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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 독립한 라구사 공화국, 나폴레옹에 멸망…‘아드리아해의 진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한때 독립국
2019. 10. 13 by 김현민 기자

 

동유럽국가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이 달마티아 해안이다. 그곳에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Dubrovnik)라는 해안도시가 있다.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가장 남쪽 끝에 있다. 경치가 아름다워 동유럽을 관광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코스다.

두브로브니크는 본토와 단절되어 있다. 그렇다고 섬은 아니다. 달마티아 해변에 연해 있지만, 그 중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자르고 들어와 좁고도 유일한 해변을 확보하고 있다.

인구는 5만명, 크로아티아인이 전체의 90% 가까이를 차지한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구도시 전경 /위키피디아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구도시 전경 /위키피디아

 

이 곳은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해 450년간 라구사 공화국(Republic of Ragusa)이라는 소국이 존재했던 곳이다. 구시가에는 라구사 공화국 당시의 성벽(Stari Grad)이 잘 보존되어 있고, 1979UNESCO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름다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교회, 수도원, 궁전 등도 잘 보존되어 있다.

 

중세의 요새 /위키피디아
중세의 요새 /위키피디아

 

두브로브니크의 역사를 알면서 관광을 하면 관광의 재미를 더할수 있다.

라구사는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때인 7세기초,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 의해 로마의 도시 에피다우름이 파괴되자, 그 도시의 생존자들을 모아 해안가에 건설한 도시다. 설했으니, 라구사는 처음부터 정통 로마교회를 고수했다.

이 도시의 주인은 숱하게 바뀌었다. 비잔틴제국이 약화되면서 이슬람의 사라센 제국의 해적들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다.

라구사는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는 금·은의 수출항으로 번영했다. 십자군 전쟁 뒤 이탈리아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점령 하에 있다가(1205~1358)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도시가 요새화되고 지협의 각 측에 2개의 항구가 세워졌다.

1358년 라구사의 귀족들은 헝가리 왕국의 통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자치 공화국을 수립했다.

영토는 달마티아 해변과 섬으로 구성되었으며, 면적은 1,500으로 서울시의 3배쯤 된다.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세의 베네치아, 제노바와 같은 도시국가였다. 잘 나갈 때 300척 이상의 선단을 보유했다고 한다.

 

1667년 지진 이전의 모습(그림) /위키피디아
1667년 지진 이전의 모습(그림) /위키피디아

 

이 도시국가가 번성한 것은 오스만 투르크 덕분이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헝가리 제국을 밀어내고 일대를 장악하자, 라구사는 오스만에 조공을 주는 댓가로 독립을 인정받는다. 대신에 흑해에 대한 무역권을 갖고, 오스만투르크의 어떤 항구에서 경쟁도시보다 낮은 관세율을 적용하는 특혜조항을 얻어낸다.

라구사의 귀족들은 원로원을 구성하고, 통령(Rector)을 뽑아 통치하는 일종의 귀족정 체제였다.

라구사의 교역조건은 경쟁도시 베네치아보다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의 기독교권과 오스만투르크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에서 베네치아와 경쟁했다. 15~16세기가 라구사의 최전성기였다.

지중해 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린 라구사는 귀족과 평민의 양대계급의 엄격한 계급 사회를 유지했다. 두 계급사이에 결혼도 금지되었고, 귀족들이 의회를 구성해 지도자(통령)을 뽑는 공화정을 구성했다. 1416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 매매제를 폐지하는 등 높은 의식을 가진 도시였다. 1667년 큰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와 붙어 베네치아와 경쟁하다 보니, 기독교 국가들의 미움을 샀다. 정통 로마교회를 믿는 나라에서 이슬람과의 교전에 함대를 보내지 않았고,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투르크가 스페인 연합함대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교역대상국가가 줄어들었다.

1684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가 동유럽에서 오스만투르크를 밀어내고 아드리아해안을 장악하자 라구사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4세기 이상 독립을 유지해 온 라구사 공화국의 운명은 나폴레옹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 유럽 제패를 꿈꾼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이 라구사 공화국을 그냥두지 않았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달마티아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하고, 라구사에 군대를 주둔시켜 독립국가를 해체했다.

18081014일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라구사를 점령해 나라를 없애고 프랑스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로써 1358년부터 자치령으로 시작해 독자적인 해상국가를 형성해온 라구사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만다.

라구사 공화국의 모토는 자유는 금으로도 살수 없다는 것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이념을 가진 도시국가였다. 당대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유대인을 추방했지만, 라구사는 쫓겨온 유대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오스만과 기독교 연합군이 격돌한 코소보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세르비아 왕족도 받아들였다. 이에 오스만투르크가 반발하자, 라구사는 당신들이 도망쳤어도 받아 줬다고 대응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무력으로 라구사의 자유를 짓밟은 것이다. 그후 세력권 재편에 따라 강대국은 라구사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에게 나라를 잃을때 인구는 3만명이었다.

 

두브로브니크의 성곽 모습 /위키피디아
두브로브니크의 성곽 모습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이 패망하고 1815년 빈 의회 결의안에 의해 라구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되었다가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9110,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총 공격을 해 도시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그때 유럽의 많은 학자들이 이 곳으로 달려와 두브로브니크의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인간방패를 서 주었기에 도시가 폐허를 면했다. 그후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에 속해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위치 /위키피디아
두브로브니크의 위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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