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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일본만이 서양 제도 채택…청은 막바지에 수용, 조선은 거론도 못해
근대기 한·중·일, 헌정과 의회 어떻게 보았나
2023. 06. 15 by 김현민 기자

 

근대기 이전의 한중일 3국의 정치체제는 군주제였다. 중국은 황제, 조선은 국왕이 통치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쇼군에서 천황으로 넘어갔다. 한중일 공히 무력충돌을 겪으며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후 개화의 길에 나섰다. 개화 과정에서 삼국은 서양의 헌정제도와 의회제도가 구미열강을 부국으로 만든 제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헌정과 의회제도는 일본에서 일찍이 도입된데 비해 중국에선 청조 말기에 시도하다 신해혁명을 만났으며, 조선에서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한중일 3국의 헌정과 의회제도 도입의 차이를 근대 초기 동아시아에서 헌정의 수용양태와 비교시론이란 논문으로 다뤘다. 논문은 동아시아 근대 이행기의 세 갈래에 실려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 21년째 되던 1889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에 국회선거를 치렀다. 유럽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는 최초다. 청나라에서는 1906년 광서제가 헌정질서를 약속했고, 헌법은 1908년 흠정헌법대강이 발표되었다. 1909년에 신장성을 제외한 각성에서 지방의회(자의국)가 개설되었고, 이듬해 9월에 중앙의회(자정원)이 설립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헌정을 도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개화파 지도자들도 헌정과 의회설립에 대해 시기상조론을 폈다. 독립협회가 발표한 헌의6조에 의회격인 중추원 개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논의가 중단되었다.

헌정과 의회는 민주주의의 요체다. 서양에서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은 왕권과 시민(부르조아)의 오랜 투쟁의 결과였다. 영국에선 수백년년에 걸친 세력 대치를 통해 얻어졌으며, 프랑스에서도 혁명 이후 50년 이상의 대혼란을 거친 후에 제도로 정착되었다.

아시아에선 절대군주제에 대한 시민의 도전이 없었다. 동양 지식인들이 헌정 도입과 의회 설립을 주장한 것은 부국강병을 추구하기 위함이요, 군민(君民)일체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서양이 왜 강한지를 배우고 의논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의회제도가 군주와 국민들을 일치단결시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구화 모델이면 모두 옳다는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의 사고였다.

1890~91 일본의 첫 번째 국회의사당 /위키피디아
1890~91 일본의 첫 번째 국회의사당 /위키피디아

 

일본에서 헌정제도는 막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성 전투를 통해 무력으로 권력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막부에는 이념과 사상이 없었다. 유신세력들이 천황과 손잡고 막부를 타도한 후 새로운 군주를 내세웠다. 새 군주 천황과 신하들 사이에 권력의 공유관계가 형성되었다.

유신세력들은 막부의 정책을 사의(私義)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유신정부는 공의(公義)를 따라야 한다며 메이지 천황에게 권력내에 공의 기구 설치를 주장했다. 근대기에 일본의 유신파들은 공의 존중과 의회정치에 동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는 초기부터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에 이의가 없었고, 1870년 어전회의에서 국법 초안이 만들어졌고, 의회 개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다만 20여년 동안 헌법에 어떤 내용을 넣을 것인가, 의회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1885년 헌법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식 내각제도와 화족제도를 살려 귀족원을 창설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중국과 조선에 달리 일본이 동양에서 유일하다시피 의회제도를 갖게 된 것은 메이지 천황의 나이가 어린데다(유신 당시 16), 천황의 권력이 오랫동안 미약해 신하들의 요구와 타협점을 찾지 않을수 없었다는 정황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박훈 /서울대홈페이지
박훈 /서울대홈페이지

 

청에서는 광서제 시절에 캉유웨이(康有爲)를 중심으로 무술변법운동을 일으켰을 때 의회제도 도입이 거론되었다. 캉유웨이는 황제에게 보내는 상서에서 10만호 단위로 1인의 의원을 선출해 의회를 개설할 것을 주장했고,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캉유웨이의 시도는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밀려남으로써 무위에 그쳤다. 하지만 서태후도 의회단 사건을 거치면서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청은 멸망 두해전에 지방의회, 바로 전해에 중앙의회를 개설했다. 청조는 19115월에 내각을 발족시켰는데, 황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고, 그해 10월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청조는 해체되었다.

 

박훈 교수는 조선에서는 헌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를 해보지도 못한채 고종의 전제군주권 확립노선이 선택되었고, 그 상태에서 그대로 보호국화가 되어 청조만큼의 헌정 실시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신권을 강화하여 군주권을 제약하려는 방식을 선호했다. 유길준이 군민(君民)이 공치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입헌군주제를 호평하면서도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나라에서 갑자기 인민에게 국정참여하는 권력을 허()함이 불가하다고 했다.

1996년 갑오개혁에서도 헌정실시는 논의되지 않았다. 갑오 정부가 발표헌 홍범 14조에 민법과 형법을 제정할 것이라는 항목은 있지만 헌법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군국기무처는 입법기관이었지만 선출된 권력은 아니었다.

독립협회가 헌정 수용을 요구했지만 고종은 군주의 권한을 제한할 것을 우려해 해산해 버렸다. 이어 고종은 군주권 강화로 나간다. 칭제를 선언하고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1899년 헌법적 성격의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했다. 그후 나라를 빼앗기면서 의회라는 논의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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