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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에서 청일전쟁, 삼국간섭까지 日 외상이 체험하고 남긴 기록
건건록 “조선독립 앞세운 전쟁도발의 고백”
2023. 07. 03 by 박차영 기자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가 저술한 건건록’(蹇蹇錄)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발부터 청일전쟁, 1895년 삼국간섭에 이르는 2년간의 일본 외교기록이다. 무쓰는 18928월부터 18965월까지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외무대신에 재임하면서 조선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의 격동기에 외교의 실무를 처리했다. 건건록의 ’()다리를 절름거린다는 뜻으로, ‘역경’(易經)의 제39괘인 건괘’(蹇卦) “왕신건건 비궁지고”(王臣蹇蹇匪躬之故)에서 따온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험난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 이유를 두지 않음이다라고 해석되는데, 외무대신으로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맞아 일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 임했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무쓰는 이토와 함께 일본제국주의 수뇌이자, 조선병합의 원흉이었다. 그가 외상을 맡았을 때는 동양의 패권이 바뀌던 시기였다. 그는 2000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중화 패권을 패퇴시키고, 해적의 소국이었던 일본열도를 패자로 만든 외교의 주역이었다. 건건록에서 무쓰는 비교적 솔직하게 당시의 정황을 서술했다. 그는 국제정황을 상세하게 서술했고, 그 바탕에서 외교정책을 설명했다. 무쓰는 피를 흘리며 얻은 청일전쟁의 성과를 삼국간섭이라는 외교의 실패로 내주어야 하는 억울함을 변명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했다. 그는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는 제국주의 논리를 강변했다. 마치 조선을 위하는 것처럼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이익을 챙기는 정책을 서슴없이 추구했다. 건건록에는 약육강식의 시대, 힘의 외교가 당연시되던 시대의 외교논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무쓰 무네미쓰 /위키피디아
무쓰 무네미쓰 /위키피디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만 해도 일본은 흔한 농민반란으로 생각하고 관망했다. 18944~5월 전라·충청도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일본은 농민들이 정부를 전복할 만큼의 세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봉기자들이 세력을 확대하고 전주가 함락되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조선의 위기를 일본은 기회로 활용했다. 무쓰의 설명은 동학당의 난을 이용해 청국을 조선반도에서 내몰고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명분을 내거는 것으로 요약된다. 청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속국으로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2년후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텐진조약으로 청국군대가 철군했으나, 여전히 위안스카이가 남아 조선의 속국화는 유지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한 것을 기화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고 청나라와 일대대결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후 일련의 사태 진전은 이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책표지 /출판사
책표지 /출판사

 

청국과 조선의 친청파 정부는 오판을 했다.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충돌을 할 경우 일본이 청국에 이길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중국의 도발을 유도하는 전략을 썼다.

텐진조약은 청일 양국 중 어느 일방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상대국에 그 사실을 통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은 청국이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청국이 통보도 하기 전에 내각에서 일본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조선에 주재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청국이 일본에 파병을 통보했을 때 일본군은 이미 이동하고 있었다. 일본공사 오오도리 게이스케는 예상외로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인천과 서울 사이에 주둔했고, 청군은 아산에 집결해 있었다.

 

일본군과 청군이 상륙하자 동학군은 진격을 멈추었다. 조선 조정은 반란이 소강상태이므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은 철군을 거부하고, 조선의 개혁을 요구했다. 조선이 이웃나라이므로 조선의 안녕이 일본의 안녕에 직결되고, 따라서 조선의 내정개혁이 필요하다는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한 것이다. 조선 정부가 썩어 문드러졌고, 스스로 개혁할 의사가 없으므로, 농민반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국과 일본이 내정개혁을 위한 상설위원을 공동으로 파견해 조선의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을 지원하자고 했다. 청국은 조선의 개혁에 외국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 조선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일본의 제의를 반대했다. 조선도 스스로 개혁을 할 터이나 두나라 군대 모두 나가달라고 했다.

일본 내각은 단독으로 조선 정부로 하여금 개혁을 실시하도록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무쓰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 내란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평화스러움에 만족해 앞으로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고 편정할수만은 없었다.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는 이론은 살실은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데 있었다.” (P61, 김승일역, 범우)

그들(청국)은 조선문제를 다룰 때 모든 것을 속방론(屬邦論)에 근거하여 자신만의 지위를 학보하려 햇고, 다른 나라와는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열중해 왔다. 조선이 현재와 같은 참성을 겪고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웃나라로서의 우위도 아닐뿐더러, 실로 우리나라의 지위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 일본정부는 조선이 안녕과 태평을 위한 계획을 담당함에 있어 느슨해질수 없다.” (P62~63)

 

무쓰는 청일전쟁 도발을 풍우계”(風雨計)라고 표현했다. 파멸의 기회를 빨리 올수 있도록 부추겨서 먹구름이 낀 하늘로부터 세찬 비를 내리게 하여, 맑고 개인 날을 맞게 한다는 것이다. (P68) 무쓰는 어떤 식으로라도 일·청 사이에 충돌할수 있는 좋은 비책을 강구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주자 오오도리 공사에게 이왕지사 외부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 없으므로, 어떤 구실을 찾아서라도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전훈을 보냈다. 도발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후 전개는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연구에도 많이 나온다. 일본의 도발을 감지한 위안스카이가 돌연 귀국한다. 71일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고 아산·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써 청일전쟁은 시작된다.

전쟁 발발 직후인 723일 새벽 4, 일본은 2개 대대를 투입해 고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은 친청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민비의 대척점에 있던 대원군을 끌어들여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요한다. 고종은 마지 못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조선의 개혁조치가 대원군 주도로 실시된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조선은 독립국, 요동과 대만은 일본에 할양. /위키피디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조선은 독립국, 요동과 대만은 일본에 할양. /위키피디아

 

개전 직후에 러시아의 개입은 시작되었다. 무쓰는 이에 대해 러시아는 조선이 이웃나라이므로 조선의 변란을 방관할수 없다고 하면서, 암암리에 조선 국내의 일에 대해 언제나 참견할수 있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고 술회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이토 총리와 청국 이홍장 사이에 시모노세키 합의가 이뤄지고 조약이 비준되기 직전에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동반해 3국 간섭을 했다.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내주어야 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쓴 징비록에서 우리의 잘못을 자세하게 기록해 후대에 경계로 삼았다. 징비록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고 한다. 300년후 그들은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켰다. 건건록도 한국사람들에게 많이 읽힌다. 당시 조선의 지도부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눈에 선하다. 건건록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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