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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으면 거부한다”…태평천국의 난 진압, 수단에서 사망…중국 서태후 존경
서태후가 존경한 찰스 고든, 인간적 제국주의자였나
2020. 02. 01 by 김현민 기자

 

중국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0~1864)에 청나라의 편에 서서 반란을 진압한 영국 군인이 있다. 바로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이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치욕을 겪은 청 황실이었지만, 이 영국인의 혁혁한 공에 극찬을 보냈다.

그는 청 황실의 실권자였던 서태후(西太后)와 영국 국왕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군인이었다. 또한 청말 지도자인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의 존경과 영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의 전설적인 전투 이력은 19세기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고든은 1833년 런던 울위치(Woolwich)라는 곳에서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문의 뿌리는 스코틀랜드다. 고든 가문은 그에 앞서 4대째 아들들을 영국군에 복무시켰고, 5대째인 그와 형제들도 모두 영국 육군에 입대했다.

고든은 육사 생도 시절엔 말썽꾸러기였다. 상관의 부당한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고, 부당한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 정학을 받아 정상보다 2년 늦게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장교가 된 후 고든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이며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반골기질은 장교 때에도 드러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국내에서 근무하다가 러시아 영토에서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1855년 러시아로 파병된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을 같이할 전우들을 사귀었다. 크림 전쟁에서도 전과를 올려 훈장을 받았고, 전쟁이 끝나고 루마니아 다뉴브강 하구의 영국군 주둔지로 발령이 났다.

 

찰스 고든 /위키피디아
찰스 고든 /위키피디아

 

그의 명성은 중국에서 시작된다. 다뉴브 강에서의 주둔지 생활에 실증을 느낀 고든은 1860년 중국 파병부대를 지원했다. 그의 첫 도착지는 홍콩이다. 그곳에서 그는 태평천국의 난 소식을 들었고, 처음엔 예수의 동생임을 자처한 반란수괴 훙수전(洪秀全)에 동정심을 느꼈다. 하지만 상하이로 근무지를 바꿔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반란군들이 농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가 청 황실의 여름궁전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울 때 고든은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707년 강희제가 건설한 이 궁궐은 유럽풍 뿐 아니라, 몽골, 티펫 스타일의 다양한 건축양식을 차용해 그 화려함이 해외에까지도 알려져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원명원에 침입해 고급 물자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여기서도 고든의 반골 기질이 드러났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청나라 왕족인 공친왕에게 동료들의 탐욕스런 약탈 행위와 가져가지 못할 것을 일부러 파괴하는 행태가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누이에게 쓴 편지에서 원명원 약탈에 대해 야만적(vandal-like) 행위이며,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이 무렵 태평천국의 농민군이 남부지역을 휩쓸었다. 외국군의 침공과 내란으로 청나라의 재정은 거덜났다. 양방(楊坊)이라는 상하이 거상이 나섰다. 상하이 상인들은 자금을 갹출해 민병대를 조직했다. 민병대는 중국인을 주축으로 하되, 외국인 용병들도 참여시켰다. 서양의 신식 무기와 전술로 농민군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이 민병대의 이름이 상승군(常勝軍), 영어로 ‘Ever Victorious Army’, “싸워서 항상 이기는 군대라는 뜻이다. 이 군대는 이름 그대로 항상 이기지는 못했다. 초대 지휘관을 맡은 미국인 프레드릭 워드(Frederick T. Ward)는 전투에서 사망했고, 수뇌부는 또다른 미국인을 지휘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새 지명자는 고집스러운데다 알콜중독자로 신망을 잃었다. 그러자 영국군이 이탈하려 했고, 이홍장이 영국군 장교였던 고든에게 지휘관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고든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상승군 지휘를 맡아 차분히 전투를 준비했다. ‘패하지 않는 부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완벽한 준비가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군대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베이징의 서태후는 조바심이 나 빨리 출전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던중 그의 부하 한 장교가 상승군과 청나라 관군 5,000명을 이끌고 상해부근 태단성의 반란군을 공격하다가 참패를 당했다. 서태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고든에게 밀사를 보내 상승군과 청의 관군을 통수권을 이양받아 패배를 보복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는 사실상 청나라 여제(女帝)였던 서태후의 명령도 불복했다. 그는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고 공격하는 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그는 시간을 가지고 군사를 훈련하고 병력을 충원했다. 고든은 음주를 한 병사을 사형시키는 등 엄격한 규율을 도입했다.

