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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오지 않고 일본 관점에서 서술…왜곡 투성이지만, 당시 정황 파악에 도움
일본 자료로 쓴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2023. 06. 04 by 박차영 기자

 

‘hermit’이란 영어 단어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사막의 동굴 같은 곳에 은신해 기도로 생활하는 종교인을 의미하는데, 우리말로 은자(隱者)로 번역한다. 1882년 미국인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가 조선을 소개하는 책자에서 이 단어를 썼다. ‘은자의 나라 한국’(The Hermit Nation Corea)이다.

은자의 나라또는 은둔의 나라란 표현은 우리나라의 여러 저술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그리피스의 책 제목에서 기원한다. 지금도 북한을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책 표지
책 표지

 

그리피스는 27살이던 1870년에 일본 후쿠이번 번주의 초청으로 일본에 왔다. 후쿠이번은 지금의 에치젠(越前)으로 한반도 맞은 편에 위치해 있는데, 그는 그곳에서 임나(任那) 태자와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전설이 스며 있는 사당을 자주 찾았다. 그 사당에서 그는 바다 건너편 조선은 왜 저렇게 비경의 나라가 되었는가”, “왜 일본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지 못하는가하고 생각했다고 초판(1882) 서문에 썼다.

그가 조선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일본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피스는 조선 역사를 모르고 일본사에 관한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깨달았고, 1874년 귀국했다. 이때까지 조선은 외국 어떤 나라에도 개방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4년간 체류하면서 조선에 와 보지도 않았고, 조선의 자료를 접하지도 못했다. 일본에서 구한 자료, 지도, 사진, 조선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증언과 기록, 하멜과 같은 표류자들의 기록 등을 다양하게 채집해 조선에 관한 글을 저술했다.

번역자인 신복룡씨는 그리피스가 두 번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2차 방한은 1926~1927년이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방문이 언제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적어도 1907년 개정판 이전에 한국을 방문한 흔적이 책의 내용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1884227일 미국을 방문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뉴욕 빅토리아 호텔에서 접견한 사실을 책에 남겼다.(p644, 집문당) 그때 그리피스는 민영익, 서광범, 변수를 만나 저녁 한때 줄겁게 보냈다고 했다.

그리피스의 친일적 사고는 나이가 들수록 깊어졌다. 1907년 개정판에서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외교권을 상실한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조선의 양반들은 음모로써 자신의 독립을 악용했다. 음모자들의 얄팍한 술수는 한 민족의 존립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러일전쟁을 치른후 일본은, 왕실과 정부조차도 구별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옛날처럼 음모의 온상으로 만들어 둔다는 것은 자기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하여 영국이 이집트를 위해 했고, 미국이 쿠바를 위해 했고, 프랑스가 안남을 위해 한 일들을, 일본은 조선을 위해 했다. 조선은 이제 피보호국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P697~698)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은 제1부 고대·중세사, 2부 정치와 사회, 3부 근세 및 최근세사로 되어 있다. 책은 주로 1877년에서 1880년 사이에 쓰였고, 초판은 188210(고종 19)에 발간되었다. 초판은 강화도조약(1876)까지를 48장에 걸쳐 서술했다. 25년후 1907년 개정판에서 5장을 추가해 초판 이후에 일어난 한국의 경제적 조건,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사조약의 내용을 보완했다.

그의 저술엔 오류와 왜곡이 많고, 일본의 관점에서 쓰여진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1부 고대·중세사는 고조선에서 조선 효종 때의 하멜 표류까지를 다뤘다. 22장 가운데 임진왜란에 9개 장을 할애했다

고조선의 뿌리를 기자조선으로 서술했다. 아마 그가 참고한 책들은 모두 일본 책이었고, 단군조선에 관한 한국내 자료를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구황후의 신라 침공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우리 삼국사기엔 관련 내용이 없다는 점은 설명하지 않았다. 몰랐을 것이다. 일본족의 뿌리를 만주의 부여로 보았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본부설은 그대로 옮겼다. 임진왜란을 설명할 때에도 고대 일본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 사료를 옮겨 쓴 결과다.

2부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다루었다.

한반도의 지리는 그리피스 이전에 한반도를 탐사한 영국의 항해사들의 기록과 하멜의 설명 등을 많이 참조했다. 8개 도()의 현황은 일본이 확보한 자료인 듯하다. 그리피스는 조선의 양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양반들은 탐욕스럽게도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을 뿐만 아니라 왕의 대권도 가로챈다. 조선은 관권 만능의 수종증에 걸려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출혈로 고생하고 있다.” (p313)

그가 조선을 야만적으로 본 것은 고문이다. 그는 다양한 고문과 체벌 도구, 고문 방법 등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사람들이 정이 많다는 것도 적어 두었다. “조선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집안으로 청하여 따듯한 음식을 권한다. 여행자는 쌀만 있으면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밥을 지어주고, 필요한 반찬까지도 대접한다. 조선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인간은 모두가 한 형제라고 하는 법칙을 충실히 존중하고 매일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민족성은 상부상조하고 후덕한 인정을 베푼다는 점이다. 혼사와 상사와 같은 인륜대사를 당하면 그들은 가장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가족을 돕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다.”

3부는 근현대사로, 1부 고대·중세사의 후속편이다. 천주교 전래에서 박해와 순교, 쇄국정책을 다루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문호개방에 이르기까지를 설명했다. 49장 이후 5개 장은 전술한 바와 같이 1907년 이후 추가한 내용이다.

 

W.E. 그리피스 /위키피디아
W.E. 그리피스 /위키피디아

 

그리피스는 184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17살이던 1860년에 개항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일본 쇼군 사절단을 본 게 일본과의 첫 만남이었다. 남북전쟁에도 참가했으며, 뉴저지 럿거스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에 미국에 유학온 후쿠이번 출신 사무라이에게 영어를 가르친 게 인연이 되었다.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는 그를 초청했고, 그는 1870년에 일본으로 후쿠이번으로 갔다. 그는 번주로부터 2,400 달러의 봉급과 집, 말을 제공받았다. 이어 도쿄로 가 됴코대 전신인 카이세이가코(開成學校)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4년후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한 후 동양에 관해 다작의 저술작업을 벌였다.

그는 은자의 나라 한국외에도 한국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일본에 미친 한국의 영향’(Reviews on the Influence of Korea upon Japan),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부채’(Japanese Debt to Korea) 등이 있다.

그는 일본에 우호적인 글을 쓴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여러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일본아시아협회 회원이 되었다. 말년에 그는 뉴욕주 이타카에서 목사로 활동하다가 1928년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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