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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의 외침에 멕시코 민중 자각…왕당파 이투르비데, 반군과 연합해 독립
멕시코 독립…왕당파와 인디오 반군의 합세
2019. 12. 19 by 김현민 기자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 주에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라는 인구 15만의 작은 도시에서 멕시코 독립의 역사가 시작된다. 1810916일 새벽 2시반께, 로마 카톨릭의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신부가 성당의 종을 울리고 그 유명한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지금 하나님의 율법이 내려왔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신들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까. 가증스러운 스페인인들에게 수백년간 빼앗긴 토지를 되찾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진정한 애국자로서 당신의 종교와 권리를 수호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연설 내용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즉흥연설이었고, 후에 전해진 연설문은 재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연설에서 이달고 신부는 페르디난도 7세 만세, 스페인인은 물러가라면서 모순된 발언을 했다. 아직까지 그의 사상에는 독립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멕시코는 이달고의 유명한 톨로레스의 외침’(Cry of Dolores)이 있던 916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청중은 스페인에 억압당하는 인디오들과 혼혈인 메스티조들이었다. 그들은 그 즉시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군에 저항했다. 앞서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이 스페인을 침공해 페르난도 7세가 퇴위하고, 식민지에 권력 공백이 생겼다.

미겔 이달고 신부 /위키피디아
미겔 이달고 신부 /위키피디아

 

이달고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 백인(크리올로)이었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스페인에서 건너온 페닌슈렐레스,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크레올로, 혼혈인 메스티조, 원주민인 인디오의 4계급이 있었다. 이달고는 사제로서 농민과 노동자 층의 생활개선을 위해 힘을 기울였고, 인디오의 말을 배워 농민들의 어려운 삶을 통감했다. 그는 동료 크리올들과 함께 인디오와 메스티조의 농민에게 그들을 수탈하는 페닌슈랄레스 지주와 귀족들에게 봉기하자는 계획을 꾸몄다.

당초 봉기 거사일은 1810101일이었다. 그와 행동을 함께 하는 대원들은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고 있던 중, 913일에 동료들 중 한사람이 배반해 지방정부에 반란계획을 밀고했다. 스페인 당국은 반란자들의 아지트 수색과 체포를 명령하자, 이달고는 동료들과 함께 몸을 숨긴 후 거사를 앞당겼다.

이달고의 연설에 감명한 민중들은 열광했다. 인디오와 농민들은 바로 행동에 들어 갔다. 성난 민중은 당시 최대 광산촌이던 과나후아토를 향해 행진했다. 도중에 많은 농민과 메스티조가 참가해 그 수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이달고는 농민에 대한 인두세 폐지와 노예제 폐지,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반환 등을 요구했다. 행진을 하는 도중에 반란군은 스페인 관리와 부자들을 사살하고 약탈했다. 이달고가 이끄는 독립군은 과나후아토에서 멕시코시티로 진군했다.

그들은 라쿠카라차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 아름다운 그 얼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희한하다 그 모습

라쿠카라차(la cu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이다. 원래는 스페인 민요였는데, 멕시코 민중들이 스스로를 바퀴벌레로 비유하고, 독립운동가로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달고의 독립군은 1030일 누에바 스페인의 수도 멕시코 시티를 지척에 식민군의 방어에 직면한다. 이달고의 무리들은 막대한 희생을 낸채 수도 공략에 실패한다. 그들은 북쪽의 텍사스로 향했다가 이듬 해 다시 수도를 목표로 진군을 개시했지만, 18113월에 스페인군에 대패한다. 다수가 포로가 되었고, 이달고는 미국으로 달아났지만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되었다.

 

이달고는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누에바 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반란이 이어졌다.

1812년 메스티조였던 카톨릭 사제인 호세 마리아 테클로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가 멕시코 남부에서 봉기해 남부일대를 지배하고 1813년에는 아카풀코의 주요도시를 차례로 함락했다. 이달고의 운동은 농민운동 성격이 강했지만, 모렐로스는 농민운동 이념을 발전시켜 멕시코 독립과 공화국 건설을 내세웠다. 모렐로스 군은 잘 훈련되었고, 규율이 엄정한 소수의 편성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남부의 대부분을 지배한 모렐로스는 1813년에 각지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개최해 독립을 선언했다.

