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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537년 완공, 그리스정교 성당 900년, 이슬람 모스크 500년, 1935년 이후 박물관으로
아야소피아 박물관서 느끼는 역사의 향취
2019. 09. 19 by 김현민 기자

 

터키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본 인상은, 이런 건물이 1,500년의 세월을 버티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 웅장함이며, 멋드러짐, 단층 구조를 이르며 흘러가는 역사의 흔적, 모자이크와 석조건축물 하나하나에 드리워진 스토리가 놀라웠다. 말로만 듣던,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세계문화유산이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 /김현민
아야소피아 박물관 /김현민

 

첫 교회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 착공되어,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때인 360년에 완공된다. 첫 번째 건축물은 404년 대지진으로 거의 파괴되었고, 두 번째 교회가 415년에 완공되었다. 두 번째 건축물도 532년 니카의 반란(Nika Revolt) 때 화재로 소실된다. 이 때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제국만 남아 있을 때였다.

지금 보는 이 건축물은 세 번째 건축물이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즉각 소피아 대성당의 신축을 명했다. 황제는 반란으로 인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성당을 웅대하게 지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는 당시의 사고에 맞추어 지붕은 돔으로 만들고 4각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황제는 또 내부에 기둥을 없애라고도 했다.

이 까다로운 조건의 건축을 담당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밀레투스의 이시도르(Isidore)와 수학자였던 트랄리에스의 안테오미우스(Anthemius)였다.

대성당 건설은 510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55m의 높이 위에 지름 31m의 돔을 올리는 것은 당시 건축기술로는 난제였다. 건축가들은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다양한 공법을 도입했다. 그것은 펜덴티브(pendentive)라고 하는 구조다.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아치로 받치고, 또 네 개의 기둥으로 지탱하는 방식이었다.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로도스 섬에서 진흙 벽돌을 가져왔는데, 그 벽돌은 기공이 많아 당시 일반 벽돌 무게의 12분의1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지었는데도 응력으로 인해 벽에 금이 가 그곳에 창문을 설치했다.

황제의 독촉이 심해 날림공사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53712월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완공된 대성당을 방문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완공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천정 돔 /김현민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천정 돔 /김현민

 

성당의 이름은 성스러운 지혜(Holy Wisdom)라는 뜻의 그리스어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로 지어졌다. 한국인들에게 성 소피아 사원으로 알려진 이 건축물은 그리스정교의 주교회로 활용되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기독교 모자이크 미술품들은 두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 첫 번째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 때에 지워졌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한후 이슬람교도들이 그 위에 회칠을 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샹들리에 /김현민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샹들리에 /김현민

 

성당이 세워진지 900년이 지난 14535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었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Mehmet II)는 함락직후 자신의 부하들에게 3일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에 약탈을 허용했다. 소피아 성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시민들은 소피아 성당으로 도피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길 기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승자의 처분에 맡겨졌고, 성소의 많은 유물들이 약탈되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성 소피아 성당의 웅장함과 수려함에 반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고 외치고, 승리를 기념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렸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부터 성당을 몰수하고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성당과 대주교 자택을 연결하는 통로가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에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브(mihrab)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minaret, 첨탑)이 증축되어 교회 내에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이름도 아야소피아 자미(Ayasofya Cami)로 불리게 되었다. 이 모스크는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때 성당이었던 이 건축물은 1452년부터 1935년까지 약 500년간 모스크로 활용된다. 신은 하나인데 다른 종교가 들어선 것이다.

 

모스크로 활용될 때 만들어진 마흐라브 /위키피디아
모스크로 활용될 때 만들어진 마흐라브 /위키피디아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터키 정부는 1935년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터키 정부는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명하고,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이후 모스크로 사용하던 카펫이 걷어지고 대리석 바닥이 드러났다.

 

1931년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 회벽으로 가려졌던 기독교 모자이크가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벗겨지게 되었다. 그후 터키 정부는 회벽 제거작업을 진행해 1964년까지 모자이크 복원작업을 완료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기독교 모자이크는 성상파괴 운동의 광풍이 지나가고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화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규정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1,000년 세월이 흐흔후 벗겨진 기독교 모자이크는 다음과 같다.

 

설교단 모자이크 /김현민
설교단 모자이크 /김현민

 

설교단 모자이크(Apse Mosaic)

1층 본당의 돔 아래 반원형 아치 위에 그려진 모자이크로,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좌우에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미흐라브 설교단에서 위를 바라보면 황금의 배경에 둘러싸안 아름다운 성상이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5세기에 그려졌다가 성상 파괴운동으로 제거된 것을 9세기에 다시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모자이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데이시스(Deësis), 심판의 날 모자이크 /김현민
데이시스(Deësis), 심판의 날 모자이크 /김현민

 

데이시스(Deësis), 심판의 날 모자이크

2층 회랑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가면 대리석으로 된 천국의 문이 나오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예수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세례 요한이,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심판의 날을 맞은 인류를 위해 세례 요한과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내용이다. 미카일 8세가 4차 십자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1261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는 파괴된 제국을 재건하고 성당을 대대적으로 복구하면서 이 성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빛이 유난히 눈에 띤다. 전체의 3분의2가 유실되었지만, 남은 부분으로도 아름답고 섬세한 모자이크로 아야소피아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콤네누스(Comnenus) 황제 모자이크 /김현민
콤네누스(Comnenus) 황제 모자이크 /김현민

 

콤네누스(Comnenus) 황제 모자이크

2층 회랑 끝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동로마황제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John II Comnenus, 재위 1118~1143)와 황후 이레네(Irene), 아들 알렉시우스(Alexius)가 있는 모자이크다. 마리아가 황자 알렉시우스를 안고 있다. 1122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후 조에 모자이크 /김현민
황후 조에 모자이크 /김현민

 

황후 조에 모자이크

2층 남쪽 회랑에 예루를 중심으로 조에 황후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가 세겨진 11세기 작품이다. 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인 조에는 황녀로 그녀의 남편 3명이 동로마제국 황제가 되었고, 자신도 여제에 오르기도 했다.

 

남서문쪽 모자이크 /김현민
남서문쪽 모자이크 /김현민

 

남서문쪽 모자이크

1층 본당 출구 쪽에 있는 모자이크다.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좌우에 황제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10세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왼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다. 두 황제가 대성당을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게 봉헌하고 있다. 나가는 길 뒤편에 있어, 모자이크를 잊지 않고 가도록 양쪽에 거울을 설치해 놓았다.

 

제국의 문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제국의 문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제국의 문모자이크

1층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제국의 문위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 가브리엘 천사가 있고, 예수 앞에 레오 6세가 업드려 있는 모자이크가 있다. 9세기에 만들어졌다.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6세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레오는 사랑했던 연인 조에 자우치나와 결혼하지 못하고 외가 쪽의 못생긴 테오파노와 강제로 결혼했고, 사별후 조에 자우치나와 결혼했지만 출산후 그녀도 죽었다.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제위를 얻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는 아들을 낳아준 또다른 연인 조에 카르보노프시나와 결혼을 하려 했지만, 교회가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를 설득해 네 번째 결혼을 하고 아들에게 황태자 지위를 부여한다. 이 모자이크는 네 번 결혼을 하면서 제위를 물려줄 아들을 낳으려 해던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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