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아시아위기
태국, 저금리 국제자금을 끌어 펑펑 썼다…경제 둔화에 개혁 지연하다 벼랑끝
[1997 바트화 폭락②] 태풍의 진원
2019. 08. 09 by 김현민 기자

 

19975월 해외 핫머니에 의해 태국 바트화가 공격을 당하자, 태국정부는 고이자율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방콕 주식시장에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태국 주식시장은 연초부터 31%나 빠졌다. 주식시장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은 큰 손해를 보았다.

태국 중앙은행은 크게 부상당하고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태국은 인접국의 통화를 약화시킬 전염병을 차단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수십억 달러가 시장에 묶여 풀리지 않고 있었다. 방콕 전투에서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뉴욕에서 방콕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들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재래식 통화전쟁은 누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오래 버티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투기꾼이 오래 버틸 것인가, 태국 중앙은행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 하는 싸움은 금새 판명이 났다.

태국 기업들은 외화 부채를 870억 달러나 보유하고 있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투기자들은 머지 않아 태국 중앙은행이 항복문서에 서명할 것으로 보고 또다시 방콕 공격에 나섰다.

 

1990년대 들어 태국은 철철 흘러 넘치도록 외국돈을 빌려 썼다. 탐욕스런 선진국 은행들은 마음껏 돈을 빌려줬다. 몇 년째 연간 성장률이 8%를 기록해 신화를 창출하는 나라에 높은 금리를 보장하는 수익처에 돈을 붓지 않는 선진국 뱅커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태국 금융기관의 대출 관행이나 기업의 거래관행이 서구식 합리성과 투명성이 보장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외국 뱅커들은 태국 은행과 기업에 마구잡이 식으로 달러를 퍼붓다시피 했다. 1997년초까지 외국 은행들은 70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태국에 빌려주었다.

1997년 초만 해도 태국 경제는 희망적이었다. 한해전과 같이 성장 일변도의 경제를 구가할 것 같았다. 1996년 성장률이 6.7%95년의 8%보다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태국인들은 수년간의 고도성장에 대한 일종의 조정 과정으로 여겼다.

태국인들은 달러를 흥청망청 써댔다. 국내 사채시장 금리는 18%의 고금리였는데 비해 달러 이자는 7~8%에 불과했고, 엔화 이자는 그보다 쌌다. 금융기관들은 외국돈을 빌려와 국내 기업에 빌려주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손 짚고 헤엄치기식장사를 했다.

태국 은행들도 기업들에 돈을 물씬 빌려주었다. 태국 기업들은 고층빌딩을 짖고, 호화아파트를 짓는데 달러를 흥청망청 써댔다. 그들은 얼마후 건물 비용이 건축비보다 떨어지고 바트화가 폭락, 달러가 그렇게 비싼 돈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97년 태국의 대외부채 /김현민
1997년 태국의 대외부채 /김현민

 

그러나 1996년말부터 선진국 은행들 사이에서 태국이 과연 해외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을지 걱정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삭빠른 일부 외국 뱅커는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해를 넘겨 972월 외국 자본이 부분적으로 철수함에 따라 달러 부족에 따른 바트화 하락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국제금융시장에 돌았다. 그들은 곧 바트화가 폭락할 것을 기대, 바트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였다. 그러나 바트화 폭락을 기대하고 본격적으로 덤벼든 것은 그해 5월 미국의 헤지펀드들이었다.

 

헤지펀드들이 공격을 감행하는데도 방콕 당국은 낙관적인 경제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자 주가는 폭락하고 외환 투기꾼들은 바트화 하락을 호시탐탐 노리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사업가들과 경제학자들은 태국의 부채가 정부가 인정하는 액수보다 많을 것으로 믿었다.

