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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세계 최초로 태국-중국군 격퇴하며 농민운동 성공…집권후 개혁성 잃으면서 단명
떠이 썬 왕조, 외세 배격하며 농민정권 수립
2019. 08. 25 by 김현민 기자

 

서양세력이 아시아에 진출해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왕국들이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인도차이나 베트남에는 18세기말에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농민 정권이 수립되었다. 1778~1802년년 사이에 비록 24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농민정권은 동아시아를 크게 흔들었고, 후에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베트남은 1천년동안 중국의 직접 지배를 받다가 서기 939년 독립왕국을 수립해 응오(), (), (), (), (), (), () 왕조로 이어졌다.

18세기말. 베트남에는 후기 레() 왕조가 명목상 황제 자리를 지켰지만, 북쪽은 찐()씨가, 남쪽은 응우옌씨()씨가 각각 왕을 자처하며, 나라를 남북으로 절반씩 나눠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북군과 남군이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대치하면서 베트남은 200년간 남북 분열상태를 지속했다. 백성들은 피폐했고, 남쪽 메콩강 지역이 개척되면서 많은 유민들이 신개척지로 유민이 밀려들었다.

 

떠이 썬 농민 반란의 응우옌 삼형제(부조) /위키피디아
떠이 썬 농민 반란의 응우옌 삼형제(부조) /위키피디아

 

그 무렵, 베트남 중부 꾸이 년(歸仁) 지역에 떠이 선(西山)이라는 마을에 응우옌()이라는 성을 가진 3형제가 있었다.

삼형제의 조상은 원래 베트남 북중부 응에안(乂安)주 출신으로, 원래는 호()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선조는 남부의 지배자 응우옌씨의 군대가 북쪽의 찐씨 영역을 공격했을 때 포로로 잡혀 남부 꾸이 년에 살았다. 꾸이 년은 베트남 전에 한국군 맹호부대가 주둔하던 지역이다. 할아버지는 응우옌 성의 부인을 두었는데, 아버지가 성을 호씨에서 응우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들 삼형제의 성 응유옌은 후에 이들을 진압하고 왕조를 세운 응유옌()씨와 무관하다. 성만 같을 뿐 출신 배경이나 조상이 다른 사람들이다.)

 

반란의 두목은 삼형제중 맏형인 응우옌 반 냑(阮文岳)이다. 두 동생인 응우옌 반 르(阮文呂)와 은우옌 반 후에(頑文惠)도 가담했다.

1771년 삼형제는 꾸이 년 산악지대에서 산적질을 했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그의 무리에 가담했고, 지방정부로는 골머리 아픈 존재였다. 그러던 중 1773년 반 냑을 비롯해 산적 무리들이 꾸이 년 주정부에 귀순을 요청했다. 속임수였다. 성주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느냐, 좋아하며 그들을 잡아 감옥에 넣었다.

그날밤 산적 무리들은 감옥을 탈출해 성문을 열었고, 산적 무리들이 성내로 들어와 관군을 제압하고 꾸이 년 성을 함락시켰다. 역사가들은 응우옌 삼형제의 고향 이름을 본따 떠이 썬(西山) 운동이라고 지칭했다.

이들이 거병한 꾸이 년 지방은 또다른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18세기 중반부터 왕위 계승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고, 정권을 농단하는 실력자들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꾸이 년 지방은 토지가 척박하고 소수 지주의 토지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떠이 썬 운동은 개혁성이 두드려져 농민들이 대거 가담해 농민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농민 정권은 이런 척박한 곳에서 출발했다.

반란군은 남부 지배자 응우옌씨의 수도인 푸 쑤언(富春)을 향해 진격해고, 꽝 남 성에서 응유옌 씨의 군대를 격파했다. 반란군은 중국인 상인 이재(李才) 세력과 손잡고 세력을 확대했다. 응유옌씨는 떠이선 농민군의 공격이 일시적으로 퇴각했지만, 전열을 정비해 공세로 나섰다.

