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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의 전략과 전술…삼국통일에 앞서 신라의 토대를 형성한 장군
신라 異斯夫 장군, 머리로 승리한 智將이었다
2021. 07. 02 by 박차영 기자

 

이사부에 대한 사료가 극히 제한적이다.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것도 몇줄 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 사서인 <일본서기>에도 그가 언급되지만, 미흡하다. <단양 적성비>에 그의 이름 한 단어가 나온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사부에 관한 스토리가 나오지만, 정통 국사학자들은 그 서책이 위서라며 정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다.

 

이사부 연표 /박차영
이사부 연표 /박차영

 

희박한 자료 속에서도 이사부의 위대함은 드러난다.

지증왕 초 (500~505) 가야 공략

지증왕 6(505), 실직(悉直) 군주 부임

지증왕 13(512) 우산국(于山國) 정복, 하슬라(何瑟羅) 군주 부임

법흥왕 16(529) 금관가야 정벌

진흥왕 2(541) 병부령 취임

진흥왕 6(545) 국사 편찬

진흥왕 11(550) 적성 전투 승리. 도살성 금현성 전투 승리

진흥왕 23(562) 대가야 함락

 

이중에서 이사부가 직접 참가한 전투는 , , , , 5개다.

 

이사부의 성은 신라왕족인 김()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으로 진골이다. 그는 소지왕 때 태어나 지증왕과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활약했다. 그는 왕족이지만, 임금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다. 진흥왕 시절에 병부령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고, 국사를 편찬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에 동시에 이긴다.

이사부는 육상전의 장군(general)과 해전의 제독(admiral)을 겸비했다. 고대사에서 육상 전투와 해상전투를 동시에 지휘한 장수는 많지 않다. 이사부는 신라의 첫 해전인 우산국 정벌에 성공했고, 하슬라(강릉), 금관가야, 대가야,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중류를 점령했다.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 시인인 월터 롤리(Walter Raleigh)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인즉,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것.

 

지증왕이 20대 초반의 젊은 왕족을 동해의 중심 거점인 삼척에 군사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먼저 동해를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내륙으로 뻗어 삼한을 통합하려는 의도였다. 백제와 가야가 남쪽과 서쪽 바다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신라는 필연적으로 동해를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동해 한가운데 울릉도엔 우산국이라는 해상세력이 버티고 있고, 먼바다 건너엔 왜()가 수시로 공격해왔다. 이사부가 동해를 지배함으로써 왜국의 공격을 막고,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며, 해상 교역로를 만드는 이점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점령하고, 동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 그 이전에 수십차례 신라를 공격해온 왜국의 출몰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왜구가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해상에서 신라 수군이 해상에서 저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왜가 남해안에서 근거를 완전 상실하고, 연대세력이었던 백제가 멸망하면서 왜국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끊게 된다. 삼국시대에 왜가 더 이상 한반도에 위협 세력이 되지 못하게 한 것도 이사부였다.

 

이사부장군 /삼척시
이사부장군 /삼척시

 

이사부는 지장(智將)이었다. 군사력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전투를 승리했다.

첫째 10대에 위계(僞計)의 전술로 가야의 땅을 빼앗았다. 전술은 거도(居道)의 계략. 말놀이를 하는 척 하다가 군사를 몰아 기습작전을 펼치는 전략이다. 이사부는 거도의 전술을 채택해 들판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말놀이를 즐겼다. 이사부는 말을 훈련시키고, 재주를 부리는 놀이에 열중했고, 가야를 공격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가야는 이사부의 마희(馬戲) 작전에 속았다. 어느 순간에 신라의 무장한 기병이 가야의 본거지를 급습했고, 가야는 굴복하고 땅을 내주게 됐다.

둘째 지증왕 13, 이사부가 우산국을 공격할때였다. 그곳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나, 꾀를 써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알렸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했다.

