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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서에서 기록된 내용이 영암의 전설과 합쳐져 재창조 과정 거쳐
왕인 박사는 어떻게 부활했나
2023. 11. 19 by 김현민 기자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는 왕인(王仁)의 전승은 일본서기 등 일본의 사서에 근거한다.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왕인에 대해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전남 영암에서는 왕인 유적지가 지정되고, 해마다 봄에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이 의문의 왕인 박사를 추적해 본다.

왕인박사 /영암군청
왕인박사 /영암군청

 

일본서기 응신천황(應神天皇) 15년 기사엔 이렇게 쓰여 있다.

백제왕이 아직기(阿直伎)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그것을 마굿간에서 기르게 하고, 아직기로 하여 사육을 관장하게 했다. 아직기는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더 나은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기가 대답하기를, “왕인(王仁)이란 이가 있습니다. 저보다 빼어납니다.”라고 했다. 천황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데려오게 했다.“

왕인은 응신천황 16년에 일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엔 ”16년 봄 2월 왕인이 왔다. 이에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태자는 여러 고전과 문적을 왕인에게 익혀 통달치 못할 게 없었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만들어졌다. 그보다 8년전인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에도 왕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백제국 초고왕(照古王)이 한 쌍의 말을 아치키시(阿知吉師)에게 바치게 했다. 또 검과 거울을 바쳤다. 천황이 백제에 현명한 이가 있으면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 명에 따라 온 사람이 와니키시(和邇吉師)이다. 이 때 논어 열권과 천자문 한권 도합 열한권을 함께 가져와 바쳤다.“

 

고서기의 和邇가 일본서기엔 王仁으로 바뀌었다. 일본어 발음은 둘다 와니. 8세기초 일본사서에 한문학을 전달했다는 사람의 성명이 달리 표기된 것은 그 당시 일본지식층이 한자에 익숙치 않았음을 반증한다.

응신 16년은 일본서기 연대로 서기 285년이고, 일본서기의 오류를 보정해 120년을 더하면 405년이 된다. 후대에 널리 통용된 천자문은 6세기에 양()나라 주흥사(周興嗣)가 만들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된 시기는 8세기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서울여대 문동석 교수는 왜국에 유교문화가 전해진 시기를 당기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했다. 일부에선 3세기에 위나라의 종요(鍾繇, 151~230)가 만든 천자문이 있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이에 문동석은 종요의 천자문은 그 존재를 입증할 근거가 취약하다고 했다.

 

영암 왕인박사마을 /한국관광공사
영암 왕인박사마을 /한국관광공사

 

그런데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왕인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조선 후기까지 왕인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1472(성종 3) 신숙주는 일본을 다녀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편찬하면서 왕인은 언급하지 않고 응신(應神) 16년에 백제 태자가 왔다고만 기술했다.

선조실록 37(1604) 323일자에서 일본 승려 현소(玄蘇)가 보내온 편지를 인용하면서 응신제(應神帝) 때에 이르러 백제국에 박사(博士)를 구하여 경사(經史)를 전수하니 귀천이 없이 중국 글을 익혔다고 했다. 이때도 왕인의 이름은 없었다.

최초로 왕인이 언급된 것은 1655년 남용익이 을미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쓴 부상록(扶桑錄)이다. 남용익은 그 견문록에서 응신왕 갑진년에 백제가 경전과 여러 박사를 보냈고, 을사년에 왕인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후 신유한의 해유록(1719), 원중고의 화국지(1763) 등에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재개되고 150여년간 일본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결과로 해석된다.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왕인묘 /위키피디아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왕인묘 /위키피디아

 

일본에서는 왕인 전승이 속일본기, 고금화가집 등의 저술을 통해 확장되고, 이들 전승은 왕인의 도일 과정과 도일 후의 활동, 도일 배경, 그리고 왕인의 조상과 후예에 대해 보충되었다.

