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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M 파산
숄스-블랙 팀, 옵션거래 가격설정 이론 발표…파생상품 활성화, 거래량 폭증
[1998 LTCM 위기⑦] 파생금융상품의 원조
2019. 09. 18 by 김현민 기자

 

로버트 머튼 교수는 처음부터 숄스-블랙의 팀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는 같은 MIT 동료 교수들의 연구 결과를 고도의 수리계산법을 동원, 공식화했다. 머튼은 숄스-블랙 팀이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꾸물거리자 자신의 수리공식도 발표하지 않았다.

1973년 숄스-블랙 팀은 마침내 옵션거래의 가격 설정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고, ‘블랙-숄스 이론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머튼 교수의 수학적 계산이 가미된 이론이었다. 이 연구 결과에 대해 20여년후인 1997년에야 노벨 경제학상이 시상됐는데, 애석하게도 블랙 교수는 2년전인 1995년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노벨상은 사자(死者)에게 수여되지 않는다. 따라서 블랙-숄스 공식은 숄스와 머튼의 공동 작품으로 되었고, 두 사람은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다.

세 경제학자들의 연구는 국제 금융시장을 가히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투자자는 정확하게 계산된 스톡옵션을 활용함으로써 주가 등락의 피해를 상쇄할수 있게 됐다. 월가를 비롯, 국제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은 블랙-숄스 공식을 도입, 파생금융상품을 운영했고,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유동성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공식이 새끼를 쳐 선물 거래등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을 탄생시켰고, 세계 최대 선물시장인 시카고 선물거래소(CBOE)에서도 이 공식을 토대로 거래됐다. 블랙-숄스 공식이 유명해지자, 세 경제학자들은 대학 강단을 떠나 월가 투자회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연구결과를 강의했다.

머튼과 숄스는 MIT에서 친구처럼 지냈다. 옵션 가격 뿐 아니라 다른 연구에서도 둘은 함께 작업했다. 투자회사인 도널드슨, 루프킨 & 젠릿(DLJ)에서 장외 거래 옵션 가격 결정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할 때나 시카고 옵션거래소(CBOE)의 일을 보아줄 때도 두 교수는 늘 의논하고 서로 자문을 구했다. 두 사람은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이론을 바탕삼아 70년대에 자그마한 뮤추얼 펀드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두 사람중에서 숄스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농담이나 허튼 소리를 잘했다. 숄스는 학자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가 학자를 하지 않고 세일즈맨을 했더라면 더 큰 성공을 했을 것이라고 농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에 비해 머튼은 충동적이었다. 그는 대학시절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어 경주대회에 나갔을 정도로 다혈질이다.

두 학자의 아이디어는 뉴욕 월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본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고 있었다.

 

숄스-블랙 공식. 이 난해한 수학을 통해 파생상품 이론이 탄생했다. /위키피디아
숄스-블랙 공식. 이 난해한 수학을 통해 파생상품 이론이 탄생했다. /위키피디아

 

두 학자를 월가 금융시장에 접목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존 메리웨더였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와 최고의 트레이더의 결합은 1980년대에 가장 잘나가던 월가 투자은행인 살로먼 브러더스에서였다. 당시 메리웨더는 살로먼에서 일했다. 1988년 머튼의 제자로 하버드대 교수를 그만두고 메리웨더 군단에 합류한 로젠펠드가 스승을 찾아와 살로먼에서 일하자고 설득했다. 그때 막 MIT에서 하버드로 옮긴 머튼은 존 굿프렌드(John Gutfreund) 살로먼 회장을 만난후 자문위원 자격으로 살로먼에 사업 자문과 금융시장 변화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머튼이 살로먼에 적을 두고 얼마후 스탠포드대로 옮긴 숄스 교수도 살로먼에 합류했다. 숄스는 사교모임에서 메리웨더를 만난 적이 있으나, 그를 살로먼에 입사하도록 영입교섭을 한 사람은 로젠펠드였다. 숄스는 고문 자리를 맡은지 얼마후 이사(managing derector) 자격을 획득했다. 숄스는 트레이딩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회사 문제에 참견했다. 둘은 93년까지 살로먼에서 자문과 이사로 근무했다.

메리웨더가 채권 사기사건에 휘말려 살로먼을 떠난후 3년만인 1994년 헤지펀드를 설립하자 두 교수는 창업멤버로 참여했다.

LTCM 설립 초기에 숄스는 헤지펀드 자금 확충을 위해 세일즈맨으로 활동했다. 숄스는 고객들을 만나 투자할 것을 설득했고, 그 일행은 10억 달러의 자금을 모아 헤지펀드에 부었다. 그를 만난 친구들은 숄스가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인지 세일즈맨인지 모를 정도로 뛰어난 화술로 장사를 하러 다녔다고 술회했다.

일단 헤지펀드가 가동되자 숄스와 머튼은 펀드의 트레이딩 룸보다는 강의실에 더 많이 있었다. 두 학자는 LTCM의 거래에 투자 공식을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실제 채권을 사고 파는 트레이딩은 메리웨더와 같은 전문적 트레이더들의 소관이었다.

학문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분명 다르다. 학문적 결과를 현실 세계에 적용, 입증하려는 시도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작업과는 또다른 문제다. 노벨 수상자들이 만들어낸 블랙-숄스 옵션 가격이론은 정상적인 시장 상황에서 주식과 유가증권의 거래가 이뤄지고 예외변수가 없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과거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도출한 수리적 공식이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해 금융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을 때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블랙-숄스의 이론은 1995년과 96LTCM에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러나 아시아에 경제 위기가 닥치고 19988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수학 공식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노벨 수상자들은 엄청난 재산상, 명예상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글로벌 금융시장이 얼마나 깨지기 쉽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들에겐 어쩌면 노벨상보다 더 값진 교훈이었을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해 한층 발전했지만, 다른 한편 노벨 수상자도 처벌하는 악마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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