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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인종증오 노출…케판장, 마라탐과 연합해 저항
바타비야 중국인 대학살…건륭제는 모른척
2019. 08. 24 by 김현민 기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자바섬에 바타비야(Batavia, 현재 자카르타)를 건설할 때 중국인들을 데려다 썼다. 자바섬에 몰려온 중국인들은 대체로 푸젠(福建)성 출신이었다. 중국인 기술자들은 우대를 받았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지 자바인들을 통치하는데 대리인이 필요했고, 중국인들이 앞장서서 통치에 필요한 업무를 대행했다. 중국인들은 자바인들보다 부지런했고, 현지인과의 통역, 세금 징수대리, 중국과의 중개무역에도 동인도회사의 일을 대행해주었다. 바타비야 화교(華僑)들은 동인도회사로부터 사업권을 얻어 설탕제조업, 술 제조업, 무역업, 사채업, 요식업 등에 종사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들은 비타비야에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거주하면서 1740년대에 성내에만 1만명이 살았고, 성 외에도 많은 인구가 거주했다. 중국인들은 못된 짓도 많이 했다. 마약거래, 매춘, 밀수, 폭력 등을 일삼기도 했고, 실업자들은 갱단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데려온 중국인들이 점점 현지에서 경제를 쥐고 세력화해 나가자, 네덜란드인과 현지인의 불만이 높아갔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하층의 자바인들은 중국인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닌가 하며,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 자바섬 대부분을 통치하던 마타람 술탄국(Sultanate of Mataram)은 중국인들의 힘을 네덜란드인들을 쫓아내는데 활용하고 싶어 했다.

 

1780년대 바타비야 /위키피디아
1780년대 바타비야 /위키피디아

 

1730년대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이 너무 늘어났다고 보고, 적절한 인구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해외 추방이었다. 1740725일 동인도회사 바타비야 총독 아드리안 발체니에르(Adriaan Valckenier)가 의심스런 화교들을 실론(스리랑카)로 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인들 사이에 네덜란드인들이 배에 실어 도중에 바다에 내던져 버린다는 둥 온갖 억측과 루머가 돌았다. 돈 있는 화교들은 부패한 네덜란드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추방명단에서 빠졌다. 일부 중국인은 직장을 그만두고 숨어버렸다.

또다른 문제는 설탕가격 하락이었다. 바타비야의 설탕제조업 상당수가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노동자들도 중국인이었다. 당시 서인도 제도와 브라질에서 대량의 설탕이 생산되어 유럽에 공급되었기 때문에 설탕 가격이 1720년에서 1740년 사이에 절반으로 폭락했다. 설탕회사들이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고, 설탕회사에 근무하던 중국인들 사이에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바타비야 대학살 그림. 왼쪽은 중국인들이 네덜란드 병사를 죽이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네덜란드인이 중국인을 학살하는 장면. /위키피디아
바타비야 대학살 그림. 왼쪽은 중국인들이 네덜란드 병사를 죽이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네덜란드인이 중국인을 학살하는 장면. /위키피디아

 

사건의 발생은 중국인의 폭동에서 시작되었다. 1740107일 설탕공장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공장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폭도들은 그 일대를 수비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군인 50명을 살해했다.

동인도회사는 정규 병력 1,800명에 민병대까지 차이나타운에 파견하고, 중국인들에게 통행금지와 명절행사 취소를 명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무기를 모두 몰수했다. 부엌의 칼도 빼앗았다. 밤에는 촛불도 켜지 못하게 했다. 촛불이 중국인들의 신호가 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 학살은 109일부터 22일까지 자행되었다. 학살은 인종갈등에서 시작한다. 자바인들 사이에 중국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달아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그들이 먼저 화교들을 공격했다. 차이나타운이 불탔고, 많은 화교들이 살해당했다.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고, 임산부와 노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바인들의 중국인 학살에 동인도회사 군대가 가담했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화교 마을에 포를 쏘아댔다. 불타는 집에서 도망치던 중국인은 군인의 총에 죽었다. 병원에 치료를 받던 환자 가운데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끌려 나와 죽었다.