 

이때 구원투수가 북쪽 지배세력인 찐()씨 세력이었다. 쩐조는 호앙 응우 푹(黃五福)을 대장군으로 임명해 응우옌 정권과 전쟁을 선포했다. 남과 북 사이의 오랜 평화적 대치상태가 깨졌다. 응우옌씨의 남군은 찐씨의 북군과 농민 반란군 사이에 포위되었다. 북군은 반란군과 연합전선을 펴 1775년 남부 수도 푸 쑤언을 점령하고 응우옌씨를 궤멸시키기 위해 남진했다.

응우옌 왕실은 지금의 호치민시(구 사이공)인 쟈 딘(嘉定)으로 피신했다. 유일하게 북부에 남아있던 태자 응우옌 푹 즈엉(頑福暘)은 반 냑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찐씨의 북군은 남군을 괴멸시키자 연합세력이었던 떠이 썬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그러자 반란군 수괴 반 냑은 또 거짓말을 했다. 자신들이 응우옌씨 토벌의 선봉에 서겠다고 했다. 찐씨의 북군은 반란군 두목 반 냑의 항복을 받고 북쪽으로 회군했다.

 

태국군을 이긴 떠이 썬 군대의 승전비 /위키피디아
태국군을 이긴 떠이 썬 군대의 승전비 /위키피디아

 

이제 떠이 썬 농민군과 응우옌의 남군이 메콩강 델타 지대인 쟈 딘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반 냑은 동생 반 르를 쟈 딘으로 보내 한때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군이 곧 반격에 나서 농민군은 후퇴했다. 기나긴 공방전이 벌어졌다. 응우옌 가문의 명장 도 타인 년(杜淸仁)은 떠이 썬(西山)군에 맞서 3,000명의 의병으로 동 썬(東山)군을 조직해 맞섰다.

떠이 썬 왕조의 베트남. 북부(청색)는 동생 반 후에, 중부(황색)는 형 반 냑, 남부(녹색)는 웅우옌 푹 아인의 영역. /위키피디아
떠이 썬 왕조의 베트남. 북부(청색)는 동생 반 후에, 중부(황색)는 형 반 냑, 남부(녹색)는 웅우옌 푹 아인의 영역. /위키피디아

 

이 무렵 떠이 썬과 연합했던 중국인 이재가 변심해 포로로 잡혔던 태자 응우옌 푹 즈엉을 탈출시키고, 그를 왕으로 내세워 쟈 딘 정권과 내전을 벌였다. 가뜩이나 남쪽 국경지대로 쫒겨나 있던 응우옌의 남군에 내분마저 벌어졌으니, 전쟁의 성패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1777년 떠이 썬 군은 쟈딘을 공격해 아버지인 응우옌 푹 투언과 아들인 푹 즈엉 등을 잡아 죽였다. 응우옌씨 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중 구사일생으로 남쪽 왕실에 생존자가 있었으니, 15세의 웅우옌 푹 아인(頑福映)이었다. 의병대장 도 타이넌의 동선군은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이 푹 아인이 나중에 떠이 썬 왕조를 멸하고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웅우옌조를 열게 된다.

 

1778년 떠이 썬 농민운동의 두목 응우옌 반 냑은 참파왕국의 옛수도 비자야(지금의 후에)에서 왕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그는 황제를 지칭하지 않았다. 북쪽에 명목상으로 남아 있는 레 황실과 찐의 세력을 인정했고, 응우옌씨가 지배하던 남쪽 지역만 통치했다.

한편 응우옌가의 어린 왕 푹 아인은 아직 힘이 없었다. 모든 군권은 도 타인 년이 쥐고 있었다. 푹 아인은 권력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도 타인 년을 살해했다. 또 내분이 벌어졌고, 이 틈을 타 떠이 썬 군이 쳐들어와 웅우옌 군대는 궤멸하고 푹 아인은 도주했다.

1784년 푹 아인은 당시의 강국인 사이암(타이)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사이암 왕국은 4만명의 군대를 보내 떠이 썬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 떠이 썬 군에선 반 냑의 막내동생 반 후에가 대응했다. 이듬해 반 후에가 이끄는 떠이썬 군을 메콩강에서 태국군을 패퇴시켰다. 푹 아인은 사이암의 패잔병과 함께 태국으로 망명길에 나섰다.

