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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운영하며 지롱드파 결집…루이 16세 처형으로 자코뱅파와 대립
프랑스혁명 지롱드파의 여왕, 롤랑 부인
2023. 02. 20 by 박차영 기자

 

프랑스 혁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 롤랑 부인처럼 극적인 인물도 없을 것이다. 여성 지도자였다는 점, 지롱드파를 배후에서 좌지우지했다는 점, 지성과 교양이 뛰어난 저술가였다는 점 등이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원래 이름은 마리잔 마농롤랑 드 라 플라티에르(Marie-Jeanne "Manon" Roland de la Platière, 1754~1793)이며 줄여서 마농 또는 롤랑 부인(Madame Roland)이라 부른다.

 

마농은 파리에서 조판업을 하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성장했다. 어릴 때 수녀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남들보다 머리가 총명했고, 루소 등의 계몽 서적을 즐겨 읽었다. 교회에 갈 때 성경 대신에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들고 다녔으며, 스파르타나 로마 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녀는 26살이던 178020살 연상인 롤랑과 결혼했다. 롤랑은 낮은 귀족계급인 자작으로서 리옹에서 산업감독관을 맡고 있었는데, ‘백과전서작업에 가담한 계몽주의자였다. 그녀가 나이 많은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은 당대 개혁주의 그룹과 접촉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롤랑 부인 (1793) /위키피디아
롤랑 부인 (1793) /위키피디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졌을 때 그녀는 지방도시 리옹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남편을 파리로 전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롤랑 부인은 파리 자신의 집에서 살롱(Salong)을 열었다. 매스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던 그 시절에 살롱은 여론을 수렴하고 전파하는 장소였다. 그녀는 지성과 미모로 파리의 명사들을 살롱으로 끌어들였다. 롤랑 부인은 자신의 살롱을 찾아오는 젊은 혁명가들로 지롱드파를 형성했다.

지롱드파는 피에르 베르니오, 자크 피에르 브리소, 그리고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롤랑 부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지롱드 당원들은 롤랑 부인의 살롱에 모여 논의하고 행동방향을 정했다. 지롱드의 결정에는 롤랑 부인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17916월 루이 16세가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무산된 일이 일어났다. 혁명가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롤랑 부인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를 여성 특유의 시기심으로 미워했지만, 왕정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인은 왕정 타파를 주장하는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자코뱅파에 대해 악평을 쏟아냈다.

코너에 몰린 루이 16세는 17923월 지롱드파로 내각을 조직했고, 롤랑이 내무장관에 올랐다. 롤랑은 정열과 행동력을 겸비했으나 판단력이 부족했다. 남편이 내무장관이 되자 롤랑 부인이 남편을 주물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부인은 남편의 연설문을 써주었으며, 정책도 살롱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 정리하고 남편에게 전달했다. 자코뱅파는 롤랑 부인의 온건 노선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남편이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비방했다.

 

단두대에 선 롤랑 부인(삽화, 1850) /위키피디아
단두대에 선 롤랑 부인(삽화, 1850) /위키피디아

 

지롱드와 자코뱅이 결정적으로 대치한 것은 루이 16세 처형 사건이다. 자코뱅파는 전국을 공포상태로 몰아넣고 의회인 국민공회에 루이 16세 부부의 처형안을 상정했다. 처형안 처리는 잔-폴 마라(Jean-Paul Marat)가 주도했다. 표결에서 721명중 과반인 387명의 찬성으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롤랑 부인은 국왕과 왕비를 싫어했지만 사형엔 반대했다. 그녀는 우리의 혁명은 흉악한 사람들 때문에 명예를 잃고 추악해 졌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1793121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는 끝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국왕 부부 처형 이후 자코뱅파는 공안위원회를 설치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 당원들이 혁명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지롱드 당원들은 파리를 탈출했다. 내무장관직을 내려 놓은 롤랑은 아내에게 함께 도피하자고 했으나, 롤랑 부인은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531일 그녀는 체포되었다.

롤랑 부인의 애인이었던 푸랑수아 뷔조(François Buzot)는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인은 뷔조와 플라토닉 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17937월 자코뱅의 핵심인물 마라가 노르망디에서 온 여성에 의해 살해당했다. 샬롯 코르데라는 지롱드파 여인은 노르망디의 지롱드 반란을 고발한다는 거짓말로 피부병으로 집에 머물던 마라를 찾아갔다. 마라는 욕실에 있었다. 마라가 노트를 꺼내 메모하던 중에 이 여인이 찔러버린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마라의 죽음을 이용했다. 자코뱅은 마라의 죽음을 지롱드파의 여왕으로 불리던 롤랑 부인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녀는 5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집필했다. 118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녀는 종이와 펜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롤랑 부인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처형되었다.

!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 지는가!” (O Liberté, que de crimes on commet en ton nom! Oh Liberty, what crimes are committed in thy name!)

그녀가 죽은 후 남편 롤랑과 애인 뷔조는 노르망디에서 자살했다.

 

롤랑 부인의 스토리는 영국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이 1837프랑스 혁명사를 편찬하면서 소개했고, 프랑스 작가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지롱드사’(1847)에서 그녀를 극찬했다. 미국의 아동문학가 자넷 이튼은 롤랑 부인을 센강의 딸이란 타이틀로 소개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adame Roland

Wikipedia, Jean-Paul Ma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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