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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연구
배(舟)와 고을(州), 주(周)는 강에서 기원한 형제관계의 단어들…원시 이동수단
떼배 탐험과 해양문화③…한자(漢字)의 배
2019. 09. 18 by 채바다

 

7. 문자에 나타난 떼배의 기원

상형문자는 물건의 형상을 그려서 만들어낸 문자이다. 중국은 은나라 때 갑골문, 주나라 때 금석문, 진시황 때 통일된 소전을 거쳐 한나라 때 해서가 등장하여 오늘날의 한자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배 주’()자를 살펴보고 그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배 주’()자는 내(), 고을(), 나라()에서 비롯되고 있다. ‘내 천’()자는 강물의 흐름을 보아서 만들었으며, ‘고을 주’()자는 에 가로로 자를 올려놓은 것인데, 이는 삿대를 상징한 것으로 김성호 박사는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 , 의 발음이 모두 인 것은 이들이 모두 에서 비롯된 형제 관계임을 시사하고 있으며, 중국의 배()는 내륙 하천에서 기원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주의 떼배도 일찍부터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섬진강 유역에서 고인돌과 주거지들이 발굴되고 있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 자의 변천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에 바다에서 태어난 해선(海船)이 아니라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강 유역 등지에서 문화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강을 오르내리는 나룻배 형태에서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차츰 해양으로 진출하면서 돛을 달고 노를 젖는 도구를 이용하였다. 한반도의 남서 해안과 제주에 이르는 문화 이동 뱃길도 배의 이동수단을 빌리게 된다. 제주는 지리적 독립성 때문에 오늘날까지 원형에 가까운 떼배가 오랫동안 사용되여 왔다. 태풍의 길목에 위치한 제주도는 떼배의 보관과 관리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요즘처럼 포구가 발달되지 않는 시대에 자연포구를 이용하기 마련이다. 한번 태풍이 불고 나면 배는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이처럼 떼배는 지역 풍토에 알맞게 만들어져 내려져 왔다.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강유역이기에 원시생활이라 할지라도 바다나 강을 끼고 살게 되면 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필수적 이동 수단은 배()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배는 그 당시만 해도 부족 간의 물자교류, 고기잡이, 사냥, 등의 수단으로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반도나 제주도는 물론 한반도 전역에 떼배를 이용했던 도서들이 많이 있다. 필자는 떼배의 분포를 확인하기 위해서 삼척 살산2리를 답사한 적이 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오동나무로 떼배를 만들어 해조류 체취에 이용하고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울릉도에서도 이와 같은 배를 이용하여 어로활동에 쓰였다고 했다.

 

중국 최초의 한자사전인 허신의 설문해자(說問解子, AD100)에 보면 주는 곧 오늘의 배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가 한 단계 발전된 자는 변에 여덟 자와 자가 조합된 글자이다. 영국의 학자 조셉 니담은 자를 승무원으로 자를 의 양기슭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자에 관하여는 장방형의 뗏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대나무 벌선(竹筏船)과 한국의 떼배는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으로 확인하게 된다. 線材만 통나무에서 대나무로 바뀐 것이다.

김성호 박사는 자는 승무원의 양쪽 팔에 각각 삿대를 자로 잡은 형상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도 이처럼 뗏목(竹伐船)이 점차 발달하여 오늘날 선박으로 발달되었음을 문자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 배를 통상 선박으로 부르게 된 것도 다음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북송 때 정도(丁度, 990~153) 집운(集韻)박은 배에 흰 돛을 단 배)라고 하였다.

다시 정리하면 선박이란 배가 삿대를 젓고 이동 도구로 사용 되면서 점차 선박으로 발달 과정을 파악하게 된다. 이처럼 선박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기원전후에 중국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선박에 대한 발달 과정들을 보게 된다.

 

8. 원시항해와 표류항해

원시 항해는 곧 표류항해와 다름없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으면 작은 배든 큰 대형 선박이든 가에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 하다.

이처럼 원시항해는 표류항해에서 비롯되고 있다. 주로 연안을 이용한 항해라 할지라도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목적지 이외 다른 곳에 상륙하게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따른다. 조류, 해류 등의 자연현상이다. 항해에서 이러한 자연현상을 거슬러 항해 할 수 없다. 이처럼 원시항해는 표류항해와 맞 물려서 항해를 한 것을 말한다.