1814년 프랑스군이 패퇴하고 스페인 왕정이 복귀하면서 스페인군이 공세로 나와 반란군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모렐로스의 군은 패주했고, 모렐로스도 1815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모렐로스의 처형 후 산발적인 게릴라전은 지속되었다. 모렐로스의 부하였던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와 비센테 게레로(Vicente Guerrero)가 게릴라 투쟁의 선두를 보였지만, 1820년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도 둔화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남미에서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가 독립하는 와중에서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은 멕시코 대부분을 장악하며 페루와 함께 왕당파의 거점으로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1820년 스페인에서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라파엘 델 리에고(Rafael del Riego) 대령이 이끄는 쿠데타가 발생해 페르난도 7세를 압박해 1812년에 제정된 입헌국주국 헌법 부활시켰다. 스페인 국왕체제를 지지하는 멕시코의 왕당파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정부를 반대하고 의회에서 내려오는 지침을 거부했다.

그해 누에바 스페인의 부왕은 반란군에 대한 최후 작전을 개시하면서 토벌대장에 크리올로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를 임명한다. 이투르비데도 크리올로로 이달고와 모렐로스군의 반란세력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거둔 철저한 왕당파 인물이었다.

 

이투르비데(왼쪽)가 게레로를 만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이투르비데(왼쪽)가 게레로를 만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이테르비데는 멕시코에서 스페인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거꾸로 독립운동 세력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게릴라 대장인 비센테 게레로와 협상을 벌인다. 그는 독립파 게릴라들에게 이구일라 계획(Plan of Iguala)을 제시했다. 그가 1821224일 이구일라라는 마을에 주둔하면서 세운 이 계획은 멕시코를 독립하되, 스페인 왕실을 군주로 모신다 페닌슈랄레스와 크리올로, 메스티조, 인디오등 모든 계급은 평등한 권리와 특권을 지닌다 카톨릭 교회는 멕시코에 대한 특권과 종교적 독점을 보증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투르비데는 이구일라 계획을 토대로 게릴라 부대와 협상을 벌였다. 게레로는 이투르비데의 계획을 받아들여 타협했다. 이투르비데는 각지의 게릴라 반란군을 흡수해 멕시코 독립을 추진한다.

이 타협안은 모든 계층의 지지를 얻었다. 백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잃지 않게 되었고, 메스티조와 인디오는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고, 카톨릭도 권리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멕시코 국왕을 누구로 하느냐였다. 우선 퇴위 위기에 처한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를 멕시코 국왕으로 모시되, 국왕이 거절하면 그의 동생인 돈 카를로스(Don Carlos)를 모셔오고, 그도 거절하면 유럽의 왕실에서 국왕을 고른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섭정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이투르비데의 계획에 대해 스페인 국왕 페리디드난도 7세와 본국 의회는 거부의사를 보였다. 스페인은 후앙 오도노후(Juan O'Donojú)를 새 부왕으로 파견해 이투르비데와 협상하도록 했다. 신임 부왕도 이투르비데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1821824일 이투르비데와 신임 누에바 스페인 부왕 사이에서 이구알라 강령을 확인하는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이 체결되어 멕시코의 독립이 결정된다. 이 조약에 의해 신임 부왕 오도노후가 섭정위원회의 1순위가 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투르비데의 멕시코 시티 입성 /위키피디아
이투르비데의 멕시코 시티 입성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 무렵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7세는 자유주의자를 누르고 다시 권력을 장악하면서 입장이 바뀌게 된다. 국왕은 멕시코를 독립시키기보다 스페인의 지배하에 두길 원했다. 스페인은 대규모 군대를 조직해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운동세력을 진압한다는 계획으로 전환하게 된다. 국왕의 방향 전환에 그의 동생이나 다른 어느 귀족도 멕시코 국왕이 되길 자처하는 자가 나서지 않게 되었다.

이투르비데는 무력시위를 벌이며 멕시코시티를 포위하고 스페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스페인군은 멕시코 동부 해안으로 빠져 나가 철수하게 된다. 이투르비데는 군사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스스로 참여했다. 이때 섭정위원회 1인자로 내정된 오도노후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투르비데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죽음은 아직도 미궁이다.

18225월 멕시코 시티에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다. 군중들은 이테르비대를 황제로!”라는 구호를 열창했다. 멕시코 섭정위원회는 이투르비데를 멕시코 국왕으로 선출하고, 제헌의회를 구성,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1822519일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Agustín I)로 칭하면서 황제에 오르고,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하지만 그는 재위 1년을 넘기지 못한채 퇴위해야 했다.

 

아구스틴 1세 /위키피디아
아구스틴 1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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