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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진상, 표호라는 금융회사 만들어 환거래…청말기 대변란으로 몰락
명·청기, 중국 상권 휘어잡았던 진상·휘상
2019. 08. 06 by 김현민 기자

 

중국은 상인의 나라로 불린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장사치들이 번성했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중의 하나가 상업이 발달한 중국이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상업을 천시하던 한국이 자본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던 시기에 중국 명·(明淸)시기에도 상업이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 전국에 10개의 대형 상방(商幇)이 나타났는데,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세 군데다. 진상(晋商), 휘상(徽商), 조상(潮商)이 바로 그들이다.

 

명청기에 중국의 대표적인 상인은 진상이다.

진상(晋商)은 진()나라 상인이라는 뜻으로,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 영토였던 오늘날의 산시(山西)성을 본거지로 하기 때문에 진상 또는 산서상인이라고도 했다. 산서 지역은 중원의 일부이지만, 지정학적 위치로는 흉노, 몽골등의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계지역이었다. 늘상 북쪽 오랭캐와 전쟁이 벌어졌고, 북쪽에 위치해 겨울이 빨리 오고, 농사가 척박한 땅이었다. 이런 지리적 악조건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상인집단을 출현케 했다. 상업을 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고장이라는 절박감이 주변 지역의 물자를 중매하는 장사꾼들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진상의 뿌리는 진()나라때 여불위(呂不韋), ()나라 때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으로 거슬러 간다.

진상은 산서성의 풍부한 소금, , 보리, , , , 목재, 담배등의 특산을 활용해 장거리무역을 하였으며, 강남의 비단, , 쌀을 다시 서북, 몽고, 러시아 등에 가져다 팔았다. 산서는 장거리무역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표호(票號)라는 금융회사를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산서지역은 법가의 전통이 강했다. 춘추전국 시대에 법가사상의 토대를 이룬 신도(愼到), 상앙(), 신불해(申不害), 한비자(韓非子) 등이 진()에서 갈라져 나간 한((() 출신이다. 법가의 사상은 이념과 예절보다는 현실과 중용(中庸)을 중시했고, 이런 전통이 진상의 사고에 스며들었다.

진상은 남다른 지혜와 재능을 발휘했다. 그들은 지역적 연고와 동향 관계를 끈으로 해서 상방(商幇)을 조직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대함, 같은 것을 추구하고 다름을 남겨두는 구존동이(求同存異)의 정신, 근면함을 생활신조로 삼는 자강불식(自强不息), 협동정신, 진취적 개척정신을 발휘했다.

 

진상 일승창(日昇昌) 표호에 청 황제가 내린 회통천하(匯通天下) 편액 /위키피디아
진상 일승창(日昇昌) 표호에 청 황제가 내린 회통천하(匯通天下) 편액 /위키피디아

 

진상의 전성기는 명청(明清) 500년간이었다. 그들은 염업(소금), , 상품 및 화물 운송 등 유통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금융기관의 일종인 표호(票号)를 운영하며 금융산업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진상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말에 이르는 기간에 표호를 운영함으로써 중국 상업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중국 상업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무거운 금속화폐()를 직접 운반하며 상거래를 하던 시기에 진상들은 표호를 통해 환어음을 교환하고 여신과 송금업무를 운영했다. 서양에 비해 뒤늦었지만, 중국 사회에서 자생적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발달하는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표호는 환어음을 주로 하는 개인금융기관으로 송금업무 등을 대행해 이윤을 챙겼다. 최초의 표호는 핑야오(平遥)현의 일승창(日升昌) 표호이며 당시 전국 51개 표호 중 진상 소유가 43개에 달했다. 가장 성공한 표호는 치현(祁县)의 합성원(合盛元)으로 1907년 합성원(合盛元) 표호는 일본의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 에도 및 조선의 신의주 등지에 표호를 설립하고 금융업무를 함으로써 중국 최초의 국제 금융기관으로서 면모를 보였다.