왕인의 존재가 부각된 결정적 계기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왕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하라카타시에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높이 1미터 정도의 자연석이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니바카(オニ墓)’ 즉 귀신무덤이라고 불렀고, 여기에 대고 기도하면 치통이나 학질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유학자 나비카 세이쇼(竝河誠所)1734년 교토, 오사카, 나라 등 기내(畿內) 다섯 지역에 관한 지방지 일본여지통지기내부(日本輿地通志畿內部)를 편찬하면서 오니바카라는 바위가 원래는 왕인(와니)의 무덤인데 그 말이 변해서 오니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나비카 세이쇼는 한발 더 나아가 지방 영주에게 왕인의 묘에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해서 박사왕인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이 바위 뒤에 새워지게 되었다.

나비카 세이쇼는 와니오니의 발음이 유사한데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616년에 작성되었다는 왕인분묘내조기(王仁墳廟來朝紀)라는 문서를 들었다. 그 문서에는 왕인이 죽자 그의 후손인 가와치노후미(河內文) 가문이 시조 왕인의 무덤을 가와치(오사카부 일대)에 조성했고, 이것이 오니의 무덤으로 와전되었다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비카 세이쇼가 읽었다는 왕인분묘내조기는 사료 근거가 전혀 없다는 최근 연구 성과가 나왔다고 한다. 문동석에 따르면, 이 문서는 와다데라(和田寺)라는 사찰에 전해져 오던 것이 아니며, 근대에 들어 같은 지역 주민이 입수한 물건이라고 한다. 게다가 문서에 등장하는 도슌(道俊)과 니시무라(西村) 가문도 후세가 유력한 가문처럼 꾸미기 위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존재일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후 메이지 시기에 왕인의 묘역이 확대정비되었다.

 

영암 왕인문화축제 /한국관광공사
영암 왕인문화축제 /한국관광공사

 

우리나라에서 왕인 전승은 영암 출생설이 변용되는 과정을 거쳤다. 일본 문헌에 왕인이 영암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으며, 한국 고문서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왕인의 영암출생설은 일제시대 나주 영산포 본원사(本願寺) 주지였던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에서 시작된다. 193257일 아오키는 박사왕인동상건설목논견‘(博士王仁銅像建設目論見)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영암 구림(鳩林)은 왕인의 옛터(舊地)라고 주장했다.

일승(日僧)의 주장은 내선일체 정책과 결합되었다. 왕인은 일본과 조선이 오랜 과거부터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한편 왕인이 태어났다는 영암 구림리는 신라말기에 활동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출생지와 동일하다. 왕인이 마셨다는 우물 성천(聖泉)은 도선국사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왕인과 도선이 중첩된 영암 성기동의 설화와 지명은 고고학 유적에서 서로 시기가 다른 문화층이 상하로 중첩된 것과 마찬기지이므로, 왕인층과 도선층을 나누어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문동석은 왕인의 영암 출생설은 근거가 불충분하며, 근래에 이르러 왕인을 부각시키면서 도선과 관련된 설화와 유적을 결합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시기적으로도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285년 또는 405년에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다. 그 시기에 영산강 유역엔 마한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입증되고 있다. 왕인이 영암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마한인일수도 있다는 것이다.(임영진)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왕인은 잊혀졌다. 그러다가 1972년 농민운동가이며 국회의원이었던 김창수가 왕인연구소를 설립하고 자료를 모아 왕인을 부각시켰다. 그는 영암 일대에 왕인에 관한 유적과 전설이 많다는 내용을 전해듣고 구림리 성기동이 왕인의 탄생지라고 제기했다. 이후 영암군은 왕인을 지역의 이벤트 인물로 삼아 1992년부터 왕인문화축제를 열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왕인, 만들어진 영웅”, 문동석, 일본어문학회, 2023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2020, 홀리데이북스

왕인전승의 탄생과 고대의 왕인인식”, 정태욱, 2014, 일본언어문화

완역 일본서기, 일지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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