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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923년 터키-그리스 인구교환 조약 체결…그리스인 120만, 터키인 40만등 160만 이동
그 많던 그리스인은 왜 터키를 떠났을까
2019. 09. 18 by 김현민 기자

 

그 많던 그리스인은 터키에서 왜 사라졌을까. 터키 소아시아 반도를 여행하다 보면, 수많은 그리스인 마을을 보게 된다. 비록 터키 서남해안에 아담하고 깔끔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오랫동안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14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 조사에서 전체인구 2,0975,345명 가운데 그리스인 인구는 1792,206명이었다. 많은 그리스인들은 터키 땅을 떠났고, 그곳에 지금은 터키인들이 살고 있다.

터키의 그리스인들은 1923130일에 체결된 터키-그리스 조약에 의해 거의 모두 떠나가 버렸다. 그 조약이 로잔느 조약(Treaty of Lausanne)이다.

 

터키 카이코이(Kayakoy) 지방의 옛 그리스인 마을. 1923년 그리스인들이 빠져나가면서 폐허로 변했다. /위키피디아
터키 카이코이(Kayakoy) 지방의 옛 그리스인 마을. 1923년 그리스인들이 빠져나가면서 폐허로 변했다. /위키피디아

 

민족이동의 배경은 전쟁이다.

1차 대전 기간에 터키 집권자였던 청년투르크당 지도부는 영국에 붙을 것인지, 독일에 붙을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중립을 지킬 여지는 없었다. 어느쪽이 이기든 터키는 분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터키 지도부는 이기는 쪽에 붙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초전에 상승세에 있던 독일에 붙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패전이었다.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에 의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땅을 갈기갈기 찢어 발랐다.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한 터키 분할도 /위키피디아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한 터키 분할도 /위키피디아

 

소아시아 서해안에 땅을 갈라먹은 그리스는 영국의 부추김을 받았다. 당시 영국의 데이비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총리는 그리스가 소아시아를 공격하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인들 사이엔 고대 그리스 땅이었던 이스탄불과 소아시아를 되찾자는 민족주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 그리스군은 터키 이즈마르에서 앙카라로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제국이 해체될 위기에서 케말 파샤 등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그리스의 침공에 저항했다. 그리스군은 연합군의 지원으로 현대식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터키 영내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완강한 저항에 패전하게 된다.

 

1923년 인구교환 이전의 터키내 그리스인 분포 /위키피디아
1923년 인구교환 이전의 터키내 그리스인 분포 /위키피디아

 

1차 대전과 그리스-터키 전쟁 과정에서 터키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그리스인 대학살이 벌어진다. 물론 터키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군의 터키 공격을 지원했다. 이런 원한관계는 강렬한 민족주의를 낳았고, 여기에 종교적 대립이 더해져 그리스인에 대한 터키인들의 증오가 그리스인에 대한 학살과 방화로 이어졌다.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그리스인들이 죽었는지 통계조차 없다. 19195월부터 192210월까지 수십만명의 그리스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 정부는 그리스인의 본국 귀환을 추진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그리스 총리가 먼저 국제연맹 노르웨이 대표였던 프리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에게 그리스인 송환 계획을 제안했다. 북극 탐험가로도 유명한 난센은 터키 정부에 이를 통보해 양측이 쉽게 타결점을 얻었다.

19231월에 체결된 로잔느 조약에 의해 그리스군은 소아시아와 터키 유럽지역에서 철군하고, 터키에 주둔하던 외국군도 철수했다. 아울러 터키를 독립정부로 인정하되, 터키와 그리스에 거주하는 자국인들을 송환하기로 했다.

 

그리스-터키 민족이동 흐름도 /위키피디아
그리스-터키 민족이동 흐름도 /위키피디아

 

양국으로 이동한 인구는 모두 16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본국으로 건너간 그리스인은 122만명, 터키로 돌아온 이슬람교도는 35~40만명에 달했다.

인구 교환은 인종과 언어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종교를 기준으로 했다. 오랜 세대를 걸쳐 터키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를 잊어버렸고, 인종적으로 구별이 어려웠지만, 그리스정교 신자는 모두 그리스로 갔다. 그리스에 살던 이슬람 교도들도 터키로 돌아왔다.

인구 교환은 강제성을 띠었다. 터키의 그리스인들은 국적이 박탈되고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리스의 터키인도 마찬가지였다. 인도가 독립할 때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이동하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리스인들은 일부는 난민 수용소에 거주했지만, 농촌의 빈 농가주택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터키로 돌아온 이슬람교도들은 그리스인들이 남기고 간 주택에 들어가 살았다.

이 조치로 그리스에서도 터키계 뿐만 아니라 이슬람인, 그리스계, 롬족, 포마크 족, 차머리아 알바니아인, 메글레나 루마니아인 등 무슬림이 추방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이를 소아시아 재앙이라 불렀다.

 

이스탄불의 그리스정교 신도 추이 /위키피디아
이스탄불의 그리스정교 신도 추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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