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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투스가 서술, 유럽인에 앞서 2천년 전에 일주…아프리카 서해안도 탐사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했다는 기록
2022. 03. 04 by 박차영 기자

 

포르투갈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에 앞서 2,000년 전에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BC484~BC425)는 저서 역사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우리는 리비아가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똑똑이 알수 있었다. 이 일을 가장 먼저 실증한 사람은 이집트 파라오 네코(Necho)였다. 나일강에서 아랍만에 이르는 운하가 완공되었는데, 그는 페니키아인들에게 배를 타고 출발해 헤라클레스 기둥을 돌아 북해(지중해)로 진입해 이집트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페니키아인들은 홍해를 출발해 남해로 향했고, 가을이 찾아올 때에 리비아(Libya)의 어떤 지역을 항해하든 반드시 뭍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들은 뭍으로 올라가 파종을 하고 수확을 한 다음해 항해를 계속했다.”

 

고대의 세계관 /위키피디아
고대의 세계관 /위키피디아

 

헤로도투스는 120년전에 일어난 일을 듣고 기록했다. 네코 2(Necho II, 재위 BC 610~BC 595)는 고대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로,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의 운하는 지금의 수에즈 운하와는 달리, 나일강 지류에서 홍해까지 옆으로 뚫는 물길이었다.

대략 BC6 세기의 사건이다. 네코 2세는 운하가 완공되자 해양민족인 페니키아인에게 배를 타고 홍해로 가서 지중해로 돌아오라고 명령한 것이다. 당시 이집트는 아프리카가 생겼는지 몰랐다. 페니키아인들은 홍해에서 배를 타고 남하해 리비아를 돌고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 북해(지중해)로 돌아온 것이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대륙을 의미한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아시아, 리비아, 유럽의 세계대륙이 있다고 믿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항해하고 돌아오는데 수년이 걸렸다. 식량이 떨어지면 뭍에 올라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한 후에 또다시 항해했다. 그렇게 돌아 이집트에 도착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 운하의 위치 /위키피디아
고대 이집트 운하의 위치 /위키피디아

 

헤로도투스는 선원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 전설적 얘기를 들고 의심은 했지만 기록해 두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페니키아인들의 항해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그리스인들은 아프리카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건너간 것보다 2,000년 전에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한 것이 된다. 다 가마는 페니키아인인 항해의 역방향으로 아프리카를 돈 것이다.

 

페니키아(Phoenicia)는 지중해 동쪽 레바논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베이루트(Beirut), 시돈(Sidon), 티레(Tyre), 비블로스(Byblos) 등 항구도시로 연결되어 있는 도시연맹체였고, 주민들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페니키아는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식민지 개척에 나서 지중해 연안의 키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데냐, 이베리아 반도 등지 해안을 식민지로 만들고 뛰어난 항해술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페니키아는 항해 민족으로 우수한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페니키아의 항해술은 연안항법을 기본으로 했으며, 천문 관측과 조수간만의 차, 조류의 흐름 등에 대한 전문 지식을 확보했다. 또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길고 폭이 좁은 선박, 상선용의 라운드 선박을 따로 건조했으며, 상선의 경우에 돛에 의존하는 범선을 활용하기도 했다. 전투시 배를 연결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부교를 개발하기도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약 400년간 전성기를 누렸으며, 오늘날 유럽언어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어 알파벳을 발명, 보급했다. 페니키아 식민지의 하나인 카르타고가 로마에 대적해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Punic Wars)을 일으킨다. 포에니는 페니키아를 의미한다.

 

고대 페니키아인의 교역로 /위키피디아
고대 페니키아인의 교역로 /위키피디아

 

1백년 뒤에 또다른 페니키아인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BC 520년경 한노(Hanno)라는 카르타고 항해자가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한 주항기가 전해온다.

한노는 함대를 이끌고 모로코 연안을 항해하다가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의 선대는 60척이었고, 1척당 50명이 승선했다. 총인원 3,000명의 어마어마한 선단이 남방으로 내려가 여섯 개의 거점을 형성했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실 아일랜드(Seal Island).

이들 페니키아인은 그곳에서 7일을 더 내려가 어떤 섬에 도착했다. 밤이 되자 하늘이 관목의 불빛으로 인해 온통 붉게 물들고 어디선지 은은하게 피리소리와 북소리, 징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섬에는 호수가 있었고, 호수 안에 또 여러개의 섬이 있다고 했다.

후세의 역사가, 지리학자들은 한노 일행이 도착한 곳을 시에라리온으로 비정한다. 일각에서는 가봉으로 보기도 한다. 선원들은 현지 토인을 붙잡아 죽이고 신체 일부를가져가 카르타고에 보관했으나, 후에 카르타고가 로마군에 멸망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한노의 항해 루트 /위키피디아
한노의 항해 루트 /위키피디아

 

페니키아인들은 유럽의 대서양 지역을 탐험했다. 지중해 동부 또는 남부에 본거지를 둔 페니키아인들이 영국까지 바닷길을 헤멨다는 것은 당시로는 큰 모험이었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 청동은 구리에 주석을 약간 가미해 만들어진 합금으로, 강도가 높아진다. 청동기 시대에 주석은 요즘의 희토류에 해당한다. 구리 광산은 흔했는데 주석이 귀했다.

고대에 전설의 주석광산이 대서양의 카스테리데스(Cassiterides) 섬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5세기에 항해자들이 금을 찾아 모험을 시작한 것처럼, 2천년 전에 페니키아 모험가들은 전설의 섬을 찾아 나섰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카르타고의 항해자 히밀코(Himilco)였다.

BC 5세기경 히밀코는 대서양을 항해한 끝에 전설의 섬 카스테리데스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섬이 잉글랜드의 콘월이다. 로마의 작가 플리니우스는 그에 관해 서술하면서 일찍이 이처럼 유럽 변경을 탐험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곳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고, 끊임 없이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고 했다. 영국의 콘월(Cornwall)은 그후 오랫동안 주석 채굴지로 유명했다. 히밀코는 영국, 아일란대, 프랑스 해안, 포르투갈을 탐험하고 돌아왔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을 발견한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European exploration of Africa

Wikipedia, Necho II

Wikipedia, Phoenicia

Wikipedia, Hanno the Navigator

Wikipedia, Himil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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