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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소련 70년⑪…폴란드에선 타협, 헝가리는 무력 진압, 중국과는 이념 분쟁
흐루쇼프 해빙에 폴란드-헝가리 자유화 바람
2021. 04. 14 by 김현민 기자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비에루트(Bolesław Bierut) 통합노동당 서기장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2차 대전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공산화에 앞장선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19562월 그는 당지도부와 함께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쓰러져 귀국도 하지 못한채 3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민족성이 강한 나라였다. 폴란드인들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내용을 접하고 자유화와 민족의 독자성을 추구할 것을 기대했다.

발단은 빵에서 시작되었다. 1956628일 폴란드의 산업도시 포즈난(Poznan)에서 노동자 10만여명이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빵을 달라는 피킷을 들었다.

폴란드인들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스탈린은 폴란드인을 싫어했고, 대숙청 때 소련내 폴란드인들을 집중적으로 제거했다. 전후 폴란드를 장악한 공산당(통합노동당)2차 대전 때에 영미 연합군에 배속되어 서부전선에서 싸운 병사들을 제국주의 앞잡이라며 박해했다. 이런 불만이 잠재해 있는 가운데 폴란드인들은 흐루쇼프의 연설에다 자국 강경파 리더가 죽었다는 소식에 반소비에트 기치를 내걸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다.

 

1956년 폴란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는 피킷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56년 폴란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는 피킷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폴란드 인민공화국 정부는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노동자 시위를 장갑차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어린 여자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시위는 걷잡을수 없이 격화되었고, 요구사항도 경제이슈에서 정치이슈로 전환되었다. 반정부단체는 탈소비에트와 다당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탄압으로 시위를 진정시킬수 없다고 판단하고 타협책을 모색했다. 집권자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를 제1서기로 내세우고, 시위대와 소련 사이를 중재했다. 고무우카는 폴란드가 소비에트 진영에 잔유할 것을 약속하고 소련을 안심시키면서 반정부 조직에는 개방을 약속했다.

고무우카 정권은 소련의 흐루쇼프 해빙과 유사한 개방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고무우카 개혁은 무마책에 불과했다. 언론 검열은 여전했고, 다당제 요구는 무시되었다.

 

폴란드에서의 자유화바람이 서유럽에서 쏜 단파방송을 타고 헝가리에 전해졌다.

헝가리는 2차 대전때 독일의 주축국에 가담했기 때문에 전후 소련군에 점령되어 공산화되었다. 공산화 10년간 헝가리 국민들은 독재와 가난에 시달렸다. 공산정부의 수뇌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작은 스탈린이라 불리며 반대파 수천명을 숙청하고, 산업시설을 국유화하고 집단농장을 실시했다.

 

1956년 부다페스트 시내에 스탈린 동상이 무너진 자리에 헝가리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1956년 부다페스트 시내에 스탈린 동상이 무너진 자리에 헝가리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헝가리인들은 폴란드 시위에 고무되었다. 헝가리의 시위는 폴란드에서보다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561023일 오후, 2만여명의 시위대가 부다페스트 시내에 모여 국가를 부르며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노래를 함께 부르며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시위대는 9m 높이의 스탈린 동상을 철거하고 동상의 머리를 부수어 거리에 끌고 다녔다. 그날 저녁 당 제1서기장 게뢰 에르뇌는 시위대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러자 시민들은 그 방송을 내보낸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 가스와 기관총을 쏘아대면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분노하면서 본격적인 혁명운동이 시작된다. 시민들은 보안군 대원들을 죽였고,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했다.

1024, 헝가리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해 시민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가담하면서 봉기가 격화했다.

저널리스트 오베르소프스키는 이가샤그(진실)’라는 일간지를 발행해 봉기를 촉구했다. (그는 혁명 실패후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가 밤이 깊어 처형이 연기됐는데, 그날 소련의 흐루시쵸프 서기장이 봉기 관련자의 사형에 항의하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서한을 읽고 적당히 처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025,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 주요 도시로 번졌다. 다음날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고,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으로 도망가고, 개혁주의자 임레 너지(Imre Nagy)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1028일부터 114일까지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다. 임레 너지의 신정부는 일당제 폐지,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군 요구를 골자로 한 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1956년 10월 25일 부다페스트 시위 /위키피디아
1956년 10월 25일 부다페스트 시위 /위키피디아

 

이 조치는 흐루쇼프를 자극했다. 그는 헝가리가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를 탈퇴하면 동유럽의 소비에트 전체가 흔들릴 것을 걱정했다. 소련 수뇌부는 헝가리 시위대를 진압하기로 결의했다.

114, 이반 코네프 휘하의 대규모의 소련군을 헝가리에 투입한다. 오전 3시에 부다페스트 방면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었고, 뒤이어 소련군 탱크부대 1,000여대가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시내로 진입했다. 동원된 소련군 병력은 3만여명이 넘었다. 소련군 전차와 대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성이 부다페스트 전역을 뒤덮었다. 오전 520분에는 너지가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유 헝가리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헝가리와 전 세계에 알렸다.

부다페스트 시민군은 화염병을 투척하며 격렬히 저항했지만, 1주일만에 소련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되었다. 이날부터 진압이 완료된 10일까지 2,500~3,000명의 사망자, 13,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국과 서유럽은 수에즈 사태에 매몰되는 바람에 헝가리의 봉기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한편 임레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대사관을 잠시 나오던 중에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압송되고 1958616일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당시 혁명에 참여했다가 처형된 헝가리인이 350명을 넘었다고 한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흐루쇼프와 마오쩌둥(1958) /위키피디아
흐루쇼프와 마오쩌둥(1958) /위키피디아

 

흐루쇼프의 해빙은 중국 공산당과 마찰을 빚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소련의 군사적-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소련은 국가수입의 7%를 중국 공산당 지원에 썼다.

흐루쇼프는 1954년 베이징을 방문하고, 그때까지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뤼순(旅顺, Port Arthur)과 다롄(大連)을 돌려줬다. 마오쩌둥은 영토를 반환받고 소련군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흐루쇼프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흐루쇼프는 중국이 제3세계에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도 소련의 주도권을 뺏는 것으로 보고 경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알려지면서 중국공산당은 노골적으로 흐루쇼프의 해빙조치를 비난했다. 중국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했고,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교조주의라고 대응했다. 공산권의 두 대국이 본격적으로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소련 지도부에 흐루쇼프의 해빙조치와 평화공존론에 반대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흐루쇼프가 실수하길 기다렸다. 마침내 흐루쇼프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에서 미국에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게 된다. 흐루쇼프의 반대세력들은 그를 제거할 명분을 찾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Bolesław Bierut

Wikipedia, Poznań protests of 1956

Wikipedia, Hungarian Revolution of 1956

Wikipedia, Nikita Khrushch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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