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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한국 외채협상을 통해 큰 이득 얻으려는 의도…시티은행과 체이스맨해은 시큰둥
[1997 국가부도⑧] JP 모건의 포커게임
2019. 07. 25 by 김현민 기자

 

199712월말, 뉴욕 채권단 회의에서 JP모건이 슬그머니 한국채권 조정안을 내놓았다.

당초 JP 모건안은 150~300억 달러에 이르는 한국 기업, 은행의 단기 외채를 만기 1, 5, 10년등 세 종류의 국채로 일괄적으로 전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당시 한국산업은행 글로벌본드의 유통금리가 10~11%로 발행금리 6~7%보다 4~5% 포인트 높게 거래됐기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할 경우 한국은 고금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원안에는 콜 옵션(call option)이 있었다. 5년 만기 채권에는 1년후부터, 10년 만기 채권에는 3년후부터 발행자(한국 정부)가 여유가 있으면 조기상환할 수 있도록 한 조건이었다.

JP 모건안은 1980년대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외채 상환협상 때의 방식을 본뜬 것이다. 당시 JP 모건이 월가 은행을 대표해서 협상을 주도했고, 한국 정부에 대한 협상안을 만든 JP 모건의 어니스트 스턴 전무도 라틴아메리카 외채 협상에 참여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급조했던 것 같다.

중남미 국가들은 1982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상태에서 채권은행단과 채무 상환협상을 벌였다. 협상은 7년을 끌어 1989년에 최종 타결을 보았다.

당시 니콜라스 브래디(Nicholas Brady) 미국 재무장관은 2,000억 달러에 이르는 중남미 국가의 채무를 국채로 전환해, 채권은행단이 일부를 매입하고 나머지는 국제시장에서 소화하도록 했다. 중남미 국가들은 신용력이 없어 채권 발행이 불가능했지만, 미국은 미국 정부의 국채(TB: Treasury Bond)를 담보로 중남미 국채 발행을 지원해 줬다. 당시 미국 재무장관의 이름을 본뜬 브래디본드는 이렇게 발행돼 국제 채권시장에서 정크본드로 거래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채무 상태는 1980년대 중남미 채무와 달랐다. 중남미 채무가 정부 부채였으나, 한국의 것은 민간 부채였다. 또 중남미 국가들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상태에서 협상을 했지만, 한국은 중남미 국가에비해 경제가 양호했기 때문에 부채만기만 연장하면 신용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컸다. 아울러 중남미 국가에 대한 채권은행은 주로 미국 은행이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유럽과 일본은행들이 미국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줬다는데서 차이가 있었다.

 

채권은행단 회의가 열리자 JP 모건안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가 높게 제기됐다. 이 안은 시티, 체이스맨해튼 은행과 같은 상업은행에게나, 채무자인 한국에게도 불리하게 짜여져 있었다.

상업은행(commercial bank)들은 한국에 돈을 많이 빌려준 쪽은 자기네들인데 JP 모건이 생색을 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상업은행들로선 부실 여신을 채권으로 전환할 경우 빌려준 돈을 받게 될지 모르지만, 여러모로 손해를 보는 장사다. 그들에겐 한국 시중은행에 대한 크레딧 라인(대출한도)을 완전히 폐쇄, 거래관계를 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몇 년후 경제가 회복되면 한국이라는 대고객을 잃게 된다.

유럽계 은행들도 자신의 독자안을 협상테이블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채무자인 한국의 시중은행으로서도 만기를 연장함으로써 선진국 은행들과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금리도 문제다. 1년전보다 4~5% 포인트 높은 채권을 발행하는 것보다 1~2% 정도만 더 높은 이자를 얹어주면 연장할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유리했다.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채무자가 채권자와 협상할 땐 배짱을 부릴 필요가 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선진국 은행들이 그동안 끊었던 크레딧라인을 복원해 한국에 대한 대출을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선진국 채권은행단 회의는 해를 넘겨 199815일에 재개됐다. 서울에서는 정인용 전부총리가 국제금융특사 자격으로 왔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은 이날 아동기금모금을 위해 뉴욕의 살로먼 스미스 바니사를 방문해 한국(경제)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며 월가 은행들이 나서서 한국을 지원해주도록 지원사격을 했다.

정인용 특사는 성급하게 JP 모건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빡빡해도 시간을 갖고 좋은 조건을 찾아보자는 배짱이기도 하고, 정권 이양 과도기에 차기 정권에 부담이 되는 문제를 성급히 다룰 수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그는 JP 모건 본사를 찾아 더글러스 워너 회장과 어니스트 스턴 전무를 만나 협상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한국의 경제실정, 김대중 당선자 측의 IMF 조건 이행 방침, 한국의 경제 개혁 방향등을 설명했지만, JP 모건안에 대해서는 수락여부를 답하지 않았다.

그는 정문에 몰려 있는 미국 기자들, 정확히 말하자면 월가 투자자들을 향해 한국은 외채 만기연장에 관한 많은 선택 방안이 있다면서 그렇지만 어떤 방안이 한국에 가장 유리한지를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정인용씨의 코멘트가 월가에 전해지자, 투자자들은 한국이 상황에 쫓기면서도 카드를 던지지 않고 있다면서 의아해 했다.