광란의 살인극은 동인도회사가 부추겼다. 동인도회사 위원회는 1013일 자바인이 중국인 머리 하나를 가져오면 2두카트(ducat)를 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우리는 오늘날 네덜란드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발체니에르 총독은 이중인격자였다. 그는 한편으로 화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면서도 수시로 네덜란드 군인들과 자바인들에게 강경진압과 약탈을 중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살인광들은 그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란은 중국인들이 거의 죽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중단되었다. 22일 발체니에르 총독은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하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내렸다. 사실 그의 지시에 의해 학살이 중단되었을까. 거의 대부분의 중국인이 살해되고, 남은 무리들이 도망친 뒤, 살인마들은 총독의 지시를 듣는척하며 광기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중국인이 보이면 살인을 서슴지 않았고, 바타비야 성곽 바깥에서 살인행위가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1740109일부터 22일까지 13일간 살해된 중국인을 1만명으로 추산한다. 살아남은 중국인 수는 600~3,000명이라고 추정된다.

 

네덜란드군의 포격으로 불타는 차이나타운 /위키피디아
네덜란드군의 포격으로 불타는 차이나타운 /위키피디아

 

당시 중국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였다. 청조(淸朝)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최전성기를 누렸다는 건륭제는 이 사건을 모른척했다. 청조는 군사적 개입은커녕, 네덜란드에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무역을 해서 얻는 이익을 저해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을까. 그게 몇푼 된다고, 자국민이 1만명이나 죽어나갔는데, 중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는 건륭제는 못본척 했을까.

청조는 해외 중국인은 보호할 필요가 없는 천조(天朝)의 기민(棄民)’이며, 박해받는 것도 자업자득이라고 매정하게 떨쳐버렸다고 한다. 1)

자카르타 치이나 타운에는 킴텍레(Kim Tek Le, 金德院)는 오래된 불교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초기인 1650년 중국 푸젠 사람들이 세웠는데, 1740년 중국인 대학살 과정에서 소실되었다가 생존한 중국인 후예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자카르타의 킴텍레 사원 /위키피디아
자카르타의 킴텍레 사원 /위키피디아

 

살아남은 중국인 가운데 케판장(Khe Pandjang)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동인도회사군과 그에 합세한 현지인들이 차이나타운을 무자비하게 공격할 때 화교들을 규합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인물인데, 극적으로 살아남아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바타비야를 탈출했다. 케판장은 자바섬 서쪽을 떠돌다가 세마랑(Semarang)이란 곳에서 도착했다. 그곳 주민들은 중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없었다. 케판장과 중국인들은 그곳에서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네덜란드인들의 잔인한 행동이 자바섬에 알려지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판장은 이들을 받아들여 군대를 만들어 지휘해 나갔다.

1741년 케판장이 중국인들을 다시 규합해 네덜란드에 대항하자, 그를 지지하는 왕국들이 나왔다. 자바섬의 최대 판도를 가졌던 마타람 술탄국은 중국인과 합세하기로 했다. 케판장은 세마랑은 물론 이웃 마을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그러자 동인도회사는 자바 섬에서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타람 술탄국의 일부 제후들이 네덜란드 편으로 돌아섰고, 마타람의 술탄도 케판장과의 동맹을 깨버렸다. 그러자 일부 자주파 신하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 술탄을 옹립했다.

하지만 케판장의 중국인과 마라탐 동맹은 네덜란드의 화력을 이기지 못했다. 1743년초 사이에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중국인들이 항복했다. 케난쟝은 그 장면에서도 도피했다. 그가 1758년 발리 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케난장과 마라탐이 네덜란드와 싸운 전쟁을 자바 전쟁(Java War)이라 한다. 이 전쟁이 끝난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마라탐 술탄국의 명맥은 보존해 주었지만, 자기네들을 배산했다는 이유로 많은 땅을 빼앗고, 연간 8,600톤의 쌀을 조공을 받았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시기 이후 서서히 쇠락해간다. 본국이 영국과의 여러차례 전쟁에서 패해 입지가 좁아진데다 회사가 관료화하면서 부패가 심해지고, 무엇보다도 향료산업이 퇴보하면서 대체 업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역사비평사),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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