이는 육상에서 정해진 목표물 따라 이동하듯이 항해도 해안선을 따라서 연안항해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차츰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별자리와 달의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 항해로 배의 위치와 방향을 추적하면서 항해 하고 있다. 그후 나침반이 등장하고 오늘날 과학장비를 이용한 전파항해 시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원시항해는 이처럼 열악한 환경조건에서 예기치 않는 기상 변화와 풍랑으로 인한 조난의 우려가 늘 도사리고 있다. 예기치 못한 바람과 기상변화에 민감하였다. 이런 항해는 고대시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기상조건은 항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원시항해는 항상 예기치 못한 기상과 풍랑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로 인해 많은 항해자들의 희생의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처럼 해상사고는 풍랑으로 인하여 항해자들을 괴롭혔다. 이처럼 고대 항해에서는 바람 역할이 7~8할이 넘었으며 나머지 2~3할은 조류와 해류의 영향에 크게 좌우 되었다.

 

항해자들은 차츰 항해 경험이 익숙해지면서 먼 거리 항해는 주기적으로 계절풍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 바람의 방향과 시기를 예감적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또한 먼 거리 항해를 위해서는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바람을 기다리며 출항 날짜를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차츰 구조선의 발달로 항해자들은 예측불허의 해상 상태와 기상변화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지에서 목적지를 뻔히 바라볼 수 있는 연안 항해를 하면서도 불시에 해안을 이탈하는 조난사고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악순환에도 항해자들은 끈임 없이 바다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처럼 한반도와 제주 사의에 발달된 도서들을 이용하면서 섬과 섬들은 징검다리 역할이 되 주었다. 뻔히 섬과 육지가 보이는 앞에서 불시에 갑작스런 폭풍을 만나면 조난과 난파를 거듭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먼 거리까지 표류하여 귀환길에 오르는 사고들이 나타났다. 항해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서 난파와 표류로 이어 졌다. 이런 사례들을 두고 표류 항해라 하겠다.

 

남태평양의 카누 /채바다 제공
남태평양의 카누 /채바다 제공
남태평양의 이중카누 /채바다 제공
남태평양의 이중카누 /채바다 제공

 

9. 조선시대 표류 선박

<제주인의 표해록2001>에 보면 4편의 표류기를 싣고 있다.

14708월 김배회 등 7명이 제주에서 진상품을 싣고 한양에 갔다가 제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13일 만에 중국 절강성으로 표류하여 돌아왔다.

14772월 김비의 등 8명이 제주에서 진상하는 감귤을 싣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폭풍을 만나14일 동안 바다를 떠돌다 유구국(일본 오키나와)으로 표류하여 3명만 살아남고 24개월 만에 일본을 거쳐 돌아 왔다.

1487년 최부(崔溥)9월 추쇄 경차관이 되 제주에서 일을 보던 중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폭풍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였다. 온갖 고초를 격어 북경을 거쳐 한양에 돌아 왔다.

 

장한철은 제주 사람으로 1771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육지로 나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유구국에 표착하였다.

이밖에도 이방익도 제주 사람으로 만경 현령을 지낸 아버지 이광빈을 만나러 출륙하다가 중국 팽호에 표류하여 1797년 윤 6월에 북경을 거쳐 서울에 돌아 왔다.

제주와 전남 연안을 따라 완도 청산도 여서도 추자도 등지를 거치는 동안 제주 연안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 오도(五島), 대마도 이끼섬으로 표류하는 사례들도 드물지 않게 벌어졌다.

이러한 기록 외에도 표류사고와 실종되어 알려지지 않는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표류 사례들은 뱃길이 얼마나 험난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고대 항해에서 바람의 역할은 8-9할이 넘었으며 나머지 1-2할은 조류와 해류의 영향들을 이용하였다. 계절풍을 이용하면서 바람의 방향과 시기를 예감적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먼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일주일 내지 1-2개월 심지어 해를 넘겨 신풍(信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고대 항해에 있어서 인간은 예측 불허의 기상 변화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발지에서 목적지를 뻔히 바라볼 수 있으면서도 불시에 해안을 이탈하는 조난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인하여 출발지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조난과 표류는 항해 목적지 이외 지역에 표착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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