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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이 김춘추에 약속한 “평양 이남 백제 토지” 문구 놓고 학계에 설전
신라가 백제만 통합했다는 주장과 반박
2023. 06. 24 by 박차영 기자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을까’(2023, 역사비평사)라는 서술형 제목의 책은 뜻밖의 주제를 독자들에게 던졌다.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백제만 포함한 2국 병합인지, 미완이지만 고구려까지 포함한 3국 병합인지의 여부다. 둘째는 신라인들의 삼국통일 의식이 형성된 시가가 종전 직후인 7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200년 더 지난 9세기라는 주장에 대한 논란이다.

책 표지
책 표지

 

국사학자들의 이런 논쟁을 접하면서 비전문가로서 머리에 떠오른 궁금증은 왜 이런 논란을 벌이는지 하는 것이었다. 신라가 2국을 통일했든, 3국을 통일했든 역사의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느 주장이 맞든지간에 국토가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비한족의 역사도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동서남북 방면에서 역사공정을 펼치는데 우리 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에 넘어가고 신라가 백제만 통일했다는 축소주의에 함몰해 있는지 의아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문구를 놓고 학자들이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논박을 벌이는 모습에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또다른 궁금증은 삼국이 서로에 대해 동족 의식을 가졌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 역사에 민족주의는 구한말 내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3국 병합이든 2국 병합이든, 7세기 중후반 동북아시아 전쟁은 민족 또는 종족의 통일과는 개념을 달리한다. 신라가 당과 연합하고, 일본이 백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수만의 병력을 투입한 것은 국가간 합종연형의 전략일 뿐이다.

신라의 영토가 전쟁의 결과로 영토를 임진강선에서 대동강선으로 올라간 것은 당시 국제정세와 국력의 결과였을 뿐이다. 신라의 영토확장에 한계가 그어진 것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아쉬운 일이겠지만 그걸 놓고 2국 통일이니, 3국 통일이니 논쟁을 벌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백제통합론자는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 남북국시대로 이어간다고 주장하지만, 발해의 주류는 말갈족이고 발해 이후 만주는 우리민족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전문가가 아니지만, 가급적 논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대목에선 저자가 자의적인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상식적 판단으로 논지를 이해하려 했다.

우선 백제통합론은 오랫동안 상식화되어 있던 삼국통일론에 도전하는 논리다. 김영하, 윤경진 교수가 이를 주장하는데, 부분적으로 둘은 견해를 달리했다.

백제통합론자들이 가장 명학한 근거로 제시한 것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671)에 나오는 문무왕의 설인귀답서다. 설인귀는 당나라 총사령관으로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기 앞서 사신을 통해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인즉, 신라가 어려울 때 당군이 도와주어 임금의 목숨을 연장시켜주었는데 이제와 무기를 들고 황제에게 대드느냐는 꾸지람이다. 이에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김춘추)이 당 태종을 만났을 때의 일화를 꺼내며 황제가 대동강 이남을 주기로 약속하고선 이제 딴소리냐고 질책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당 태종이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 백제 토지(平壤已南百濟土地)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겠다고 한 말이 소개되었다. 이 대화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을 만났던 648년에 있었는데, 아들 김법민(문무왕)23년후에 아버지에게 한 황제의 약속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百濟土地)란 대목이 백제병합론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자기네가 갖고 신라에는 백제 땅만 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3국을 통일한 게 아니라, 2국만 통일했다는 것이다.

백제병합론자는 평양이남은 백제 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백제가 온조왕 13에 국경을 확정해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는 백제본기 기록을 들었다. 이는 백제인들이 패하(대동강)을 북쪽 경계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조왕 때 기사는 허구성이 강하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 황제가 백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기존의 삼국통일론을 지지하는 전덕재 교수는 설인귀서의 평양이남 백제토지에 대해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벡제 토지를 합친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의 세계에서 당나라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당 태종이 약속했다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신라에게 내주었다. 대동강 이남의 영토 가운데 한주(漢州)는 고구려 땅이었다.

백제병합론자들이 또 제기하는 근거는 삼국사기 문무왕 15(675)의 문구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임금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이 도중에 당으로 되돌아가니,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책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 지역(高句麗南境)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게 되었다.”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왕에 책봉하고 신라의 레짐체인지를 추진했다. 하지만 문무왕이 허리를 굽혀 화해를 요청하자 당은 문무왕의 관직을 북직시키고 고구려 남경”(高句麗南境)까지 땅을 신라에 주었다.

백제병합론자들은 고구려 남경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인 임진강을 의미하며, 이 문구도 신라에게 백제만을 통합하도록 인정한 근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덕재 등은 남경(南境)이 남쪽 국경이라기보다는 남쪽 경역(境域)으로 해석해 고구려의 남부지방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사학자 기경량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남경표현이 당나라 사서인 당회요, 신당서에서 추출한 것으로, 애매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기경량은 신라가 나당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도 평양 이남 지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다가 경덕왕 때 당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영토화한 것으로 보았다.

이 논쟁은 신라의 통일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고구려 땅을 놓친 것에서 시작한다. 전덕재에 따르면, 신라가 7세가 중후반 전쟁을 통해 늘린 영토 가운데 92.4%가 백제 땅이고, 고구려 땅은 7.6%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조차도 당나라의 안동도호부 치소로 넘어갔다. 따라서 삼국통일이란 개념에 미흡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두 논자의 차이는 고구려의 대부분을 중국에 빼앗겼다는 서글픔과 고구려의 일부를 차지했으므로 3국 통일의 모양새를 갖추었다는 자위 사이를 오간다고 하겠다.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 /문화재청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 /문화재청

 

두 번째 논쟁의 주제는 신라에서 통일 의식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삼국통일이란 용어보다 일통삼한(一統三韓) 또는 삼한일통이란 용어가 쓰였다. 삼한은 진한·마한·변한이란 의미를 넘어서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윤경진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통삼한 또는 삼한일가(三韓爲一家)란 말이 후에 만들어진 허구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윤경진은 청주 운천동 사적비의 경우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서 7세기 삼한일통 의식의 성립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태종 무열왕의 시호를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 김유신이 삼한이 한집안이 되었다는 기사도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하던 시대에 사회를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의 통일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기존의 주장은 신라인들이 통일직후부터 일통삼한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의 경우 수공(壽拱) 2이란 중국 연호가 있어 신문왕 6(686)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9세기 의식의 표현이라고 할수 없다는 것이다. 1982년에 뱔견된 운천동 사적비는 청주 산직마을의 공동우물터에서 빨래돌로 사용되던 것인데, 그 탓에 글자가 많이 닳아 있어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경덕왕때 고구려 옛땅을 한주, 명주, 삭주의 3주를 설치하고 백제 옛땅에 웅주, 전주, 무주 3주를 만들어 도합 9주체제로 재편한 것은 일통삼한의 의식을 표현한 것이란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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