셋째 진흥왕 11년의 일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해 이사부가 군대를 출동시켜,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사부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실직군주로 임명된 때의 나이를 20세로 보면, 대가야 복속 때의 나이는 77세가 된다. 이사부는 소지 마립간 시기에 태어나서 20세에 실직 군주가 되고, 77세에 대가야를 정벌하게 된다. 그가 10대 후반에 가야를 공격한다는 기사가 있는데, 한평생을 전쟁터에 살며 신라의 영토 확장에 기여한 셈이다.

 

마희(馬戱). 말위에서 하는 재주라고 해 마상재(馬上才)라고도 한다.
마희(馬戱). 말위에서 하는 재주라고 해 마상재(馬上才)라고도 한다.

 

가야공격 기만전술

<삼국사기> 열전에 이사부가 실직군주가 되기 앞서 가야 공격에 성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도로왕(지증왕)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열전 이사부조)

실직군주로 가기 앞서 지증왕 초기에 이사부는 가야와 맞닿은 변경의 관리가 되었다. 시기는 지증왕 초기. 지증왕 원년에서 실직군주가 된 6년의 사이, 500~505년 사이였다. 실직 군주로 부임할 때 나이를 20대 초반으로 치면, 가야 접경지대 군 사령관으로 갔을 때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다. 이사부는 어린 나이에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사부는 위계(僞計)의 전술로 가야를 공격해 땅을 빼앗았다. 전술은 거도(居道)의 계략이었다.

거도는 탈해왕 때 사람이다.

이사부는 거도의 전술을 연구해 그 방법을 써먹었다. 우선 들판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말놀이를 즐겼다. 이사부 군대는 말을 훈련시키고, 재주를 부리는 놀이에 열중했고, 가야를 공격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줬다.

가야는 이사부의 마희(馬戲) 작전에 속았다. 마희는 말 위에서 펼치는 여러 가지 곡예를 말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를 하거나 온갖 동물들 흉내를 내고, 공중에 물건을 던져 받거나 말들에 엎드리는 재주를 부린다. 가야 병사들이 그 놀이에 빠져 구경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장한 기병들이 본거지를 급습했다. 가야 병사들은 넉 놓고 구경을 하다가 혼비백산하고 도망을 쳤을 것이다. 가야는 굴복하고 땅을 내주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속임수 전략이다.

 

신라의 영토확장 /박차영
신라의 영토확장 /박차영

 

우산국 복속 목우사자 위협전술

이사부가 우산국을 공격한 해는 지증왕 12(512)이다. 실직군주에 임명된지 7년후다. 실직군주에서 우산국 복속까지 7년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7년 동안에 이사부는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강릉의 예국을 공격하고, 동쪽 해로로 울릉도의 우산국을 복속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직군주에 임명된 이사부의 포부는 곧바로 동해를 내해로 만드는 일로 구체화된다. 실직 군주로 임명된지 7년후 이사부는 하슬라(강릉) 군주로 임명됨과 동시에 우산국(울릉도) 공격에 나서 성공한다.

우산국 정벌의 명분은 조공이다. 조공은 근대 이전에 중국 중심으로 한 동양의 지배 질서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호해주는(字小) 관계를 통해 정치적 지배구조가 형성됐다. 조공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치는 행위였다. 이에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임금을 책봉하고,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막아줬다.

그런데 작은 나라가 힘이 세질 때 큰 나라에 대항하려 한다. 이때 큰 나라는 무력을 행사한다. 우산국이 신라에 대항했다. 해마다 신라에 보내오던 조공을 거부한 것이다.

우산국이 신라의 신하노릇 하기를 거부하며 맞선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지세의 험함’, <삼국유사>에서는 바닷물의 깊은 것을 믿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또 우산국이 신라 수군을 깔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라는 오랫동안 해상세력인 왜의 공격에 시달렸고, 수군이 약했다. 그런 신라가 동해를 가로질러 공격해 올수 있을까 하는 교만과 오만함을 가졌을 것이다.

이사부 장군은 지혜로운 장수였다. 지세의 험함과 바닷물의 깊음을 믿고 덤비는 우산국 군졸들을 물리치기 위해 사나운 맹수를 끌어들였다. 나무로 깎은 사자(木偶師子)였다. 두 사서에서 이사부가 목우사자를 동원해 우산국 사람들이 공포에 떨어 항복했다는 대목에서 일치한다.

