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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오사카에 쌀거래소 만들어 가격 결정, 선물거래 등 선도…후에 선물거래소로 탈바꿈
에도시대 세계최초로 선물거래 이끈 요도야
2019. 08. 01 by 김현민 기자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江戶) 시대에 요도야(淀屋)라는 거상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거상을 호상(豪商)이라 불렀다. 오사카(大坂)에서 쌀 거래소를 열어 엄청난 부()를 일구었으며, 오사카를 천하의 부엌’(天下台所)라 불리게 한 주역이다. 부엌에는 집에서 가장 많은 가사도구가 밀집해 있는데, 일본 전국을 집()에 보고 오사카를 부엌으로 비유한 것이다.

요도야는 전성기에 총자산이 20억량()이었는데, 이는 현재 일본 돈으로 200조엔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국돈으로 계산하면 2,000조원으로, 정부 1년치 예산의 4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요도야 가문은 어떻게 어마어마한 부를 형성했을까. 그 배경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지방의 260개 번()을 지배하기 위해 실시한 산킨고타이(參勤交代) 제도에 있었다.

에도시대에 전국의 각 번()이 세금으로 걷어들인 연공미가 오사카에 집중되었다. 1620년 기준으로 일본의 전국 쌀 수확량이 약 2,700만석이었는데, 이중 인구가 먹고, 세금을 낼 분량을 제외하면, 500만 석의 여유분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그중 40%200만석이 오사카에서 거래되었다고 한다.

산킨코타이 제도는 지방 다이묘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막부의 수도 에도에 근무하게 의무화했는데, 이 때문에 지방영주들은 본인과 수행원들의 에도 출장과 거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쌀을 오사카 시장에다 내다 팔아야 했다.

에도 초기에 쌀 시장은 가격이 일정치 않았다. 쌀거래 중매인들이 무질서하게 난립했고, 쌀의 양이나 질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브로커들의 농락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요도야는 여기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는 에도 막부에 쌀값 안정을 위해 쌀 거래소를 만들 것을 청원해 허가를 받았다. 요도야는 자신이 직접 개발한 오사카 나카노시마(中之島)에 쌀 거래소를 만들어 시장 가격에 의해 쌀 가격을 책정했다. 쌀 시장은 당대 일본 경제의 최대 구성요소였으므로, 이를 통해 시장경제가 도입된 것이다. 요도야가 연 쌀 시장의 가격은 인편 또는 신호 등을 통해 전국에 확산되었고, 오사카 쌀 가격은 전국 가격으로 통일되었다.

 

요도야(淀屋)의 비 /위키피디아
요도야(淀屋)의 비 /위키피디아

 

요도야의 창업자이자 1대 당주(當主)는 요도야 죠안(淀屋常安)이다.

그는 천하동란의 시대에 권력의 변화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는 일본 중부 야마시로구니(山城国)의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적폐 상인으로 찍혔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집권하자, 그는 신흥세력에게 붙었다. 토요토미가 전투를 위해 교토 인근 후시미성(伏見城)을 개축했는데, 성 건축 과정에서 커다란 돌을 제거해야 했다. 많은 토목업자들이 망설이는 가운데, 죠안은 10분의1 가격으로 입찰에 성공했다. 그는 돌 옆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돌을 밀어 넣음으로써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 그의 기지에 도요토미가 감탄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거상의 첫걸음을 디뎠다.

도요토미가 죽은 후에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섰다.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그는 도쿠가와 진영에 물자를 대고 식량을 공급했다.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의 잔당을 물리친 후에 죠안은 전사자 가족 부양과 무기 처분의 권한을 부여받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1930년대 오사카 나카노시마 /위키피디아
1930년대 오사카 나카노시마 /위키피디아

 

죠안은 오사카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목재상을 했으며, 1609~1614년에 오사카 도심을 흐르는 규요도강(旧淀川) 사이에 길고 좁게 형성된 6,000평의 모래톱을 간척해 나카노시마(中之島)를 만들었다. 그는 그곳을 서울의 여의도처럼 뉴타운을 만들어 1620년에 막부의 허가를 받아 쌀 거래소를 열었다. 일본 전역의 쌀이 그의 거래소로 몰려들었다. 그는 나카노시마에 135동의 쌀 창고를 지어 그곳에 쌀을 저장해 놓았다.

