(Ayasuluk Fortress)또는 셀축 성(Selçuk Castle)이라고 부른다.

 

아야술룩 요새 /김현민
아야술룩 요새 /김현민

 

셀축 성은 고대도시 에페수스(Ephesus)가 쇠퇴하면서 지어졌다.

에페수스는 고대에 항구가 인접한 도시였다. 동로마제국 초기만 해도 에페수스는 항구도시로서 기능을 했다. 하지만 강물에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항구가 진흙이 쌓이는 침니(沈泥) 현상이 생기고, 6세기엔 항구는 늪으로 변하고 에페수스는 쇠락하게 되었다. 지금은 에페수스 유적은 바다에서 5km 떨어진 내륙 도시가 되었다.

에페수스가 쇠락하면서 사람들이 2km 떨어진 아야술룩 언덕으로 이동해왔다.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은 아야슬룩 언덕에 방어용 요새를 지었다. 석재는 못쓰게 된 에페수스에서 가져왔다.

 

아야술룩 요새의 측면 /김현민
아야술룩 요새의 측면 /김현민

 

아야술룩 언덕에는 요새 바로 아래에 대규모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믿는 사도이자, 신약성서 요한복음을 지은 성 요한이 묻힌 교회(Basilica of St. John). 동로마제국은 성요한 교회도 성벽으로 둘러쌌는데, 아이술룩 요새는 윗성, 성요한 교회는 아랫성이 되었다.

아이술룩 요새는 성벽 두께가 4m나 된다. 성벽 표면은 대리석으로 다듬고, 내부에는 자갈에 회반죽을 부어 요즘의 콘크리트처럼 견고하게 축조되었다. 성벽의 길이는 1.5km에 이르고, 17개의 탑이 세워져 있다. 요새의 남문은 성요한 교회의 북문과 연결되어 있다. 외적이 침입할 경우 어느 한 성이 뚫리면 다른 성으로 이동해 저항하도록 한 구조다.

요새는 대략 5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8세기경에 5각형 꼭지점에 감시용 탑을 설치했다.

 

요새 평면도 /김현민
요새 평면도 /김현민

 

에페수스 항구의 침니현상이 심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에페수스인들이 아야슬룩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비잔티움 말기에는 항구가 완전히 폐기되면서 아야술룩 언덕이 에페수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1090년 텡그리비르미시(Tengribirmish)가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족이 에페수스를 침공했을 때 에페수스는 아야술룩의 조그마한 촌락으로 영락해 있었다. 7년후 비잔티움이 아야술룩을 탈환해 마을 이름을 아기오스 테올로구스(Agios Theologus)로 개칭했다. 비잔티움은 14세기초까지 요새와 성요한 교회를 지켰지만, 끝내 셀주크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셀주크인들은 그 언덕의 이름을 아야술룩(Ayasuluk)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투르크족이 에페수스(아야술룩)을 차지한 후 요새 성벽을 개수하고, 항구를 준설해 다시 사용했다. 그후 아야술룩은 일시적으로 번성하는 듯 했다.

 

15세기초 셀주크 투르크가 쇠퇴하고 또다른 투르크족인 오스만이 아야술룩의 주인이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아야술룩을 차지했을 때 항구는 다시 진흙으로 뒤덥혀 늪으로 변해 버렸다. 아야술룩은 다시 쇠퇴했고, 작은 마을로 변해버렸다. 오스만 투르크는 요새를 방어거점으로 전환시키고 4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18세기에 아이슬룩의 인구가 줄면서 요새도 버려졌다.

1914년 오스만투르크는 아이술룩을 동족인 셀주크 투르크의 이름을 따서 셀축이라고 명명했다.

19211차 대전에서 터키가 패하고 그리스군이 셀축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당시 그리스인은 전체인구 600명 가운데 580명을 차지했다. 그리스인들은 그후 1923년 그리스-터키 조약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갔고, 도시는 텅 비게 되었다.

최근들어 셀축이 관광 도시로 변모하면서 관광업을 하기 위해 터키인들이 셀축에 다시 거주하게 되었다.

 

요새 내부에는 폐허가 된 이슬람 모스크, 물 저저장 시설로 쓰이는 교회, 가옥들이 있다.

요새 인근에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요새 아래에는 1375년에 지어진 이사 베이 모스크(İsa Bey Mosque)가 있다. 이 모스크는 다마스쿠스 출신의 건축가 디미쉬클리 알리(Şamlı Dımışklıoğlu Ali)가 시리아 풍으로 설계한 것으로 셀주크 왕조에서 오스만 왕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건축양식이다.

 

이사 베이 모스크 /위키피디아
이사 베이 모스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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