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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9세기 독일 수녀가 마리아의 계시를 받고 지목…그후 선교사들이 발견해 교황청이 공인
성모 마리아 승천한 곳, ‘마리아의 집’
2019. 09. 16 by 김현민 기자

 

터키 셀축(Selçuk)의 에페수스(Ephesus) 유적지에는 초기 기독교의 유적지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성모 마리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승천했다는 성모 마리아의 집’(House of Virgin Mary)이다.

우리는 가이더를 불러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에페수스 유적지를 지나 불불산(Bülbüldağı)이라는 가파른 야산을 올라 가니, 기독교 성지가 나타났다. 입구에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축복하는 조각상이 나타났고, 곧이어 초기 기독교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곳이 나왔다. 곧이어 성모 마리아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 한글로 된 안내문이 이곳의 유래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많이 찾는다는 증거였다.

 

성모 마리아의 집 /김현민
성모 마리아의 집 /김현민

 

에메리히 수녀 /위키피디아
에메리히 수녀 /위키피디아

 

이 곳의 유래도 신비했다.

19세기에 독일 뒬멘(Dülmen)이라는 농촌 마을에 안네 카터리네 에메리히(Anne Catherine Emmerich)라는 수녀가 있었다. 그 수녀는 꿈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가 승천한 곳의 위치와 교회의 모양을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클레멘스 브레타노(Clemens Brentano)라는 사람이 수녀를 찾아가 5년동안 그녀의 증언을 듣고 기록해 두었다. 브레타노는 수녀가 꿈 속에서 계시 받은 내용을 정리해 1852년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출간했다.

에메리히 수녀는 한번도 독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모 마리아 거주지와 승천 장소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구술했다. “성모 마리아는 에페수스에서 3시간 반 걸리는 시골에 살았다. 마리아의 거주지는 높은 언덕에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의 왼쪽에 있다. 에페수스에 서남쪽의 가파른 야산을 오르면 있다.”

에메리히는 그 집의 구조가 직사각형 석조물이고, 창문은 높고 지붕은 평평하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가 나 있다는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꿈에서 본 대로 서술했다. 문의 위치, 굴뚝의 형상등도 설명했다.

 

그랑시 수녀 /위키피디아
그랑시 수녀 /위키피디아

 

1881년 라자로 교회의 아베 줄리앙 구예(Abbé Julien Gouyet)라는 프랑스 신부가 브레타노의 책을 읽고 탐사반을 이끌고 현지를 답사했다. 놀랍게도 구예 신부는 에메리히 수녀가 서술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유적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구예 신부의 발견은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10년 후인 1891729일 프랑스의 마리 드 망다 그랑시(Marie de Mandat-Grancey) 수녀를 비롯해 폴린(Poulin)과 융(Jung) 등 라자로 교회 신부들이 구예 신부의 발견 기록을 보고 그 유적지를 다시 찾았다. 이들은 폐허가 되어 지붕도 없는 이 돌집이 오랫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곳 주민들은 초대 교회 시절 에페수스에 살던 기독교인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터키어로 동정녀의 문간’(Panaya Kapulu)이라고 부르며,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815일에 이곳을 성지 참배를 해 왔다.

 

성모 마리아의 집을 다시 일으킨 사람은 그랑시 수녀였다. 그랑시 수녀는 그 집을 매입하고 복구하고 보존하는데 매진했다. 그랑시 수녀는 이곳 마리아의 집에 조그마한 가톨릭 성당을 하나 세웠다.

 

성모 마리아의 집 내부 /위키피디아
성모 마리아의 집 내부 /위키피디아

 

성모 마리아의 집에 관한 기록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돌아가기 전에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다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시며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니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9:26~27)

요한은 성모 마라이와 함께 에페수스로 오게 되며, 그 사실은 에페수스에서 열린 3차 종교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위해 산위에 집 한채를 지어드렸다고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집의 장소는 잊혀지고 폐허가 되었다.

 

그동안 성모 마리아의 선종 및 승천에 관해 예루살렘 선종설과 에페수스 선종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성모 마리아의 선종 장소가 예루살렘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교부들 사이에 보편적이었다. 마리아가 에페수스에서 선종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12세기 들어 비로소 대두되었다.

마리아의 집의 발견은 에페수스 선종설의 신빙성을 높여주었다. 에페수스 선종론자들은 에페수스 유적지 내에 섹켸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었음을 증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에페수스에서 선종했다는 전승과 에페소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 유적에 대해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었다. 가톨릭 교회는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에페수스의 돌집이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는 선언을 내리지 못했다.

 

입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조각상 /김현민
입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조각상 /김현민

 

교황청이 이 논쟁을 정리했다. 1896년 교황 레오 13세와 1961년 교황 요한 23세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 마리아가 선종한 장소로 전해지는 성당(마리아의 무덤)에 대한 권위를 폐지하는 한편, 에페수스의 마리아의 집에 순례 성지로서의 권리를 부여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726일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19791130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함으로써 성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2006112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터키 순방 중에 4일째 되는 날에 에페수스를 찾아 동정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다.

 

성모 마리아의 집은 터키어로 Meryemana 또는 Meryem Ana Evi라고 한다.

마리아의 집에서 복원된 부분은 원래 남아있던 부분과 구분하기 위해 붉은색 줄로 칠해 놓았다. 마리아의 집은 그리스도교인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마리아의 집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었다. 마리아 상은 손이 잘려 있는데, 누군가 은으로 된 손을 잘라갔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집 아래에는 소망을 적어 올리는 벽이 있다. 이 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의 소망을 적어 벽에 꽃아 두었다. 우리도 소망을 적은 쪽지를 한쪽 구석에 꽂았다.

 

소원의 벽 /김현민
소원의 벽 /김현민
한글 안내문 /김현민
성수가 나오는 곳 /김현민
입구의 성모 마리아 상 /김현민
입구의 성모 마리아 상 /김현민
한글 안내문 /김현민
한글 안내문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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