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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인도산 면직물, 향료 제치고 1위 교역물로 부상…모직·견직물 업계, 수입금지 청원
유럽에 인도산 캘리코 열풍 불다
2019. 07. 26 by 김현민 기자

 

1660년대 영국 왕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온 캘리코 옷감에 반해 버렸다. 일단 가벼웠고, 다양한 색상의 무늬를 넣을수 있었다. 왕실 가족들이 캘리코 옷을 입자 귀족들이 따라갔고, 곧이어 그 유행은 중산층, 서민층까지 내려갔다. 곧이어 영국 사회에 캘리코 열풍이 불었다.

캘리코(Calico)는 인도 남서부 캘리컷(Calicut) 사람들이 사용하는 옷감이라는 뜻이다. 인도인들에게 캘리언(cāliyan)이라 알려진 이 옷감은 1500년대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와 무역을 하면서 인도인들이 입는 캘리컷제 천을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다. 캘리코는 면화를 원료로 실을 짜 옷감을 만드는 인도산 목면을 말한다.

영국은 모직물에 자부심이 있었다. 양털을 깎아 짠 모직물 양복은 영국 신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모직물은 어두침침하고 무거웠다. 이에 비해 면직물은 가볍고 다양한 색상으로 채색할수 있었다.

인도에 풍부한 면화가 생산되는데다 오랜 면직산업 역사와 우수한 기술, 인도인들의 솜씨 등이 가미되면서 양질의 옷감이 생산되었고, 이 캘리코가 영국에 밀려들었다. 게다가 인도인의 임금은 당시 영국인의 6분의1이었기 때문에 면직물 가격이 쌌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싼 면직물을 배에 실어 런던에 갖다 놓으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값싼 인도산 천을 식탁보와 침대보, 커튼 등 가구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1660년대 왕정복고 시대가 되면서 왕실에서 캘리코가 의복으로 사용하고, 왕실의 패션이 곧바로 유행으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

캘리코 가운데 꽃무늬 같이 밝고 대채로운 무늬를 채색한 인도 고유의 친츠(chintz)는 면직물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영국인 신사들은 우중충한 모직물 옷을 벗어던지고, 밝은 무늬의 친츠로 갈아 입었다. 당시 신사는 친츠를 입어야 그 지위에 맞는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숙녀들도 무채색에 무늬 없던 모직물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화려한 색상의 캘리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귀부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극장에 갔고, 사교모임에 등장했다.

 

바르셀로나의 친츠 판매점. (1824, Gabriel Planella i Conxello 그림) /위키피디아
바르셀로나의 친츠 판매점. (1824, Gabriel Planella i Conxello 그림) /위키피디아

 

캘리코 열풍은 무역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17세기 전반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 열도에서 향료 전쟁을 벌였다. 향료를 생산하는 섬들을 차지하는 것이 두나라 동인도회사의 수익과 직결되었다. 향료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선두주자였고, 영국은 후발주자였다.

하지만 17세가 후반기 들어 유럽인들이 캘리코 패션이 유행하면서, 캘리코가 향료를 제치고 1위 무역상품이 되었다. 먹는 게 충족되면 그 다음은 입는 것이 인간의 욕구였고, 그 욕구에 따라 동양 무역의 상품구조도 바뀌었던 것이다.

162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입품중 후추와 스피이스등 향료가 전체의 75%를 차지했는데, 1670년대엔 41%, 1700년대엔 23%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 회사의 향료 수입량은 16202,943 플로린(네덜란드 화폐단위)에서 1670년에 1813 플로린, 1700년에 15,000 플로린으로 급증했다. 전체적으로 무역량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캘리코의 수입이 더 빠르게 증가한 것이다. 1)

 

캘리코 채색과정 /위키피디아
캘리코 채색과정 /위키피디아

 

영국 동인도회사는 향료에서 네덜란드에서 뒤졌지만, 캘리코 수입에서 앞서갔다. 네덜란드가 향료의 집산지인 인도네시아는 독점했지만, 인도에서는 네덜란드의 독주가 허용되지 않았던 덕분도 있었다. 게다가 청교도 공화정부의 올리버 크롬웰이 항해조례를 선포해 네덜란드 선박 운항을 견제한데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임시조직에서 영구조직으로 개편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캘리코를 왕실에 상납해 영국사회에 패션으로 유행시키고, 저렴한 비용으로 인도산 면직물을 무더기로 수입해 팔았다. 얼마나 많은 캘리코가 영국에 유행했든지, <로빈슨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는 캘리코는 우리의 집과 방, 침실까지 밀고 들어와, 커튼과 쿠션, 의자, 침대에까지 사용되었다고 썼다. 페스트가 퍼져 나가듯, 캘리코 사용은 늘어나고 있었다.

