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2월 혁명 후 1849년에 유럽 통합 제안…관세 폐기, 단일 화폐 등 주장
170년 전, 유럽합중국 제창한 빅토르 위고
2023. 11. 20 by 김현민 기자

 

빅토르 위고는 우리에게 소설 레미제라블로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그가 소설가 이외에도 자신의 이념을 실천에 옮긴 정치인이었고, 170년 전에 유럽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Europe)을 제창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믈 것이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자유화의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이듬해 8월 파리에서 국제평화회의가 열렸다. 의장을 맡은 위고는 개막연설에서 하나의 유럽을 만들어 전쟁 가능성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루앙과 아미앵 사이,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전쟁이 불가능하듯이 언젠가 파리와 런던 사이, 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사이, 빈과 토리노 사이의 전쟁도 상상하기 어려운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날 노르망디, 브르타뉴, 부르고뉴, 로렌, 알자스, 우리의 모든 지방들이 프랑스 속으로 용해되었듯이 언젠가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각각의 특징과 훌륭한 백성들을 간직한채 상위의 통일체 속으로 용해되어 유럽의 우애를 조직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전수연 프랑스의 죽음과 변용에서 인용)

 

빅토르 위고 초상화(1876) /위키피디아
빅토르 위고 초상화(1876) /위키피디아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가 염두에 둔 유럽은 미 합중국이었다. 그는 미국 13개 주가 영국 왕을 내쫓고 공화국이 되었듯이 유럽 국가들이 왕정 또는 제정을 타도하고 유럽 합중국을 만들어 평화를 공존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1849년에 제창한 유럽 합중국은 그가 처음 사용한 용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명망 있는 작가이자 정치인이 사용한만큼 유럽합중국은 위고의 작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위고는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보궐선거에 뛰어들어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185112월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그는 벨기에로 피신해 나폴레옹 3세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그는 벨기에에서도 추방되어 프랑스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령 건지섬으로 망명을 갔다.

그는 유럽 합중국의 전제는 왕정타도라고 보았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망명생활은 프랑스인에 머물던 위고를 진정한 유럽인으로서 자각케 했다. 망명은 유럽이라는 넓은 조국을 보게 했다. 그는 건지에서 유럽 전역의 민주주의자로부터 존경을 받있고,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문제에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망명지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해 나폴레옹 3세가 폐위된 1870년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다.

하지만 정치현실은 그를 실망케 했다. 프로이센(독일)은 프랑스에 굴욕감을 주었다. 위고는 187131일 의회 연설에서도 다시 유럽 합중국을 언급했다. 그는 독일에 의한 굴욕적인 평화는 더 큰 전쟁을 불러 일으킬 뿐이며, 이는 앞으로 건설할 유럽 합중국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곧이어 파리에서 코뮌이 수립되고 두어달 만에 분쇄되었다. 그 와중에 코뮌군 2만명이 사망하고 수만명이 체포되고 7,000명이 추방되었다. 파리의 다리는 피로 물들었다. 빅토르 위고는 코뮌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가담자들의 가혹한 처벌엔 반대했다. 그는 또다시 냉대를 당했고, 예전 망명지인 건지섬으로 떠났다.

그후 다시 귀국해 1876년에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지만,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정계에서 은퇴했다. 말년에 그는 국부로 추앙받았다. 1881226,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885522일 사망했을 때 프랑스 정부는 국장을 선포했다. 61일 장례식은 개선문을 통과해 장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팡테옹에 모셔졌다.

 

위고가 죽은 후 새로운 세기에 유럽은 두차례의 대전을 치렀다.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르고 나서 유럽인들은 유럽연합 구성에 합의했다. 위고는 100년전부터 유럽연합을 구상하고 예견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 통합의 축이 되어야 하고, 유럽 내 관세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로운 소통이 통합의 필수요건이며 유럽은 단일 화폐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예언은 긴 세월이 흐른 후 실현되었다. 오늘날 유럽인들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Victor Hugo 

The New Federalist, 170 Years since Victor Hugo’s speech about the ‘United States of Europe’ 

전수연, 프랑스의 죽음과 변용: 빅토르 위고 (인물로 본 유럽통합사, 201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