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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해 우창반란군 대장…위안스카이 사후, 직봉전쟁 후 뜻밖의 국가수반
신해혁명의 풍운아 리위안훙…두번의 총통
2022. 01. 14 by 김현민 기자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 19111010일 중국에서 우창봉기가 터지던날, 그는 그곳의 군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다른 지역에서 있었더라면 중국 최고통치자인 총통 자리를 두 번이나 꿰어찰 기회를 맞지 못했을 것이다. 신해혁명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일개 장교로 인생을 마감했을 리위안훙(黎元洪, 1864~1928)의 스토리다.

 

리위안훙은 후베이성 황피(黃陂)라는 곳에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 군대는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곳이었고 체질에도 맞았다. 해군사관학교 격인 텐진 수사학당(天津水師學堂)을 졸업하고 북양함대 포병장교로 근무하던 중에 청일전쟁을 맞았다. 그가 탄 전함은 일본군에 격침당해 바다에 표류했다. 그는 수영을 하지도 못했지만, 구명벨트에 의지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후 양무운동의 실력자 장즈둥(張之洞)에게 발탁되어 신군(新軍)을 훈련했고 일본에 파견되어 군사학을 배웠다. 그는 장즈둥 휘하의 영국인 고문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 파견중에 일본어를 배웠다. 1906년 여단장급인 신군 제21혼성협협통(混成協協統)이 되어 후베이성 우창에 주둔했다. 그는 청나라 군대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었으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철저한 황제파로, 만주족의 변발을 하고 있었다.

 

리위안훙 /위키피디아
리위안훙 /위키피디아

 

그에게 운명의 여신이 닥쳐왔다. 우창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정부군의 일원으로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호광총독 루이청(瑞澂)8진 통제(사단장) 장뱌오(張彪)가 도망쳤고, 리위안훙도 상관의 처사에 따라 첩의 집에 숨었다. 우창봉기는 반란자들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루이청과 장뱌오가 도주하지 않았더라면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리위안훙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반란자들에게 지도자가 없었다. 대부분 오합지졸이었고, 이런 상태로 움직이다간 정부군에 진압되어 모두 사형대에 올라야 할 판이었다. 그들은 지도자를 물색했다. 루이청이나 장뱌오는 너무 고위층이었고, 중간적 위치에 있는 리위안훙이 적당하다고 평가되었다. 영어도 잘하므로 우한삼진의 영국인들을 잘 설득할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반란 병사들은 첩의 집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 총을 머리에 대고 반란군을 지휘해달라고 요구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도 그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 진보적 인사였던 후베이성 자의국 의장 탕화룽(湯化龍)이 간곡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그는 마침내 후베이 군정부 도독에 취임한다는 포고문에 서명했다. 어치피 엎질러진 물이다. 그는 변발을 깎고, 반란군을 지휘했다.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의 차이가 있다면 리위안훙, 탕화룽과 같은 지방 향신(鄕紳) 계층이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리위안훙이 후베이성 반란군 수장을 맡았을 때 혁명세력의 정신적 지도자 쑨원은 해외에 있었다. 리위안훙이 사실상 리더가 되어 혁명군을 이끌었다. 청나라의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리위안훙을 반란군 대장으로 인정하고 연락을 취하고 협상을 하는 파트너로 삼았다.

19121229일 혁명가들이 난징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쑨원을 임시대총통, 리위안훙을 부총통으로 각각 선출했다.

베이징의 위안스카이는 난징정부와 협상을 벌여 선통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자신이 대총통에 올랐다. 이 야합에서 쑨원은 난징정부의 총통 직에서 물러났지만, 리위안훙은 북양정부의 부총통이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쑨원을 껄끄럽게 생각한 반면에 리위안훙을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1912년 4월 우창에서 리위안훙(왼쪽)과 쑨원(오른쪽) /위키피디아
1912년 4월 우창에서 리위안훙(왼쪽)과 쑨원(오른쪽) /위키피디아

 

리위안훙은 얼떨결에 등떠밀려 관직에 오르긴 했지만 마냥 물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위치에서 나름 소신이 있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하면서 리위안훙을 친왕(親王)에 봉하려 하자, 그는 완강하게 고사했다.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리위안훙을 체포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그가 위안스카이에게 칭신(稱臣)을 하지 않는 것이 또 기회가 되었다. 지방에서 칭제에 반대하는 봉기가 확대되었다. 1916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했을 때 그가 법률에 의해 대총통직을 계승하는데 반대자가 없었다. 첫 번째 총통직이다.

그는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군벌의 수뇌로 떠오른 돤치루이(段祺瑞)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리위안훙과 돤치루이 사이에 1차 대전 참전을 놓고 견해 차이가 확대되었다. 총통은 중립을 지키자는 견해였는데 비해 돤치루이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주장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을 따르는 군벌들에게 중앙정부에 대항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리위안훙은 또다른 군벌 장쉰(張勳)에게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와서 사태를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장쉰은 이 기회에 베이징을 장악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복귀시켜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리위안훙은 장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일본대사관으로 도피했다. 장쉰의 복벽 운동은 12일의 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돤치루이와 펑궈장 등 북양군벌은 선통제와 장쉰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총통직무는 펑궈장(馮國璋)이 대리하고, 리위안훙의 첫 번째 총통임무는 1년여(1916. 6. 7~1917. 7. 17)만에 끝났다.

 

리위안훙이 말을 타고 행진하고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리위안훙이 말을 타고 행진하고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22년 즈리파 군벌과 펑톈파 군벌 간의 1차 직봉전쟁(直奉戰爭)에서 즈리파가 승리하자 총통이었던 쉬스창(徐世昌)이 물러나고 리위안훙이 소환되어 두 번째로 총통을 맡게 된다. 두 번째 총통직은 즈리파 군벌의 실세 우페이푸(吳佩孚)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曹錕)이 총통 자리를 원했다. 리위안훙은 기반이 없었다. 차오쿤이 리위안훙을 흔드는데 앞장섰다. 19234월말 즈리파 장군 85명이 밀린 군비를 내놓으라며 대총통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67일 차오쿤은 직계조직인 공민당을 동원해 총통 퇴진을 주장했다. 곧이어 베이징에서 경찰 파업, 공무원 파업이 일어나고 시위대는 최종적으로 리위안훙의 사퇴를 요구했다. 리위안훙은 이런 모든 행위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아 차리고, 총통 인장을 가지고 톈진으로 떠나버렸다.

차오쿤은 즈리 성장 왕청빈(王承斌)에게 급전을 보내 리위안훙에게서 인장을 뺏아오라고 했다. 그 도장을 찍어 자신이 임시대총통이 되려는 속셈이었다. 왕청빈은 경찰을 동원해 열차를 정지시키고 총통에게 인장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리위안훙은 하는수 없이 인장을 내주었다. 그러자 왕청빈은 하나를 더 요구했다. 이왕에 도장을 내주었으니, 대총통 자리도 내놓으라고 했다. 이로써 그는 허울뿐인 대총통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두 번째 임기도 1(1922. 6. 11~1923. 6. 13)에 불과했다.

그후 리위안훙은 톈진 조계에서 머물면서 사업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만년에 풍족한 생활을 보냈고, 교육사업에 많은 기부를 했다. 19286월 톈진의 영국 조계에서 경마를 관람하던 중에 쓰러져 사망했다. 향년 6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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