그가 연 쌀 거래소에서는 쌀이 직접 거래되지 않고, 매매가 성립되었다는 증거로 물표가 건네졌다. 그 물표는 어음의 시초다. 요도야의 쌀 시장은 공식적인 상품거래소가 생기기 이전의 역할을 했다.

요도야는 쌀 거래에서 오늘날의 선물투자의 개념을 도입했다 가을에 흉년이 예상될 경우에는 쌀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해 물표를 많이 확보해, 추후에 받기로 약정된 쌀을 받아 이익을 얻는다. 반대로 풍년이 예상될 경우에는 쌀 가격이 급락할 것으로 판단해 가지고 있는 물표를 미리 팔아버리는 것이다. 이같은 방식으로 요도야의 쌀 거래소는 1대 당주 죠안에서, 5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1697년에 요도야 쌀시장은 나카노시마의 건너편에 만들어진 도지마(堂島)로 이전한다. 도지만에서는 쌀의 현물 거래만 취급되었다.

2대 당주인 겐토(淀屋言當)는 청과물 가게를 열었고, 선착장에 건어물 상회도 열었다. 요도야는 당시 오사카의 3대 시장이라던 쌀, 청과물, 어물 시장을 모두 장악했다. 후임 당주들은 비단의 원자재인 생사(生糸) 거래에도 뛰어들었고, 해운사업에도 참여했다.

 

요도야바시 /위키피디아
요도야바시 /위키피디아

 

하지만 요도야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번창하자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요도야에서 돈을 빌린 다이묘들은 사농공상의 계급질서에서 말직인 장사꾼에게 체면이 많이 깎였다. 게다가 돈을 갚지 못한 영주들은 부채 상환의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고, 막부와 다이묘로 구성된 일본 지배계급에서 요도야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 졌다.

5대 당주 고토(淀屋廣當)가 가업을 계승해 22살이 되던 1705, 드디어 막부는 요도야에 대해 폐업(闕所) 처분을 내렸다. 막부가 내세운 공식 명분은 상인이 분수를 넘어 호사스럽게 사는 것이 눈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여러 다이묘들이 요도야에 빌린 빚을 탕감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막부도 요도야에서 몰수한 재산으로 부족한 재정을 메웠다.

이때 요도야에서 몰수된 재산은 금 12만량(), 125,000(), 1만평 짜리 저택과 토지 2만평, 기타 목재, 선박, 다수의 미술고예품등이다. 또 요도야가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대출한 돈이 은 1억관에 달했는데, 지금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100조엔(1,000조원)의 부채가 탕감되었다.

요도야의 재산을 몰수한후 1730813일 도쿠가와 막부는 요도야의 쌀시장이었던 도지마에 쌀거래소를 허가한다. 도지마쌀거래소(堂島米会所)는 세계에서 최초로 공인된 선물시장으로 공인되고 있다. 영국금속거래소는 1877, 미국의 시카고상품거래소는 19세기초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요도야 가문은 영악했다. 혹여 막부가 폐업처분하더라도 살아갈 방도를 준비해 두었다. 그들은 일본 서해안(동해) 호키노구니(伯耆国)의 쿠라요시(倉吉)에 몰래 가게를 하나 열어 돈을 빼돌려 두었다. 요도야가 폐업된 이후 그 후세대가 이 곳에서 사업을 벌여 오사카 땅으로 돌아와 다시 부흥했다. 폐업처분 이전을 요도야 전기, 폐업 이후를 후기라 한다.

요도야 후손들은 완전히 망한 후에도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상술과 상혼을 활용해 재기에 성공했다. 후기 요도야 세대의 상업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막부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드러내거나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도야 가문은 막부 말기에 막부 토벌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천황에게 헌상하고, 그 막을 내렸다.

에도 시대에 사업을 시작한 많은 거상들이 아직도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다.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가는 오늘날 재벌(자이바츠)로 성장해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요도야는 빈손으로 시작해 에도시대 최대의 상인이 성장한 풍운의 상회였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요도야가 만든 쌀거래소는 선물시장을 선도해 구미보다 먼저 상품경제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사카는 물의 도시다. 그 도시에 요도야(淀屋)의 이름이 곳곳에 남아 있다. 나카노시마의 여러 다리 가운데 요도야바시(淀屋橋)와 죠안바시(常安橋)가 그것이다.

 

도지마 쌀거래소의 기념비 /위키피디아
도지마 쌀거래소의 기념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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