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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수년째 가뭄으로 농민반란 대규모화, 명나라 멸망…조선에도 대기근 발생
소빙기의 위기…17세기 대가뭄에 명청 교체
2019. 07. 16 by 김현민 기자

 

17세기 세계는 총체적 위기(General Crisis)의 시대였다.

유럽에서는 30년 전쟁(1618~1648)이 지루하게 전개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경제위기(1619~1623),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0~1660)과 명예혁명(1688) 프랑스의 프롱드의 난(1648~1653)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난(1670~1671)이 일어났다.

아시아에서도 이자성(李自成)의 난(1630~1644) ·청 교체(1644~1662)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묘·병자호란과 경신 대기근(1670~1671)과 을병 대기근(1695~1700)으로 혼란을 겪었다.

당대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17세기를 전세계적으로 위기가 닥친 시대로 파악했지만, 그 원인은 규명하지 못했다. 1954년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Eric Hobsbawm)‘17세기의 위기’(The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라는 표현을 썼다. 그후 기상학자들의 연구가 접목이 되면서 17세기에 동서양에 동시에 닥친 기후변화, 인구변화, 농민반란 등이 비교 연구되었다.

근대에 들어 유럽이나 중국에서 기상 자료가 풍부해졌다. 동서양의 공통적인 견해는 17세기에 나타난 소빙기(小氷期) 위기론이다. 17세기는 지구가 소빙기에 속했고, 소빙기의 기온강하 현상이 필연적으로 농산물의 감소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 만연 등이 반란과 전쟁, 혁명등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확산되었다.

 

만리장성 최동단의 관문인 산해관 /위키피디아
만리장성 최동단의 관문인 산해관 /위키피디아

 

17세기초 누르하치가 청()을 건국하고 만주를 통일했지만 여진족보다 100배나 인구가 많은 명()은 썩어도 준치라고 넘보기 힘든 상대였다. 그런데 중국에 소방기가 찾아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명말(明末) 1600~1643년의 기후를 대만 기상학자 유소민(劉昭民)은 중국 역사상 찾아온 제5차 소빙기로 규정했다. 유소민은 저서 기후의 반역에서 명말의 기후가 오늘날보다 1.5~2.0°C 낮은 혹한이었다고 정리했다. 오늘날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 남부 윈난(雲南) 지역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1)

산시(陕西)성 기록에 “1622~1629년 사이 8년간 내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았다. 1633년 시안(西安)에 가뭄과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다. 쌀 한말 값이 1천 전이나 했고, 사람이 서로 잡아 먹었다.”고 했다. 산둥(山東)성 기록에는 “1633~1643년 사이에 크게 가물어 굶주린 백성이 온 거리에 가득했고, 사람이 서로 잡아 먹으며 도적떼가 성읍을 파괴했다고 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지구표면의 평균기온이 3°C 내려가면 대기 중의 수분이 20% 감소해 극심한 가뭄이 발생한다고 증명했다. 명말의 기록은 중국의 가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게 한다.

가뭄이 극심해지자,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도 극도로 심해졌다. 농민들은 어차피 굶어 죽는 판에 식량이 있을 법한 곳에 도적질을 하게 되었고, 이는 권력에 저항하는 농민봉기로 발전하게 된다. 1622년 백련교도의 난, 1627년 이자성·장헌충의 난이 발생했다.

북쪽 변방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지역에 한파가 몰려와 몽골족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만주도 요동반도 정도에서만 추수가 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명은 내부에서 농민반란이, 외부에서는 오랑캐가 남하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1627~1628년 산시(陝西) 지방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굶주린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점차 정치적 색깔을 띠며 명()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으로 발전했다. ()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 역참의 3분의1을 폐지했는데, 갑자기 생계를 잃은 역졸(驛卒)들과 군량미를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도 반란에 가담하게 되어 농민 반란의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초기 농민반란 지도자 가운데 고영상(高迎祥)틈왕(闖王)’이라 일컬으며 산시(山西)와 허난(河南)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 규모가 34만에 이르렀다.

이자성(李自成)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중농 출신으로 역졸, 군인 등을 전전하다가 식량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자 고영상의 농민군에 가담했다. 그는 고영상 밑에서 전국의 농민 세력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636년 고영상이 전투에서 죽은 후에 틈왕(闖王)에 올라 농민군을 이끌었다.