 

태국군의 지원을 받은 응우옌 푹 아인의 군대가 궤멸하자 떠이 썬 군은 일단 남쪽 전선이 안정된 것으로 판단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떠이 썬 군은 복려멸정(復黎滅鄭)을 구호로 내세웠다. 레 황실을 보전하되, 찐씨를 멸한다는 것이었다. 떠이 썬 군의 북벌대장은 응우옌 반 후에가 맡았다. 그는 1786년 순식간에 베트남의 수도이자 찐씨의 근거지인 탕 롱(하노이)을 점령했다. 반 후에는 찐씨의 마지막 왕 찐 카이(鄭楷)를 생포하고 찐씨를 멸했다. 응우옌 반 후에는 베트남을 250년간 양분해 통치하던 응우옌과 찐씨 세력을 제거하고 통일한 것이다.

 

1788~1789년 청군의 베트남 공격 /위키피디아
1788~1789년 청군의 베트남 공격 /위키피디아

 

마지막 남은 것은 명맥만 남은 레 황실이었다. 떠이 썬은 레 황실의 보호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당장 몰아낼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레 황실이 명분을 만들어 줬다.

레 황실의 입장에서 보면, 남부 출신의 농민병들을 믿을 수 없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황제 찌에우 통 데(昭統帝)는 궁궐을 탈출해 중국으로 도망쳤다. 황제는 청나라에 반란군을 응징하는 명분으로 출병을 요청했다. 떠이 썬 반란군에게는 더 이상 레 황실을 보호할 명분이 사라졌다.

청의 건륭제(乾隆帝)1788년 레 황제(청 황제에겐 왕이라고 몸을 낮췄다)의 요청으로 20만 명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곧이어 청의 대군이 밀려와 수도 탕 롱을 점령했다. 해를 넘기며 설날(구정)이 되자, 청군은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었고, 그 틈을 타서 떠이 썬 군이 대대적으로 반격해 청의 원정군명을 궤멸시켰다.

청군을 패퇴시키는 데도 동생 반 후에의 공이 가장 컸다. 그는 응우옌의 남군 요청으로 공격해온 태국 군 4만명을 메콩 지역에서 물리친데 이어 청군 20만명을 물리쳐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꽝 쭝 황제 상 /위키피디아
꽝 쭝 황제 상 /위키피디아

 

형제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다. 178811월 동생인 반 후에는 황제로 즉위하고 꽝 쭝(光中)이라는 연호를 채택했다. 반 후에의 황제 즉위로 떠이 썬 왕조는 10년만에 분열되었다. 북쪽에는 동생 반 후에 지지세력이 지배했고, 남쪽에는 형인 반 냑이 지배하고 있었다.

베트남인들 사이에 반 후에는 꽝 쭝 황제로 알려져 있다. 떠이 썬 운동의 마지막 승자 반 후에는 반란 초기부터 실시해 온 토지의 분배와 평민 출신들의 정치 참여, 남북 분열 시대의 종결, 그리고 남북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침의 극복 등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한글에 해당하는 고유문자 쯔 놈을 공용어 표기법으로 채택했다. 쯔 놈을 활용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의사 소통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수 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살지 못했다. 응우옌 반 후에는 황제에 즉위한지 4년만인 1792년에 사망했다. 나이 39. 너무 젊은 나이에 영웅은 갔다. 그의 아들이 10살에 황위를 이어받았으나, 권력은 가신들이 좌지우지했다. 결국엔 남부 메콩강 밀림지대에 숨어있던 또다른 영웅 응우옌 푹 아인이 거병하면서 떠이 썬 왕조는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떠이 썬 농민 왕조는 처음에는 민중적 지지를 얻었지만, 권력을 잡은 이후 개혁성을 잃어 버렸다. 앞서 왕조와 마찬가지로 분열했고,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이웃 나라와 대립하면서 지지기반을 잃어 갔다. 결국 정권 수립 24년만인 1802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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