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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석탄철강위원회 설립 주도…유럽 초국가기구 설립과정에 현실적으로 대처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
2023. 11. 26 by 김현민 기자

 

2차 대전은 유럽이 2류로 추락하는 분기점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독일은 소련과 미국에 점령당했다. 영국은 전승국이었지만 전쟁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유럽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스스로 파멸을 초래했다. 국가들 사이엔 상대국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통합을 구상한 사람이 있었으니, 프랑스의 관료 장 모네(Jean Monnet, 1888~1979). 그는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불린다.

2차 대전은 교전국들이 1차 대전의 앙금을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프랑스는 독일을 가혹하게 처리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이용해 집권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전쟁은 전쟁을 불렀다. 원한을 가라앉히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다른 전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전후 모네의 목표는 이 지점에 있었다.

 

장 모네 /위키피디아
장 모네 /위키피디아

 

그는 1888년 코냑으로 유명한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코냑 공장 소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업을 하는 집안이어서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물려 받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국에 건너 갔다 온 후에 아버지 회사의 대외업무를 맡게 되었다.

19141차 대전이 발발하자 통상부 장관이었던 아버지의 친구 에티엔 클레망텔의 소개로 연합군 군수물자 조달기구의 프랑스측 대표를 맡게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그는 유럽국가간 협력을 토대로 한 신경제질서 구상을 클레망텔에게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1920년 국제연맹이 창설되자 그는 31살의 나이에 사무부총장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국제연맹 간부로서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실레지아와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 자르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민족주의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3년 그는 국제연맹을 떠났다.

그후 미국 투자회사와 중국 개발회사를 전전하다가 2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의 쓰임새를 알아본 것이다.

1943년 모네는 루스벨트의 특명을 받고 프랑스령 알제리로 갔다. 저항운동을 주도한 샤를 드골과 앙리 지로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라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고집이 센 드골을 기피했다. 모네는 드골의 리더십을 인정해야 한다고 루스벨트를 설득했다.

알제리에서 모네는 전후 유럽 해결책을 구상했다. 그의 전후 구상은 평화 정책, 유럽 연방 창설, 독일 인정, 경제통합 우선으로 요약된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모네는 적국인 독일을 포용할 준비를 했다. 1차 대전 후 프랑스는 독일을 지구상에서 지우려고 했다. 자르 지역을 점령해 석탄을 거져 가져갔다. 영구히 갚지 못할 양의 배상금을 물렸다. 독일은 배상금을 갚기 지폐를 찍어냈고,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 때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독일사람들을 자포자기로 몰아 넣었다. 나치를 등장하게 한 원인을 프랑스가 제공한 것이다. 모네는 이 시행착오를 다시 범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고 모네는 독일을 인정하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대등한 관계의 유럽 연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문서를 만들어 드골을 찾아 갔다. 드골은 독일과 함께 하는 유럽에 회의적이었다.

모네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가다가 장애가 생기면 돌아갈줄 알았다. 또 때가 이르지 않아 진척되지 않을 땐 기다릴줄 알았다. 그는 철학자도, 사상가도, 정치인도 아니었다. 관료로서 현실에 맞게 목표를 추진하는 게 그가 해오던 일이었다. 그는 유럽통합이란 생각을 정치운동으로 이끌어가지는 않았다. 다만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유럽석탄철강위원회(ECSC) 회원국 /위키피디아
유럽석탄철강위원회(ECSC) 회원국 /위키피디아

 

전쟁터가 되었던 프랑스는 전후 복구가 시급했다. 1946년 프랑스 정부는 현대화 정책을 수립해 추진했다. 그 핵심에 자동차공업의 육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질 좋은 강판의 구입에 달려 있었다. 철강산업 육성이 필요했다. 경제기획위원이었던 모네는 현대화 정책의 추진을 관장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패전 독일의 경제를 부흥시켜 서방 진영의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다. 미국은 서독에 군사력을 보유하게 하고, 산업시설에 대한 제한조치를 풀려고 시도했다. 모네는 유럽주의자이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이익을 우선 고려했다. 그에게 유럽연방은 프랑스의 외연적 확장이었다. 냉전의 격화로 독일 산업의 규제가 풀리면 프랑스의 타격이 컸다.

