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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9월 20일~29일, 서울 중구 퇴계로 163 갤러리 브레송
'아르고스의 눈' 展은 현대예술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을까?
2019. 09. 18 by 강낙규

 

현대예술의 가장 큰 덕목은 형식과 내용에서의 낯선 충격이다.

이미 여러 작가들이 거울을 이용한 작업 결과를 보여준 상황에서 <아르고스의 눈>이 형식과 내용의 낯섦이라는 현대예술의 덕목을 충실히 따를 수 있을지 살펴본다.

 

먼저 형식에서의 낯섦을 고찰한다.

거울을 이용한 기존 작가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본래의 대상과 거울에 비친 대상을 단순히 병치시켜 거울에 비친 사물이 본래의 형태로 남아 있다. , 주제인 대상과 부제인 거울에 비친 대상을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제에 중첩시키거나 병렬 배치함으로써 대상 간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남영주는 기존 작가들의 거울 작업과는 전혀 다른 시도를 통해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장의 거울을 겹쳐서거울간의 반사효과를 통하여 현실세계를 마술세계로 변형시킨다. 또한 거울을 겹치는 각도를 미묘하게 조절하여 인간의 자연스러운 시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야를 한 화면에 표현하고 있다. , 현실세계와 거울 속에 비친 마술세계를 동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영주는 여러 거울을 다양한 각도로 겹쳐서 대상들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킨다. 이는 존 로크(J. Locke)가 대표실재론에서 사물의 1차 성질인 형태와 수, 연장 등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거울 작업을 통하여 불변의 성질을 가변적 성질로 바꿈으로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남영주의 거울 작업은 기존 작가들이 보여준 그것과는 현저히 구분되는 새로운 형식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1 과나후아토는 대성당을 두 개로 복제함과 동시에 주제인 대성당을 둥근 벽으로 감싸면서 큐빅에 감금시킨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1 과나후아토는 대성당을 두 개로 복제함과 동시에 주제인 대성당을 둥근 벽으로 감싸면서 큐빅에 감금시킨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2 치첸이사는 경기장의 한 벽을 증식시켜 네 면의 공간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2 치첸이사는 경기장의 한 벽을 증식시켜 네 면의 공간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3 아따까마사막은 주제인 뾰족한 사막언덕과 그 언덕의 중간 부분과 보이지 않는 끝부분을 거울로 끌고 와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3 아따까마사막은 주제인 뾰족한 사막언덕과 그 언덕의 중간 부분과 보이지 않는 끝부분을 거울로 끌고 와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4 갈라파고스는 거울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아이가 바다에서 모래사장으로 나오는 것처럼 동작의 흐름 즉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4 갈라파고스는 거울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아이가 바다에서 모래사장으로 나오는 것처럼 동작의 흐름 즉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5 푼타아레나스는 거울에서 개가 거울 속으로사 들어가는 동시에 반영된 거울에서는 개가 거울 바깥으로 나오고 있으며, 오른쪽 거울에서는 화가가 벽화에 그려진 재규어 외에 또 다른 재규어를 그리고 있는데, 이는 마치 에셔의 작품 '그리는 손'처럼 대상이 공존하며 서로 맞물리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사진5 푼타아레나스는 거울에서 개가 거울 속으로사 들어가는 동시에 반영된 거울에서는 개가 거울 바깥으로 나오고 있으며, 오른쪽 거울에서는 화가가 벽화에 그려진 재규어 외에 또 다른 재규어를 그리고 있는데, 이는 마치 에셔의 작품 '그리는 손'처럼 대상이 공존하며 서로 맞물리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사진출처 : 갤러리브레송

 

 

다음으로 내용에서의 낯섦을 살펴본다.

<아르고스의 눈>은 거울을 통해 다양한 대상을 다양한 시점(아르고스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공간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새로운 내용을 보여준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사진에서의 적용이다.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에서 행복한 마을 마콘도를 문학적 서사를 통하여 창조하였다. 마콘도는 죽음이 없는 세계, 신대륙 아메리카를 상징하고 있다. 마콘도에서는 현실과 가상, 실재와 상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경계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든다. 이성과 합리성이 태고성(太古性)과 마술과 함께 공존하며, 세상을 더 풍성하게 담아낸다. 300년 동안 외국에 수탈당하고, 200년 동안 독재에 시달린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마술을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려고 세상에서 가장 밝고 평화로운 마을 마콘도를 창조했던 것이다. 마르케스뿐 아니라 후안룰포는 <뻬드로 빠라모>에서 꼬말라를,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는 <해변의 집>에서 산타 마리아라는 유토피아를 창조했다. 이들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보여줌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현실 세계에는 현실 세계의 법칙이 있지만 우연과 혼돈이 현실세계에 가끔씩 끼어들어 예측이 틀리곤 한다. 이럴 때 질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바로 운명을 즐기는 것이다(Amor Fati).

보르헤스는 삶이 혼란과 우연 속에 있다고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묻는다. 우연과 혼돈을 살리면서 법칙을 무시하지 않고 새로움을 창조하자는 것이다.

남영주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이런 점에서 동일한 구조다.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의 시선 확장을 위해 마술적 사실주의의 기법을 통하여 외눈박이 키클롭스에서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로 변신하여 현실 세계와 거울이미지를 뒤섞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양쪽 세계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들고 있다,

새로움의 창조는 보편적 진리를 말하기보다 낯선 것과 만나면서 생각을 하게 하는 사유의 촉발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를 비롯한 마술적 사실주의는 공동체의 폭력에 의해 나날이 탈인간화 되어 가는 삶의 모습을 치유하듯이, 남영주 역시 마술적 기법을 통하여 현실의 반영과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일상에서의 도피를 위하여 환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세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엘리베이터 안의 양쪽 거울은 서로를 무한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비추면서 무한성을 보여주는데, 마치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공리와는 달리, 남영주의 거울이미지는 거울을 겹쳐 이미지를 증식시키지만, 평행선과는 달리 서로 만나는 두 선처럼 유한하다는 것이다. 유한성은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신()이 아닌 인간이 지닌 한계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끝으로 뷔르거(Peter Bürger)는 현대예술을 혁명적인 사회변화의 프 로젝트와 결합시키는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남영주는 어떻게 혁명적인 사회변화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가?

바로 거울이미지를 통하여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지식은 힘(Knowledge is power)이라고 했지만 이제 절대반지를 지식으로부터 빼어내서 상상력에 끼워줘야 할 때다. 모든 지식은 네이버나 구글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한때는 상상을 하면 공상을 하는 몽상가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 즉 테크놀러지로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남영주는 거울 작업을 통하여 예술의 진지함과 장난의 경계를 허문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진리가 아니라 놀라움을 추구하는데, 호기심과 경이로움으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영주의 <아르고스의 눈> 은 현대예술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아르고스의 눈>을 호기심과 재미로 즐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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