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한국사
황제에 바쳤던 반어피…조공 문제로 신라와 갈등, 이사부 정벌후 조공 관계 회복
사라진 고대왕국 우산국①…가지어의 고장
2019. 05. 11 by 김현민기자

 

우산국(于山國)은 울릉도에 있던 섬나라였다. 이 섬나라는 지증왕 13(512)에 신라에서 파견한 이사부(異斯夫) 장군에 의해 항복하며 신라의 지배체제에 들어 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었듯이 지세가 험하고 바닷길이 험난해 독립왕국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되, 신라와의 조공관계로 묵어 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신라의 정벌 목적은 조공 관계 회복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산국은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며 조공을 바쳤는데, 지세를 믿고 신라에 항거했다. 이에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정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기록을 뜯어보면, 이사부의 정벌 이전에 신라는 언젠가부터 울릉도를 조공국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시점이 언제일까. 아마도 파사 23(102) 실직국의 항복을 받아 내지화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신라는 포항에서 삼척까지 동해안을 제패했고, 동해 한가운데 섬으로부터 조공관계를 맺었다고 볼수 있다.

 

울릉도로 추정되는 섬의 존재는 중국인 진수(陳壽, 233~297)가 저술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온다. 3세기말에 중국인들이 울릉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관구검(毌丘儉, 의 유주자사)이 부하 왕기(王頎) 장군에게 부대를 나누어 주고, 고구려 임금(동천왕)을 쫓아 옥저로 파견했다. 왕기가 옥저의 동해안에 이르러 현지 노인들에게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인(耆老)이 말하기를,

국인(옥저인)이 일찍이 배 타고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수십 일 만에 동쪽으로 바다 위에 한 섬을 보았다. 뭍에 올라가 보니 사람이 살고는 있는데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았고, 그 풍속은 항시 7월이면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바쳤다고 말했다. 그 노인은 이어 바다 한가운데 나라가 하나 있는데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바다에 떠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양 소매 길이가 3장이었다고 했다. 부서진 배 하나가 파도에 밀려와 해안에 닿았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살아는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았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고 했다. 그 곳은 모두 모두 옥저 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동이전의 기록은 옥저 노인의 말을 왕기가 듣고, 그 말이 몇차례 건너 저자 진수(陳壽)에게 전해졌으므로, 사실과 다른 측면도 있을 것이다. ‘남자가 없고 여자만 사는 나라’, ‘얼굴이 둘인 사람은 실제 상황이 아니고 전설이 와전된 것 같다. 하지만 동해바다 한가운데 나라가 있었다고 전해 우산국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혹여 일본일수도 있다. 옥저는 함경도 해안에 형성된 고대 부족국가다. 고려시대에 함경도 여진족들이 울릉도를 침공한 사실로 비추어 고대에도 동해를 가로 질러 울릉도와 왜()로 오가는 해상항로가 있었을 것이다.

 

일본 오사카시립 천왕사(天王寺)동물원에 보존된 일본강치 /위키피디아
일본 오사카시립 천왕사(天王寺)동물원에 보존된 일본강치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우산국이 신라에 보낸 조공품은 무엇일까.

삼국지 동이전에는 예국(濊國) 바다에는 반어피(班魚皮)가 있어 한나라 환제(桓帝) 때 이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예국은 강원도 동해안에 형성된 고대 부족국가이며, 반어피는 바다사자 가죽이다.

동이전에 옥저 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 섬나라를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강릉의 예국이 울릉도에서 반어피를 구해 중국 황제에게 헌상한 것이다. 3세기 이전에 강릉에서 울릉도까지 뱃길이 열려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도 당()나라에 우산국의 특산품인 해표피를 조공품으로 보냈다. 우산국을 복속시킨 이후 신라는 울릉도 특산물을 구해 중국 황제에게 바친 것이다.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울릉도에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사서에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울릉도에 이상한 과일 종자와 나뭇잎이 있고, 땅이 비옥하고 진귀한 나무들과 해산물이 많이 산출했다고 했다.

조선 정조 때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의 장계에서 월송 만호 한창국이 그 섬의 산물인 가지어피(可支魚皮) 2, 황죽 3개 등의 토산물을 가져오고, 지도 한 장을 그려왔다고 보고했다. 가지어에 대해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동해 가운데 있는 울릉도에는 산물로 가지어가 있다고 소개하고, “바위틈에 서식하며 비늘은 없고 꼬리가 있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다리가 넷이 있는데, 뒷다리는 아주 짧으며,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어린 아이와 같으며,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한다고 기록했다.

가지어는 강치라고도 하며, 흔히 물개 또는 바다사자, 바다표범(海豹)이라고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