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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동아시아 3국의 근대이행 세 갈래 분석…만국공법, 군주 리더십도 언급
근대기 한중일 성패 가른 군비증강
2023. 06. 14 by 김현민 기자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창비, 2009)라는 책에서 연세대 백영서(白永瑞) 교수가 주필진으로, ‘21세기에 다시보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이행 경로라는 논문을 실었다. 논지는 이웃하는 한중일 세나라가 서양세력이 밀려오는 근대 격변기에 어떤 길을 걸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오래된 담론은 일본의 근대화는 완전 성공했고, 중국은 절반 실패’, 한국은 완전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백영서 교수는 이 담론을 부정한다. 세 나라가 서로 편차를 보였지만, 근대화기에 변화를 수용하려고 노력했고, 나름대로 성공한 부분도 있다. 그렇다면 한중일 세나라가 어떻게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가.

저자는 전반부에서 세 나라가 만국공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살펴보고, 각국의 군주들의 리더십을 짚었다. 그런데 국제법(만국공법)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내부적 사회통합이 중요할 수는 있지만, 보다 절절히 공감하게 된 대목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다룬 제5장이다. 두 전쟁이 한중일 세 나라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하고 중국은 침체하고, 조선은 일본에 먹혀 버렸다. 조선은 치안을 담당할 무력도 갖추지 못했다. 군인반란, 민중반란도 제압하지 못해 외국군대를 끌어들였다. 조선왕조는 세력이 변할 때마다 중국에 붙었다 러시아에 붙었다, 또 중립화를 거론했다 결국엔 나라를 들어바쳤다.

결론은 조선이 국력을 배양하지 않았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이다. 백영서 교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고생한 경험도 있어 그런지, 국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장황하고 구차하게 설명했다. 백 교수는 국력과 국익이 세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관건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산만하게 접근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챕터에 소국주의는 무슨 의미로 삽입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국주의는 군부독재를 연상하나.

책표지 /출판사
책표지 /출판사

 

중국은 청일전쟁(1894~95)에서 일본에 패한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동이사아에서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조가 패배한 원인은 군비증강의 격차였다.

일본은 처음부터 청에 대해 군사적 승리를 확신한 것은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에서 일본은 청의 군사력에 밀리고 있음을 실감하고 본격적인 군비 확장을 꾀했다. 일본정부는 특히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할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개전당시의 일본 해군력은 청과 대등한 수준으로까지 증강되었다.

청 정부도 양무운동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서양식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근대적인 군수공장을 세워 서양식 무기와 군수품을 만들었다. 1874년 일본의 대만 출병 이후 청조는 위기감을 느껴 해군력 증강에 거액을 투자했다.

하지만 1891년부터 청의 군사력 증강이 정체되었다. 항간에는 서태후가 이화원 재건 비용으로 함정구입비를 썼다는 얘기가 돌았다. 청나라의 기강해이도 문제다. 북양함대 주력전함 6척이 1886~1891년 사이에 일본 항구를 방문했다. 일본은 방문지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었다. 그 와중에 함대의 내부까지 일본군에 공개되었다.

결과는 청나라의 패배였다. 전쟁에 승리한 후 일본은 대대적인 감격과 흥분을 경험하고 애국주의가 고조되었다. 소국이었던 일본이 동양의 패자를 제압했다는 자부심이 타올랐다.

청일전쟁은 일본에 경제적인 보상도 해주었다. ··독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는 돌려주었지만 중국으로부터 일본 1년 예산의 네 배나 되는 전쟁배상금을 받았고, 이 돈으로 1997년 금본위제도 개혁을 단행할수 있었다.

 

청일전쟁 성환전투도 /위키피디아
청일전쟁 성환전투도 /위키피디아

 

중국의 종주권이 빠져나간 공백에 러시아가 들어왔다. 민비 세력은 러시아에 접근했고, 일본 깡패집단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다. 고종은 1년후 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바꾸고 절대군주제를 강화했다. 칭제이든, 왕권강화이든 무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고종은 그런 것이 없는 상태에서 밀어부쳤고, 결국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중간에 서는 중립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염원과 기대와는 달리 일본과 러시아는 만한교환론, 만한일체론를 거론하며 반도와 만주 분할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과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은 대치했고, 결국 전쟁이 불가피했다.

러일전쟁(1904~1905)은 한중일 갈림길을 완결시켰다. 일본은 반주변부에서 세계의 핵심 국가로 부상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이익선‘(利益線)에 들어 있는 조선을 1905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러일전쟁에서 청의 위안스카이를 비룻해 일부 간부들이 일본의 승리를 지지했다. 러시아가 만주에 투자한 철도 등을 회수할수 있다는 기대에다 황인종이 단결해 유럽 국가를 이겨야 한다는 인종주의의 결과였다. 하지만 청의 기대는 어긋났다. 일본은 만주에 투자한 러시아의 이권을 돌려주지 않고 독차지해 버렸다. 러시아가 깔아 놓은 동청철도(東淸鐵道)는 일본의 만주와 대륙 진출의 초석이 되었다.

조선은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천명했다. 지식인들 가운데 러일전쟁을 인종적 편견으로 바라보고 일본의 승리를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체결하러 서울에 들어왔을 때 대한제국의 언론들은 환영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고종의 중립노선은 허망하게 끝났다.

전반부에서 저자는 만국공법에 대한 한중일 3국의 의식을 다뤘다. 일본은 만국공법을 새로운 보편적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불평등조약 개정과 변법을 거쳐 문명국으로 도약하고자 시도했다. 중국은 중국적 세계질서의 유지와 제국주의로의 전환을 추진하다가, 일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이후 국권회수운동과 신해혁명으로 급진화되었다.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사실과 만국공법을 받아들이는 이중성을 유지했다. 청조가 후퇴한 후 중립화 구상에 매달렸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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