태국 기업의 악성 채무 또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기업들은 부채 상환을 하지 못해 부채 만기를 연장하거나 또다른 부채로 전환하는 리스케쥴링(부채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앙은행인 타일랜드은행이 5월말 경제성장 전망치를 당초 6.7%에서 5.9%로 하향 조정했다. 시속 100km로 달리던 자동차가 순간적으로 60km로 속도를 줄이는 과정의 저항감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987년부터 95년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8% 대의 성장률을 자랑하던 태국 경제가 수직 하강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됐다. 비관적 견해를 가진 경제학자들은 성장률이 3%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태국 정부는 부실 금융기관을 회생시키기 위해 구제금융을 잇달아 퍼부었다. 그 금액이 100억 달러에 이르렀고, 국내총생산(GDP)6%에 달했다.

태국 법정에는 부채 상환을 요구하는 소송이 줄을 이었다. 기업들은 연쇄부도에 시달렸다. 한 기업이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 그 회사에 돈을 빌려준 다른 기업도 같은 처지가 되고, 부도는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경제에 관한 한 좋은 소식이라곤 들을 수 없었다.

내리막길로 들어선 태국 경제엔 백약이 무효였다. 주력산업인 섬유와 신발 산업에서 1만여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경제 공황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싹텄다. 기업들이 이자도 갚지 못하는 바람에 이자 미상환비율이 4월말 현재 전년 동기 대비 27%나 늘어났다. 전문가들은 태국 금융기관들이 앞으로 1년반내에 6,000~8,000억 바트(233~311억 달러)의 부실 채권이 쌓일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부동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5월에는 태국 최대 전기 재벌 알파텍 그룹(Alphatec)이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와 합작키로 한 사업 2건이 무산됐다. 알파텍이 약속한 자금을 대지 못하자 미국의 파트너가 손을 뗐기 때문이다. 알파텍의 자회사인 서브마이크론 테크놀로지(Submicron Technology)도 자금이 달려 설비 공급자에 대한 대금은 물론 직원 봉급도 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기업인 알파텍은 만기가 돌아온 은행 부채 340만 달러를 연기했다고 발표했다.

군소 투자자들도 빚에 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주가가 96년 최고치에서 60%나 빠졌고, 주식투자에서 물린 돈만 해도 태국 전체로 40억 달러나 됐다. 태국 기업의 부채는 얼마나 되는지 정부도 몰랐다. 부실 채권은 곳곳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금융시장 전체가 과도한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방콕 시내 전경 /bankok.com
방콕 시내 전경 /bankok.com

 

그러면 태국의 비극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간접적 이유는 일본 엔화 절하다. 엔화는 199551달러당 80엔까지 강세를 유지했다가 그후 1년반만에 120엔대로 50%나 치솟았다. 태국은 달러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달러에 바트화를 묶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엔화 하락의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태국을 비롯, 동남아시아 지역은 엔화 경제권으로 분류된다. 값싼 엔화를 무기로 일본 제품은 동남아로 밀려들었고, 일본으로 가는 태국 제품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수입이 늘고, 수출은 줄어들었다. 그 효과는 무역적자 확대로 나타났다. 그 결과 태국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정 불안도 큰 요인이다. 정정불안 자체가 외국인투자자들의 철수 요인은 아니지만, 정부 당국자가 과감한 개혁을 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199612월 입각한 암누아이 와라완(Amnuay Varavan) 재무장관은 개혁성향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부 예산 축소, 은행 대출 규제 강화, 부실 은행의 인수 및 합병, 2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 등을 과감히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가 거꾸러지면서 그는 연립정권 내부에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야당은 사사건건 재무장관을 물고 늘어졌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부가가치세의 일종인 소비세 도입이었다. 소비세는 야당이 의회를 마비시키면서까지 강력히 반대했고,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제기됐다. 경제가 휘청거리자, 제조업자들은 소비세 부과를 연기할 것을 여당에 로비했고, 재계와의 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여권도 무작정 소비세를 밀어부칠수 없었다. 마침내 소비세 부과 법안은 내각에서마저 부결됐고, 그는 물러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