진상의 표호는 청나라 황실에서도 인정해 대표적 진상인 일승창(日昇昌)회통천하’(匯通天下)라는 편액을 내리기도 했다. 금융망이 천하를 돌고 돌아 통하라라는 내용이다.

 

중국 산시(山西)성 진중(晉中)시에 있는 진상의 건축물 상가장원(常家莊園) /위키피디아
중국 산시(山西)성 진중(晉中)시에 있는 진상의 건축물 상가장원(常家莊園) /위키피디아

 

진상은 풍부한 건축유산을 남겼다.

장예모 감독이 만든 공리 주연의 홍콩영화 홍등’(Raise The Red Lantern, 1991)은 부유한 진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배경으로 나오는 교가대원(喬家大院)은 청나라 때 부상의 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외에도 상가장원(常家莊園), 조가(曹家) 삼다당(三多堂) 등도 현재 남아있는 진상의 건축물이다.

산서성 도처에는 진상들의 저택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만해도 1,000여채가 된다. 핑야오(平遥)의 고성과 구시가지에 남아있는 표호 유적지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곳에는 중국 상업의 역사를 확인하기 위해 국내외의 많은 관람객이 내방하고 있다. 미국의 한 작가는 표호의 본거지를 중국의 월스트리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중국엔 세상에 참새가 날아가는 곳이면 산서상인(진상)이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 있다. 진상의 물류와 금융 네트워크는 중국 내지는 물론 러시아,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조선, 일본, 그리고 남양(南洋)에 이르렀다. 심지어 러시아의 짜르가 표호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청나라 말기인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운뒤 배상금을 요구하자 청나라 실세인 서태후(자희태후)가 진상의 교가(乔家)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했을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했다.

진상들은 청말 태평천국의 난, 백련교도의 난등 농민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 금고로 전락했고, 신해(辛亥)혁명 이후 쓰촨, 산시 등지에서 전쟁 발발과 습격 등으로 신용도가 급락하는 표호의 신뢰도가 급락하고 대규모의 손실 및 자금인출 사태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국 휘상이 운영하던 염전 /위키피디아
중국 휘상이 운영하던 염전 /위키피디아

 

휘상(徽商)은 안후이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 지역에 적을 둔 상인을 말하며, 신안(新安)상인, 휘방(徽帮)이라고도 했다. 휘상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 조건에서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했다. 이들은 전국에 퍼져 소금, 면포(棉布), 양식(粮食), (), 문구필묵(文具笔墨) 등을 거래했다.

휘상은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녔다.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휘상 가문에서는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지만, 진상 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휘상을 유상(儒商)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진상과 휘상을 비롯해 중국 상인들은 청말 대변란에 몰락한다. 2차 아편전쟁 때 청불 연합군은 대운하 길목을 차단했고, 그 이후 운하길이 막혀버렸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전국토가 전란에 휩싸이면서 상업 활동도 어려워졌다. 일본 에도시대의 거상들이 나중에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 코노이케(鴻池) 등 재벌로 성장해 일본 산업화의 주역이 된 것과 차별화된다.

중국 상인들은 밀려오는 서양자본주의 방식을 이겨내지 못했다. 진상과 휘상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했다. 자신들이 축적한 자본을 확대 재생산하지 않고 벌어들은 돈을 은()으로 바꿔 쌓아두었다. 산업화한 서양에서 기계화하고 저렴하게 만들어진 제품들이 중국에 밀려 오면서 중국 상품들이 경쟁력을 잃게 되고 상인들도 설자리를 빼앗겼던 것이다.

진상의 표호의 경우 청 조정이 국영은행으로 호부은행(户部银行)을 설립하자 강력한 경쟁자와 싸워야 했다. 청 조정은 말기에 중국통상은행(中国通商银行), 저장흥업(浙江兴业), 사명(四明) 등 십 수개의 상업은행을 세워 진상의 표호를 위협했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의 상인은 몰락하고,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상업은 그 뿌리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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