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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청해진 설치, 1면 병력 주둔…1년만에 중국 해적 궤멸시키고 제해권 장악
장보고, 서해에서 중국 해적 소탕하다
2019. 05. 25 by 김현민기자

 

신라 장보고가 소탕한 해적은 어느 나라 소속일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자. 장보고가 귀국해 대왕(흥덕왕)에게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다녀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적들이 백성들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기사를 액면 그대로 읽으면 중국 해적이다. 당시 중국 상황은 어떠 했나.

() 제국은 안록산·사사명의 반란(755~763) 이후 중앙의 지배체제가 현저하게 약화되고, 지방에 절도사들이 군벌을 형성하며 발호했다. 절도사들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며 중앙에 대항했다. 907년 당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정치질서가 붕괴되었고, 국가는 백성의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8세기 후반부터 엄습한 당의 정치 불안은 사회불안으로 이어져 과중한 세금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유민화했다. 773년 서주(舒州, 지금의 허난성) 자사는 백성들이 유망하여 열 사람 가운데 한명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난 농민들은 세력가의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이 도적떼들이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었고, 신라인들을 잡아 노비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보고 국가표준영정 /장보고기념관
장보고 국가표준영정 /장보고기념관

 

그 무렵 당나라에는 해적들의 노비 납치와 약탈, 매매 행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구당서> 헌종 시기, <신당서> 선종 시기에는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내용이 있다. <당회요> 노비조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821년 평로군 절도사 설평(薛平)은 해적들이 신라 양민을 납치해 등주(登州내주(萊州) 등 여러 곳에서 노비로 팔고 있음을 알리고, 칙령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이에 당 조정은 823년에 칙령을 내려 신라 노비를 돌려 보내라고 했다.

그럼에도 해적들은 발호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직후인 82810월에 당 조정은 다시 신라 노비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신라와 당이 공조체제를 형성했다는 느낌을 준다. 당시 당은 지방 군벌의 발호에 대처하는데 국력을 총동원했기 때문에 바다의 해적들을 퇴치할 여력이 없었다. 신라가 청해진을 세워 해적 소탕에 나서자 적극 환영하고, 공조체제를 형성했을 것이다.

 

장보고가 어려서 건너가 소장(小將)이 되었던 무령군(武寧軍)은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하는 무령 절도사의 군대로, 관할 지역은 지금의 장쑤(江蘇)성 일대다. 그곳에서 해적에 잡혀온 신라인 노비를 보았고, 신라인을 납치하기 위해 서해에 출몰하는 중국 해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장보고가 소속한 무령군은 평노치청(平盧淄靑) 절도사를 토벌하는데 동원되었다. 평노치청절도사는 헌덕왕 11(819)에 신라군 3만이 산동반도에 출병해 토벌한, 고구려 후예 이사도(李師道)의 운주절도사를 말한다. 장보고는 중국 군벌에 복무하고 있을 때부터 신라 군부와 연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중국 산동성 영성시 적산법화원. 장보고 대사 기념비 동상이 서 있다. /장보고기념관
중국 산동성 영성시 적산법화원. 장보고 대사 기념비 동상이 서 있다. /장보고기념관

 

장보고는 무령군을 떠나 산동반도의 적산(赤山)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신라인 자치기구인 신라소의 책임자를 맡아 적산법화원을 짓고 신라인들을 결속했다. 이 사찰은 820년대 초 장보고가 세웠으며, 적산은 당시 국제무역항이었다. 후에 장보고 선단의 활동 중심지로 산동성 일대에 살던 재당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로 유학 온 신라와 일본 승려들의 안식처로, 또한 동북아 문화교류의 장이 되었다.

신라소(新羅所)는 신라인들이 모여살던 신라방(新羅坊)의 자치단체다. 장보고는 귀국하기 앞서 이들을 세력권에 넣은 것이다.

당나라 신라방에는 많은 신라인이 살았다고 한다. 미국에 있는 코리아타운과 비슷했을 것이다. 우선 고구려가 패망하고 중국에 끌려간 유민 38,000명의 후손, 백제 멸망시 끌려간 15,000명의 후손들이 나라를 잃고 신라의 이름으로 중국에서 살다가 신라소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신라 본국에서 건너온 상인, 승려, 유학생들도 말이 통하고 삶의 방식이 같은 신라소에 거주했을 것이다.

이들을 묶은 것은 종교기관이다. 재미교포들이 한인 교회에서 모임을 갖는 것과 마찬기지였을 것이다. 신라와 당은 불교국가였고, 절은 공동체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장보고가 적산법화원을 세운 것도 바로 재당신라인들을 묶기 위한 것이었다.

 

장보고의 군사 1만명 모두가 신라 조정에서 차출된 인원은 아닐 것으로 본다. 당시 신라는 왕권다툼에 따른 내란, 흉년에 따른 도적떼 창궐 등의 시련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에게 그렇게 많은 병력을 지원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장보고는 어떻게 1만명의 병력을 충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신라방에서 차출한 병력, 일본에서 신라구(新羅寇)라 부르던 신라인 해적, 도적들을 정규병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청해진 설치 이후 사라졌던 신라구가 청해진 해체 이후에 다시 창궐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일본 연력사의 장보고 대사 기념비. 일본 승려 엔닌이 당에서 10년간 구법활동을 하고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귀국한 후 천태종 3대 좌주로 등극한 곳이다. /장보고 기념관
일본 연력사의 장보고 대사 기념비. 일본 승려 엔닌이 당에서 10년간 구법활동을 하고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귀국한 후 천태종 3대 좌주로 등극한 곳이다.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의 해적 퇴치는 성공적이었다. <삼국사기>대왕(흥덕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게 하니, 이후로는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팔아먹는 자가 없어졌다고 했다. 청해진 설치 1년내에 서해상의 해적을 소탕한 것이다.

해적이 소탕된후 장보고는 거만해 졌다. 청해진의 병력중 상당수가 자신이 모집한 병력이었다고 보면, 굳이 신라 조정을 따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청해진은 장보고에게 소왕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해적 소탕후 깨끗해진 바다(淸海)를 누비며 무역에 종사했다. 1만명의 병사를 먹여살리고도 남을 엄청난 무역 차익을 얻었을 것이다.

<속일본후기>신라국 신하 장보고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독립된 정치체로 보았기에 외국에 사신을 보내고 선물 교환까지 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이때 신하된 자가 외국과 교류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보고의 방물을 접수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장보고가 외교 법도에 없는 일을 벌인 것은 스스로 군왕의 지위에 있다고 자만한 게 아닐까.

장보고의 거만함은 역사 기록에 자세하게 나온다. 청해진 병력을 사병화해 병력을 출동시켜 자신에게 우호적인 임금(신무왕)을 세우고, 딸을 왕비로 천거하다가 반역을 꾀하게 된다. 결국, 846년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에게 살해된다.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도 5년을 버틴다. 문성왕 13(851)에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 김제)으로 옮겼다. 장보고가 사라진 후에도 신라 조정이 해상 군벌을 당장 없애지 못하고 5년의 세월을 기다려 서서히 약화시켰던 것이다.

 

장보고 장군 활동상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 장군 활동상 /장보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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