이밖에 장헌충(張献忠), 나여재(羅汝才) 13개 농민 반란군이 후난(湖南), 장시(江西), 쓰촨(四川) 일대에서 할거하며 명나라를 위협했다.

이자성의 봉기군은 16444월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을 함락했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처첩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했다. 이자성이 산해관(山海関)을 지키던 오삼계(呉三桂)의 가족을 몰살하자, 오삼계가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다. 청의 섭정 도르곤이 오삼계를 앞세워 이자성을 쫓아내고 중원을 장악하게 된다.

청의 중국 제패는 군사력이 막강했다거나 경제력이 월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기후의 이상변동에 따른 농민반란, 명군의 분열 등의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료: 이태진,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
자료: 이태진,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

 

소빙기의 피해는 한반도도 비껴가지 않았다.

서울대 사학과 이태진(李泰鎭)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470년간의 천변재이(天變災異)를 전수조사한 결과, 25천여 건 중에 82.5%1500~1750년 사이에 발생했다고 밝혀냈다. 이태진 교수는 이 기간이 소빙기 현상과 관련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2)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경술년)1671(신해년)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던 조선백성 수십만명이 굶어 죽어갔다. 2년에 걸친 대기근을 역사적으로 경신(庚申) 대기근이라고 한다.

2년에 걸쳐 저온으로 우박과 서리, 때아닌 폭설이 내렸고, 가뭄과 홍수가 반복됐다. 조선 팔도에 전염병이 유행했고,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은 신음하는데, 사대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한 것도 이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사태가 발생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살아남은 노인네들은 전쟁 때도 이보다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피해는 엄청났다. 조선 전역에서 흉작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당시 조선 인구 1,200~1,400만명 중 30~4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백성들이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시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왕실의 상가에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지 하는, 백성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 없는 논쟁을 벌였다. 저 유명한 예송(禮訟) 논쟁이 이 때 일어났다.

 

소빙기의 기온변화 /위키피디아
소빙기의 기온변화 /위키피디아

 

유럽에서는 16~17세기 소빙기에 마녀사냥(whitch hunt)이 횡행했다. 마녀가 사탄의 사주를 받아 아이들을 잡아먹고 질병을 퍼뜨리고, 농사를 망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유럽 전사회가 마녀를 색출해 교수형이나 화형에 처했다.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2세기 동안에 최소 10여만명이 마녀로 몰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농민봉기, 30년 전쟁 등이 종교전쟁의 색채를 띠면서 대중은 이단자 태워죽이기 등으로 희생양을 만들었다.

중세에만 해도 유럽에서 마녀에 대한 증오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한다. 1420~1430년 무렵에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의 알프스 일대에서 마녀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본격적인 사냥 물결은 소빙기인 1580~1670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다. 마녀 사냥의 시작과 끝은 소빙기의 시작가 끝과 거의 일치했다.

마녀들에게 뒤집어 씌운 죄목은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것이 많다. 흉작, 자연재해, 전염병 등이 전적으로 마녀들의 소행으로 돌려졌고, 마녀들이 주문을 외워 바람을 일으키고 우박을 내리게 하며, 그들의 주술과 마력, 미신적 언동으로 짐승과 땅의 기운, 포도 열매, 과실들이 쇠잔해지고, 사멸해 갔다는 것이었다. 마녀들이 억수 같은 비를 내리게 해 경작지를 침수시키고, 벼락을 몰고와 집과 나무를 쓰러드렸으며, 냉해를 가져와 푸른 보리밭과 풍성한 과수원을 단숨에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당대 유럽인들은 믿었다.

강풍과 홍수, 전염병, 우박, 서리 등은 자연현상이다. 소빙기 시대에 기상이변이 극심했고, 이런 현상이 모두 마녀들의 탓으로 돌려진 것이다. 사회에는 종말 의식이 팽배했고, 하느님의 뜻으로 마녀를 저주하고 학살했던 것이다.

 

1585년 스위스의 마녀 화형식 그림(Johann Jakob Wick) /위키피디아
1585년 스위스의 마녀 화형식 그림(Johann Jakob Wick) /위키피디아

 


1) 유소민, 기후의 반역, (2005 성균관대 출판부) 181~182

2) 이태진,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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