사자는 우리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이사부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사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면 이사부는 어떻게 사자를 알게 됐을까. 사자의 분포지역은 인도와 아프리카다. 불교와 힘두교에서는 사자를 영물로 받들어 숭배해왔다. 우리나라에는 불교 전파를 타고 사자상이 들어왔다.

이사부가 전함에 목우사자를 가득 싣고 울릉도 해안에 접근해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리라고 위협하자, 어리석고 사나운 우산국 병졸들이 항복했다는 스토리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이사부는 막강한 신라 수군을 이끌고 우산국을 침공했고, 우산국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이다. 목우사자의 우화는 민간의 설화로 전해오다가 고려시대에 김부식과 일연이 사서를 집필하며 옮겨 적은 게 아닌가 싶다.

이사부가 나무사자를 만들어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일화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목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사부의 목우사자와 트로이 목마는 다르다. 목마 안에 병사가 숨어 목마가 성내에 옮겨진후 내려와 성문을 여는 일종의 기만전술이다. 이에 비해 이사부의 목우사자는 적을 공포스럽게 하는 수단이다.

트로이 목마는 군인들이 들어갈수 있도록 대형으로 제작됐지만, 나무사자는 군선에 실어야 했으므로 트로이 목마보다 규모가 작았을 것이다. 다만 우산국인들이 두려워 항복할 정도였으니, 상당한 크기로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관가야 정벌 위협으로 무혈 입성

이사부는 지증, 법흥, 진흥왕 3대에 걸쳐 활약한 장수다. <삼국사기>에 법흥왕 때 그의 기록은 없다. 다만 <일본서기>에 이사부가 한국 연대기와 비교해 법흥왕 시기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계체(繼体)천황조에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라는 신라 장군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일본식으로 표기한 이사부다. 법흥왕 16년에 해당한다. 금관국 멸망시기(532)3년 전의 일이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금관국(임라) 왕이 신라가 국경을 자주 넘어 내침하니, 가야를 구해달라고 왜국에 주청을 하자, 왜왕이 대신 근강 모야신을 보내 신라와 백제의 왕을 부른다. 신라와 백제가 1등급 중신을 보냈지만, 모야신은 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는다. 이에 신라는 대장군 이사부에게 3천의 병사를 줘 금관가야 토벌에 나선다.

이사부는 3개월간 부산 다대포벌에 진을 치고 공격을 준비한다. 모야신은 이사부의 군세에 놀라 마산으로 도망을 간다. 이사부는 4곳의 부락을 초략하고, 가야인 포로를 끌고 경주로 돌아간다.

금관국왕은 모야신이 잘못해 다시 영토를 뺐겼다고 왜왕에게 보고했다. (모야신은 나중에 왜왕의 미움을 사 백제와 신라의 협공을 받은후 왜로 소환되어 대마도에 이르러 병사했다.)

법흥왕 때, 신라와 금관가야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신라는 동해안과 울릉도를 복속시켜 동해안에서 고구려와 예(말갈), 왜의 공격로를 차단한 다음, 남부지역 초략에 나선 것이다.

법흥왕 시기에 가야는 힘에 밀려 한발한발 신라에 속국화되고 있었다. 가야 임금이 신라 대신의 딸을 받아들여 혼인동맹을 맺는가 하면, 법흥왕이 직접 가야 땅을 공격해 영토화하자, 금관국 임금이 직접 찾아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고, 사직만은 보전해달라고 애걸한다. 이사부가 금관국을 초략하고 3년 뒤, 금관국 구해왕은 신라에 나라를 들어 바친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기에 평화적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금관국은 철의 나라였다. 금관가야는 일찍이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철제품을 낙랑과 왜, 신라등에 거래했다. 초기 가야연맹의 맹주 역할을 한 금관가야는 이사부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병부령 출장입상

이사부는 실직 군주에 임명되기 앞서 이찬이라는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다. 이사부는 진골이었기 때문에 20대에 두 번째 서열인 이찬에 올랐다. 이사부는 실직군주에서 대가야 전투시까지 57년동안 이사부의 공식 직함은 이찬이었다.