1863530일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고든은 중무장한 대포를 동원해 반란군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금산(金山)을 공격해 무너뜨렸다. 그는 등나무 막대기를 위압적으로 휘두르며 선봉에 서서 부하들을 이끌고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1865년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을 함락시킴으로써 잔인하고 참혹한 15년의 내란이 끝났다. 내란에서 죽은 사람이 2천만~3천만에 이르고, 난징 함락시 10만명이 죽었다.

서태후는 고든에게 은 1만냥을 하사하라고 명령했다. 황실의 전달자들이 바구니 가득 은덩이를 이고 찾아갔을 때 고든은 그 선물을 거절했다. 전달자들이 우물쭈물하며 물러가지 않자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그들을 쫓아냈다. 고든은 황실 선물을 거절한 이유를 황제(동치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장 고든은 분에 넘치는 황제 폐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주시(蘇州市) 탈환후 발생한 불미한 일로 황제 폐하의 표창을 받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간청하옵건데 성은을 베푸시어 저로 하여금 폐하의 하사품을 받지 않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서태후는 그의 편지를 두 번이나 읽고 서양 야만인들 중에도 비야만적이고 너그러우며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고든이 황제의 선물을 거절한 이유로 든 소주 사건은 이렇다. 이홍장이 소주를 탈환하고 승리감에 도취해 반란군 지휘관을 모조리 처형해 버렸다. 하지만 고든은 앞서 반란군에게 항복할 경우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고든은 이 약속이 이홍장에 의해 무참히 파기되었음을 알게 된후 크게 격분했고, 이홍장에게 내가 살아 있는한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홍장은 하얗게 질려 힌동안 자신의 집에 피신했다고 한다.

고든은 청 조정으로부터 제독(提督)이라는 관직과 황족이 입는 노란 관복을 수여받았다. 그의 중국명은 과등(戈登)’이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그가 태평천국의 난 전투 중에 모은 문서를 수록한 과등문서(戈登文書)’가 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의 그의 활약상은 당대 영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차이니즈 고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상하이 상인들도 고든에게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내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가난했던 그대로 중국을 떠나겠다고 말하며 영국으로 돌아왔다.

 

찰스 고든의 중국 복식과 이집트 복식 /위키피디아
찰스 고든의 중국 복식과 이집트 복식 /위키피디아

 

영국에 돌아온 그는 템즈강변 요새에 근무하며 사회적 활동을 병행했다. 인도 총독이 비서로 와달라고 해서 가기도 했으나 문서 작업에 실증을 내고 이내 그만두었다.

전쟁터에 살던 그가 그렇게 몇 년을 무료하게 지내던 중 1871년 그는 아프리카 수단에 파병된 영국 부대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이때부터 그의 아프리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반인륜적 노예 매매에 반대해 수단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18841, 영국의 글래드스턴 내각은 그를 다시 수단으로 파견했다. 카이로에 도착하자 그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수단의 수도 카르툼(Khartoum)은 그 무렵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마디(사람들이 기다려온 자)' 마호메드 아메드가 이끄는 반군의 위협받는 곳이었다.

고든은 영국 여성과 어린이를 대피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고든은 2,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나일 강 하류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이내 카르툼은 마디의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영국 정부는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카르툼을 지키기로 했다. 고든은 런던의 지시를 거부하고 카르툼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카르툼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로 전환하고 중앙 망루에서 스스로 망을 보기도 했다.

여론의 재촉에 못 이겨 영국 정부는 곤경에 처한 고든을 돕기 위해 구호 원정대를 조직해 파견했다. 원정대는 사막을 가로질러 돌진했지만 간발의 차로 늦고 말았다. 고든의 부대는 320일 이상 포위망을 지켜냈지만, 원정대가 도착하기 이틀전에 고든의 부하인 이집트 장교 하나가 성벽을 열어 마디파 반군의 진입을 허용한 것이다. 고든은 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즉사했고, 그의 머리는 잘려 효수되었다.

 

찰스 고든이 1885년 수단 카르툼에서 이슬람 반군에 살해되는 모습 /위키피디아
찰스 고든이 1885년 수단 카르툼에서 이슬람 반군에 살해되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분노하여 원정대를 조직하는 데 꾸물거렸다고 글래드스턴 총리를 책망했다.

고든은 사후에 명성을 얻어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동상은 런던 트라팔가 광장과 그가 주둔했던 그레이브센드, 호주 멜버른, 수단 카르툼 등지에 세워져 있다.

 

영국 그레이브센드의 찰스 고든 상 /위키피디아
영국 그레이브센드의 찰스 고든 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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