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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전설이 남아있는 옥저…주민들, 백제와 신라로 이주
사라진 고대왕국 옥저①…마운령·황초령비
2019. 05. 27 by 아틀라스

 

지금까지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는 4개다. 함경남도 마운령비, 황초령비, 서울 북한산 비봉의 북한산비, 경남 창녕의 창녕비가 그것이다.

함경남도에서 발견된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조선시대 역사지리학자 한백겸(韓百謙, 1547~1629)이 저서 <동국지리지>에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진흥왕이 동옥저를 정복하고 현지에 세운 기념비라고 추정했다.

마운령·황초령의 두 순수비는 568(진흥왕 29)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가 있지만, 마운령·황초령비에는 서두에 태창(太昌)’ 원년이라는 표현이 있어 <삼국사기>에 진흥왕이 즉위 29년에 태창으로 연호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568년에 설립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진흥왕이 동옥저를 순시한 그해 10, 한강하류 일대의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설치하고, 동해안 북부의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설치하면서 전선을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고구려와 타협하고 동옥저의 점령지를 고구려에게 돌려준 것으로 해석된다. 고등학교 교과서 지도에선 진흥왕때 진출하였다 상실한 영토라고 표기하고 있다.

마운령비·황초령비는 국경을 표시하는 표지석의 역할을 했다.

 

진흥왕 순수비 북한산 비봉 원위치 /문화재청
진흥왕 순수비 북한산 비봉 원위치 /문화재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슬픈 스토리가 담겨져 있다. 대무신왕 15(32)때의 일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 호동(好童) 왕자가 병사들을 동원해 옥저(沃沮)에서 유람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호동왕자를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 신왕(神王,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니리오?”라고 물었다.

낙랑왕 최리는 그를 궁궐로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낙랑공주)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줬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했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고구려 군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했다. (낙랑을 없애기 위해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했다는 설도 있다.” (고구려본기)

 

두 왕국 간의 전쟁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이 깨졌으니,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다. 낙랑국은 낙랑공주가 죽은지 5년 후인 대무신왕 20, 서기 37년에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면 낙랑국은 어디인가.

<삼국사기>에는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두 번 멸망하는 것으로 돼 있다. 첫 번째가 최리(崔理)가 통치한 낙랑국이 대무신왕 때인 서기 37년에 멸망하고, 두 번째는 위()의 속현인 낙랑군이 미천왕 14년인 서기 313년에 망했다. 역사가들은 서기 37년에 망한 낙랑국을 최리의 낙랑국이라며, 서기 313년에 망한 중국 속현 낙랑군을 구분해서 설명한다.

대무신왕조의 기사(32)에서 호동왕자가 옥저를 사냥하고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은 옥저의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비정된다. 낙랑국왕 최리가 북쪽의 강자 고구려의 왕자가 관할 구역내에 사냥을 오므로, 영접하러 갔을 것이며, 고구려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딸을 호동왕자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한나라는 광무제(光武帝) 6(30)에 낙랑군이 백두대간 동쪽, 즉 함경남도 동해안 일대에 대한 통치력을 행사하기에 힘이 부쳤으므로, 그 지역에 두었던 동부도위를 폐지했다. 그리고 예국과 옥저의 부족장을 현후(縣侯)로 임명한 후 철수했다. 옥저 지방의 현후의 한사람이었던 최리가 매년 낙랑에 조알하는 한편 낙랑의 칭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에 의해 수차례 공격을 받았고, 마침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를 끝으로 망국의 길을 걷는다.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옥저의 주민들이 대거 신라와 백제로 이주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온조왕 43(25) 10,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이르러 귀순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서 편히 살게 했다. (백제본기)

유리왕 14(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최리의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 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신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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