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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분구묘에 여러 세대 가족 함께 매장…옹관에 담아 시신 보존
마한⑥…옹관에 담긴 부활의 염원
2023. 11. 12 by 김현민 기자

 

영산강 일대의 거대한 고분에는 한 사람의 피장자만이 묻혀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석실이 있거나 다수의 옹관이 묻혀 있다. 나주 영동리 고분의 석실 하나에 다섯 구의 시신이 나왔다. 먼저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그 시신이 벼만 남았을 때 옆으로 치우고 새로 죽은 사람을 묻는 빙식이다. DNA 조사를 한 결과, 피장자들은 하나의 모계로 연결된 한 가족이었다. 수백년에 걸쳐 여러 세대를 묻는 가족묘였다.

고대에 망자 처리는 중요한 문화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무덤과 그 안의 시신과 관, 부장품은 피장자들이 살던 사회의 문화를 드러낸다. 나주 일대의 대형고분은 아파트형 고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묻는 다인장(多人葬)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야 무덤에서 나타나는 순장과도 다르다. 가야 고분에서는 부족장과 같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처첩과 하인도 한꺼번에 묻는 방식인데 비해, 영산강 고분에서는 선대를 먼저 매장한 다음에 후대를 나중에 묻는 추가장의 형태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300년간 42개 매장시설이 크게 3층을 이루며 매장된 다인장의 무덤이다. 영산강 일대의 무덤은 죽은 자들의 아파트였다. 1996년에 조사된 석실에는 4개의 옹관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에는 2인의 인골이 함께 나왔다. DNA 조사에서 모계가 같은 친족으로 밝혀졌다.

마한 고분은 분구묘(墳丘墓) 형태로, 먼저 거대한 봉분을 쌓고 지상에 매장주체부를 두어 피장자를 묻는 방식이다. 무덤 하나에 여러 세대에 걸쳐 혈연공동체의 가족이 차례로 묻힌 것이다. 김영진 교수는 마한지역은 농경이 발전한 지역으로, 노동집약적 혈연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하나의 분구묘에 여러 사람이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했다.

 

나주 반남면 고분 /나주박물관
나주 반남면 고분 /나주박물관

 

고대 영산강 문화의 특이한 장제(葬制)가 옹관묘다. 옹관은 항아리 형태의 도자기를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넣는 장례 방식이다. 나주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고대 옹관은 중국·일본·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며, 한반도 전역에서도 나타난다.

영산강 유역에선 초기철기시대부터 옹관묘가 대량으로 축조되었다. 영산강 고대유적지에 대형 항아리가 출토되는데, 이는 곡물을 저장하던 항아리가 점차로 매장용으로 전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영산강변의 나주시 오량동에서 대형 가마터가 발굴되었는데, 옹관 생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량동 유적 주변에는 옹관, 땔감, 진흙 등을 운반하기 위한 도로 유구도 확인되었다. 또 수레가 이동하며 만들어낸 자국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바퀴 사이의 간격은 170~198cm로 대형수레가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나주 오량동 가마터 발굴 /문화재청
나주 오량동 가마터 발굴 /문화재청

 

영산강 일대 옹관묘 조사는 일제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1918년 일본인들이 나주 신촌리, 덕산리, 대안이 고분을 발굴조사를 했고, 해방후에는 1960년대에 영암일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옹관묘가 영산강 유역의 토착묘제임이 밝혀졌다.

고고학적 조사를 보면, 마한지역에도 초기엔 목관(나무널)을 쓰다가 옹관(독널)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나무널은 큰 나무를 베어내고 가공하고 운반해야 하지만, 옹관은 영산강 일대에 흔한 양질의 황토를 이용하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이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또 목관은 부패하고 부서져 동물이 침투하기 쉬워 시신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지만, 옹관은 진흙으로 밀폐하면 주검을 보존할수 있다는 고대 신앙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도 본다.

독널은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영산강 일대의 고대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신을 독널에 안장하면서 영원한 안식과 새로운 삶을 기원했다. 3세기 이후 영산강 마한인들이 옹관으로 완전하게 대체한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들은 옹관이 시신의 훼손을 막고 부패를 지연시킨다고 믿었으며, 사후에도 부활한다는 관념이 더해지면서 독을 더 많이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주박물관의 옹관 /박차영
나주박물관의 옹관 /박차영

 

마한 옹관의 특징은 두 개의 옹관을 붙여서 사용한 합구식 옹관이라는 점이다. 옹관은 하나의 항아리에 시신을 넣는 단옹 또는 단식옹관과 두 개를 붙여 사용하는 합구식이 있는데, 단식 옹관은 청동기시대에 나타나지만 합구식은 초기철기시대 이후 영산강 일대에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단식 옹관은 유아를 넣거나 성인이라도 뼈를 추려 묻는 세골장(洗骨葬)의 경우에 사용한다. 그에 비해 항아리 두 개를 겹쳐 길게 늘어뜨리는 합구식은 성인 시신을 있는 그대로 매장하는 장점이 있다.

초기엔 항아리를 그대로 사용했다. 무덤 전용을 사용된 독널은 3세기 무렵부터 나타난다. 매장용 독널은 입구 부분이 넓게 벌어지고 어깨 부분이 돌출되었으며, 바닥은 비교적 뽀죡한 형태다. 독널 2개를 눞혀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3개를 사용하기도 했다.

독널은 다른 토기보다 월등히 크다. 독널 제작에 쓰인 흙도 일반토기와 다르다. 일반토기는 고운 점토를 사용하거나 입자가 1mm 이내의 고운 흙을 사용하는데 비해 독널에는 3mm가 넘는 굵은 입자가 포함되어 있다. 입자가 굵은 흙은 성형후 말리는 속도를 빠르게 하며 가마에서 구울 때 잘 깨지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나주고분의 독널은 우리에게 고대 마한의 숨은 얘기를 전해준다. 독널에는 고대인들이 쓰던 생활용품에서 흙을 다루는 기술, 죽은 사람들의 부장품, 영원을 바라는 기원까지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영산강 일대에 세력을 떨치던 마한인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3~6세기 옹관묘 분포도 /전라도천년사
3~6세기 옹관묘 분포도 /전라도천년사

 


<참고한 자료>

아시아의 독널문화, 2019, 국립나주박물관 

영산강유역 옹관묘의 장제와 피장자 검토, 김은정, 2021, 호남고고학보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2021, 홀리데이북스

전라도천년사 3(선사고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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