이사부가 서라벌 정가의 정점에 서는 것은 진흥왕 초기다.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랐다. 임금이 어렸으므로, 누군가의 섭정이 필요했는데, 왕태후가 섭정을 했다. 진흥왕은 즉위한 7세부터 18살이 될 때까지 11년간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이 시기에 이사부는 진흥왕 23(541)에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을 맡았다. 이사부는 병부령에 임명돼 어린 임금을 대신해 군권을 장악했다. 이사부는 내외 병마의 일을 관장함은 물론 내치에 주력한다. 섭정기간 이사부는 병부령이자, 이찬으로서 백관회의(화백회의)를 주재하며 국사를 총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기에 이사부는 밖에 나가서는 장수요, 안에 들어오면 재상, 즉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면모를 보였다.

이사부가 국사를 편찬하도록 임금에게 주상한 점은 재상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살-금현성 전투 /박차영
도살-금현성 전투 /박차영

 

금현성 도살성 전투 어부지리

550년에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혼전을 펼치며 두 나라의 군사들의 기력이 쇠해있는 틈을 타서 신라 이사부 장군이 두 성을 빼앗았다. 이 전투에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의 균형이 깨지고,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거점을 형성한다.

사료에 따르면, 백제가 충청북도 한강 중류를 장악하기 위해 우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 사비성과 도살성 중간에 있는 금현성을 공격해 도살성을 고립시키고, 한강 중류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혈투가 벌어진다. 이사부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전법을 썼다. 두 나라가 한치의 양보없이 싸우다 지칠 무렵 군대를 동원해 두 성을 차지하고, 한강 중류를 차지했다. 신라가 드디어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에 발을 걸쳐 놓은 것이다.

이사부가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북도의 남한강 중류를 장악하게 됐다

 

이사부 장군의 흔적 /박차영
이사부 장군의 흔적 /박차영

 

대가야 공략 --- 죽은 제갈공명

이사부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목이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정벌하는 장면이다. 한강유역과 동해안 북쪽에 대해 영토를 확장한 이후 신라의 다음 타깃은 마지막까지 버티던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주력군을 잃은 후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0여년간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사부가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

대가야를 함락한 시기에 이사부의 나이는 70대 후반이었고, 기력이 쇠한 나이였다. 가야 가맹국들에겐 이사부는 죽은 제갈공명 격이었다. 마지막 남은 대가야로선 이사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을 게 분명하다. 김부식은 사다함의 용맹 덕에 대가야를 함락하는데 성공했다고 평했지만, 백전백승의 장군 이사부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었기에 대가야가 성문(전단문)을 열고 항복했을 것이다.

공은 사다함이 가져갔다. 노장 이사부가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이 으뜸이라고 칭찬하며 땅과 가야에서 획득한 노비 300명을 주었다. 사다함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친구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함께 죽었다는 애절함이 더해져 이사부의 공이 가려져 있다.

이사부는 대가야 정벌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진다. 아마 진흥왕 말쯤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

이사부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신라의 영토를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확대하는 망라사방(網羅四方정책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실직 및 하슬라 군주 수행(지증왕), 우산국 복속 (지증왕)

도살성, 금현성 점투 (진흥왕)

금관 가야 공격 (법흥왕), 대가야 복속 (진흥왕)

철령 이남 10개군 점령, 옥저 복속 (진흥왕)

이사부의 활약으로 진흥왕 시대 신라는 북으로 함경남도, 서로는 서해안 당항성(경기도 화성), 동으로 울릉도, 남으로 경상남도 가야 관할영역을 모두 차지한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며 소국을 경영하던 예국, 맥국, 말갈, 우산국, 가야연맹 소국은 거의 모두가 신라에 흡수되며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본격적인 삼국 혈투의 시대가 개막된다. 아울러 한반도 고대사에 등장하는 말갈과 왜 등의 이질적 종족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잃고 소멸하거나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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