 

인도 캘리코의 이동경로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인도 캘리코의 이동경로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하지만 캘리코의 수입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은 인도에서 다량의 면직물을 수입하면서 대금으로 은()을 지출했다. 당시 영국 제품으로 인도에 팔만한 것이 없었다. 영국의 은이 대량으로 인도로 건너가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영국이 유럽 내에서 경쟁력 있다고 판단한 모직물 산업이 무너지고, 견직물 산업도 가라앉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산업이나 상품이 소개되어 유행하면 경쟁력 없는 옛 산업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산업은 기성의 정치권에 상당한 실력자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캘리코의 수입 급증은 기존 사업자의 노여움을 샀고, 정치투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캘리코 논쟁은 처음에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캘리코의 무분별한 수입에 반대하는 사람이 팜플렛에 그 의견을 적어 카페에 뿌렸다. 다른 사람이 그 팜플렛을 받아 보고는 동조하든지, 비판하는 의견을 적는다. 캘리코 수입을 찬성하는 사람도 팜플렛에 의견을 적어 카페에 돌려 동조자를 찾는다. 찬성자든, 반대자든, 서로 팜플렛을 통해 동조자를 구해 의회에 법안을 청구한다. 전형적인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의 토론이다.

캘리코 반대론자들은 모직물과 견직물등 기존산업의 피해를 주장했다. 영국인들이 앞을 다투어 캘리코를 사는 바람에 금과 은이 대량으로 인도에 반출된다. 수입된 인도 제품은 다른 나라에 수출되지 않고 영국에만 팔려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다. 모직물과 견직물 산업이 번성한 도시들에 실업자가 나오고 빈민이 증가한다. 빈민 구제 비용이 늘어나고 결국 시민들의 세금증가를 초래한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지론이었다.

이에 비해 찬성론자는 캘리코 수입으로 의류 제품의 가격이 싸지고, 결국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산업이 생겨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는 주장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상품, 신산업의 등장기에 나오는 논리는 비슷하다. 구산업의 목소리가 더 큰 것도 시대를 초월해 다름 없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드디어 캘리코 수입 금지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고,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1696인도직물 착용금지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지만, 부결되었다. 그러자 부결에 참여한 의원들이 협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법안이 부결되면서 더 많은 캘리코가 수입되었고, 동인도회사는 캘리코 수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1700년에 또다시 캘리코 금지법안이 상정되어 이번에는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에는 허점이 있었다. 법안은 채색, 염색, 착색되어 수입되는 캘리코에 한해 착용 또는 사용을 금지했는데, 염색하지 않은 캘리코의 수입은 제한되지 않았다. 당연히 염색되지 않은 캘리코가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채색 또는 염색되는 과정에 소비지에서 이뤄지는 바람에 영국에 염색, 날염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금지법안에도 불구하고 캘리코 수입이 늘어나자, 반발도 심해졌다. 어떤 이는 캘리코를 입고 가는 사람을 잡아 옷을 벗기는 일도 있었고, 또다른 이는 캘리코를 적발한다며 남의 집안까지 침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노리치, 캔터베리등 모직물, 견직물 공업지역에서는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1719년에는 더 강력한 법안이 마련되었다. 법안을 위반할 경우 20파운드의 벌금도 물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 법안에도 예외조항이 있었다. () 또는 모()를 혼합한 면직물, 남색이나 단색으로 염색한 캘리코는 수입될 수 있었다. 결국 두 번째 수입금지조치도 흐지부지 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많은 의원들과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의회가 캘리코를 전면 수입금지하는 조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인도의 면직업은 두차례에 걸친 영국내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성황을 이룬다. 하지만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량의 면직물 생산구조를 갖추게 되면서 수공업으로 짠 인도산 면직물은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여성용 친츠 정장 (1770~1800년) /위키피디아
여성용 친츠 정장 (1770~1800년) /위키피디아

 


1) 아사다 미노루, 동인도회사 (2004, 파피에),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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