채권은행단 회의는 3일간 열렸지만, 한국 단기외채 만기를 3월말까지 90일간 연장해주는 내용 이외에는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했다. JP 모건안에 대한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뉴욕의 JP 모건 본사 /김현민
뉴욕의 JP 모건 본사 /김현민

 

이번엔 JP 모건이 수정안을 내놓았다. 채권은행들이 모두 만족하는 안이었다. 은행이란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하는 기업이다. 이자만 높고, 안전하게 자금을 운용할 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 장사가 없다. 그러나 은행에게 좋은 장사는 돈을 빌리는 채무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수정안의 골자는 중도상환을 허용하는 콜 옵션을 삭제하며, 3년과 20년 만기 채권을 신설했다. 그리고 10년과 20년 만기 장기 채권의 금리를 고정금리로 한다는 것. 만약 이 안이 채택되면 한국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자금을 갚지 못한 죄로 10~20년동안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할 형편이다. 콜 옵션이 없어졌으니 경제가 호전되어서 갚을 능력이 생겨도 갚을 길이 없다. 특히 장기 채권은 단기 채권보다 금리가 높기 때문에 채권 투자자들이 장기채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1% 가산금리가 5~6%로 커지는 것도 불만인데 그나마 최장 20년까지 악성채권으로 남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채무자로선 받아들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한국은 20년간 이자만 물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그런데 시티은행과 체이스맨해튼 은행이 JP 모건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것은 JP 모건이었다. 한국의 외채협상을 통해 국제 금융계의 주도권을 쥐고, 대목 장사를 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월가에서는 한국의 외채 협상을 빅딜, 사상 최대의 포커게임이라며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18JP 모건은 인터넷을 통해 고객들에게 전자메일을 띄웠다. 내용인즉 JP 모건이 만든 한국 외채 협상안을 채권 은행단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1)

뉴욕 금융가는 선진국 채권은행들이 한국의 단기 외채를 얼마나, 어떻게 처리해주는지 여부에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미국 은행은 물론 유럽, 일본 은행등 선진국 은행의 대출담당 중역들이 한국에 빌려준 돈을 어떻게 하면 받아내는가 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대거 뉴욕에 와 있었다. 당시 채권은행단 회의를 JP 모건이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다.

 

뉴욕 채권은행단 회의는 일체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회의 내용이 궁금했다. 협상이 잘되는지, 삐걱거리는지 하는 것도 투자자들에겐 주요한 정보가 된다. JP 모건은 한국의 단기외채 250~300억 달러를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채권으로 전환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 안이 받아들여질 경우 채권 투자자들은 한몫할수 있다. 이미 발행된 한국 채권을 미리 사두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채권 발행을 위해 한국 정부가 국제 채권 시장을 관리할 것이므로 값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JP 모건은 이점을 이용했다. 모건사는 골드만 삭스나 살로만 스미스바니와 같은 경쟁회사를 따돌리고 협상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안을 기정사실화할 필요가 있었다. 300억 달러에 이르는 한국 단기 외채를 채권으로 전환할 경우 발행액의 1%를 수수료로 받아도 3억 달러의 수수료를 단번에 챙길 수 있다.

 

그러면 JP 모건은 어떤 은행인가. 창업자 JP 모건은 20세기초 미국의 철도와 철강산업을 비롯, 미국의 거의 모든 산업을 장악한 독선적인 금융자본가였다. 그는 부도 직전의 중소 은행가들을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 불러모아 구제금융을 해주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JP 모건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되자 모건 은행 간부들은 하원 청문회에 불려가 대공황의 주범으로 몰렸다. 모건씨 후손들은 청문회가 끝나자 주식을 모두 내놓았다. 공개 주식회사로 전환된 JP 모건 은행은 80년대초까지 미국 최대 도매 금융회사로 독보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모건사는 경쟁에서 밀려났다. 오랜 역사와 전통에 뿌리둔 자존심과 보수성이 그 원인이었다. 살로먼 스미스바니, 메릴린치등 투자은행 경쟁사들이 합병을 통해 소매 영업망을 구축, 영업환경에 발빠르게 변신한 반면 모건 은행은 혼자만으로 영업하겠다고 고집해 왔다. 시티와 체이스맨해튼등 상업은행들이 소매금융을 취급, 상품을 다양화하는데도 뒤따라가지 못했다.

JP 모건은 월가의 대표 은행이라는 상징성이 사라져갔다. 974.4분기 순이익이 35%나 감소하는 등 모건 은행은 다른 은행에 비해 타격이 심했다. 아시아 금융위기로 물린 돈만 해도 6억 달러나 됐다. 모건 은행은 연초부터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른 금융기관과 합병을 추진하거나 대량 감원을 추진했다. 더 이상 사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금융 독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 외채협상은 JP 모건에게 좋은 먹이감이었다. 한국 협상을 주도해서 생긴 수수료만으로도 아시아에서 물린 돈의 절반을 만회할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1) NYT, 98130, Intrigue swirls around Korean debt tal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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