모네는 전후 프랑스의 산업현대화를 위해 석탄, 철강, 시멘트, 전기, 철도, 농기계 산업의 성장전략을 짰고, 이를 모네 플랜(Monnet Plan)이라 했다.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철강이 소요되었다. 19491,000만톤의 철강이 필요했고, 그 양은 점점 늘어나 19511,200만톤, 그 이후엔 1,500만톤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중소 철강회사 177개를 통폐합했다.

문제는 제철소의 원료인 석탄 공급이었다. 연간 8,500~9,500만톤의 석탄이 필요한데 국내 생산으로 6,000톤을 공급할수 있었다. 3,000만톤 가량을 헤외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영국은 수출여력이 없었고, 멀리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미국 석탄은 코스트가 높았고 독일 석탄보다 질이 낮았다. 독일 석탄을 쓰는 게 해결책이었다.

모네는 독일 산업에 대한 규제를 해제해 생산되는 석탄을 함께 쓰는 방안을 검토했다. 1차 대전 후 자르 탄전의 해법은 분쟁을 격화시킬 뿐이었다. 그의 생각은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을 막는 전후 처리의 문제와도 관련성이 있었다. 그는 석탄과 철강을 단일 시장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과거 전쟁 무기를 만들던 소재를 산업 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구상은 모네가 짰고, 발표는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이 했다. 195059일 슈만 계획이 발표되었고, 이 계획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 6개국이 동의했다. 패전국 독일은 유럽 사회에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도 자국 석탄과 철강을 내줄 용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석탄철강위원회(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가 탄생했다. ECSC는 오늘날 27개 회원국의 유럽연합(EU)로 발전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되었다.

 

1953년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를 접견하는 모네 /위키피디아
1953년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를 접견하는 모네 /위키피디아

 

ECSC는 각국 의회 비준을 얻어 1952년 가을에 출범했다. 본부는 룩셈부르크에 두었다. 모네는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유럽석탄철강위원회의 결정방식은 다수결이었고, 특별결의는 3분의2로 결정되었다. 1=1표의 국가간 대등주의가 실현되었다.

위원회는 초국가단체였다. 위원회가 조직된 후 달라진 것은 그전에는 각국이 먼저 결정해 관련국에 통보했으나, 이후엔 위원회에서 먼저 논의해 그 결과에 따라 각국에서 집행했다는 사실이다. 개별국가의 결정보다는 초국가적 합의가 존중되는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모네는 ECSC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는 동안에 한발 더 나가 초국가적 방위공동체인 유럽방위위원회(EDC, European Defence Community)를 추진했으나 그의 모국 프랑스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우측의 드골주의자들은 자국 군대가 없을 경우 식민지 경영이 어렵다고 반대했고, 좌측의 공산당은 소련을 의식했다.

1955년 모네는 ECSE 집행위원장을 퇴임하고 민간에서 유럽통합운동을 벌였다. 그는 유럽합중국을 위한 행동위원회(Action Committee for the United States of Europe)를 결성해 초국적인 유럽통합운동을 벌였다.

모네의 유럽통합은 미국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두 번의 전쟁으로 서유럽 문명은 몰락했다고 보았고, 미국과 협력해 서양세계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차 대전 이전에 영국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던 그는 2차 대전 이후엔 미국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는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의 유럽 참여는 반대했다. 그가 추구한 연방은 미국의 엄호 하에 유럽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1979320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88119일 프랑스정부는 위인들을 안장하는 판테옹으로 이묘했다.

 


<참고한 자료>

초국가 유럽의 산파, 장 모네”, 김승렬(인물로보는 유럽통합사, 2010, 책과함께)

양차 세계대전 시기 장 모네의 유럽평화 구상, 김유정(세계대전과 유럽통합구상, 2020, 책과함께)

Wikipedia, Jean M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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