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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신화적 인물…아나톨리아 북서쪽에서 출발, 비잔티움과 전투로 세력 확대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는 어떤 인물인가
2019. 08. 27 by 김현민 기자

 

대제국은 점에서 시작한다. 고대 로마 제국은 로마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발했고, 러시아도 모스카바 공국이라는 보잘 것 없는 향촌에서 출발했다.

근현대에 중부 유럽을 위협하고, 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쳐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는 아나톨리아반도(소아시아) 북서쪽의 조그마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건국자 오스만 가지의 상상도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 건국자 오스만 가지의 상상도 /위키피디아

 

그러면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는 누구일까.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는 오스만 가지(Osmān Ghāzi)라는 인물이다. 오스만은 이름이고, 가지(Ghāzi)이슬람의 전사라는 용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부족장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가 대제국의 시조이니 당연히 전설적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자신의 가슴에서 달이 빠져나와 가슴으로 들어갔으며, 배꼽에서 나무가 자라 온 세상을 드리우고, 그 그늘에서 샘이 솟았다고 한다. 달을 숭배하고 오아시스를 중시하는 이슬람적 신화를 그려낸 것이다.

오스만 가지는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태어난 해도 모르고, 죽은 해는 1323년 또는 1324년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 결혼한 배우자, 어렸을 때의 생활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오스만 투르크가 제국이 되고 몇세기 후에 그려졌다.

 

6세기의 돌궐 제국 /위키피디아
6세기의 돌궐 제국 /위키피디아

 

그러면 오스만 투르크의 뿌리는 어디인가. 투르크족이다. 투르크는 동양사에서 돌궐(突厥) 족이다.

투르크족은 서기 552년 부민(Bumin) 카간이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위구르, 오구즈, 오노크, 카를룩족등 여섯 부족을 통합해 오르혼 강가에서 돌궐국을 건국했다.

돌궐은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와 접촉했다. 고구려와 돌궐은 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양원왕 7(551) “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했지만, 임금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물리쳤다는 기사가 고구려와 돌궐의 첫 접촉 장면이다.

전성기 돌궐은 유라시아 지역 동서와 남북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했고, 그 면적이 1,000에 이르렀다. 지금 중국 면적에 비근한 영토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국 중원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에 의해 통일될 시기에 돌궐 내부에 내부 분열이 생기면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눠졌다. 동돌궐은 630, 서돌궐은 651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나라가 멸망한 이후 돌궐의 부족들은 서쪽으로 진출했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960년 셀주크 장군이 부족을 통일하면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드로 이주했고, 1037년 셀주크의 손자 토크릴 베그가 이란 고원에서 셀주크 투르크를 건국했다.

토크릴은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한데 이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술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셀주크 투르크는 여러지역으로 갈라졌던 중동의 이슬람세계를 통일하고, 지금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셀주크 투르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동로마) 제국 6만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 루마누스 4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투르크족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반도를 차지하게 됐다.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이 투르크족에 의해 장악되자, 위협을 느낀 유럽국가들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십자군을 결성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니, 십자군 전쟁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 전쟁으로 쇠약해진데다 수세기전 자신들이 살던 중국 북방에서 발원한 몽골에 의해 멸망했다.

 

1300년 아타톨리아 반도 /위키피디아
1300년 아타톨리아 반도 /위키피디아

 

셀주크 투르크가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주해왔던 투르크 족들은 각자 부족마다 영지를 개척해 유목생활을 했다. 그 수는 10여개가 넘었다. 그중 하나가 오스만 투르크다.

오스만 가지가 나라를 세운 시기는 공식적으로 1299년이다. 초기 영토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쪽의 작은 지역이었다. 초기 그의 부족 규모는 4만 텐트였는데, 당시 1텐트는 2~5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인구수가 10~15만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난립하던 투르크의 다른 부족들의 텐트수는 7만에서 10만에 이르렀다 하는데, 오스만 부족은 부족 중에서도 영세했다.

 

오스만 가지 시기의 영토확장 /위키피디아
오스만 가지 시기의 영토확장 /위키피디아

 

약체였던 오스만의 성공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그 첫째는 투르크족의 패자였던 셀주크 투르크의 멸망이다. 큰 나무가 스러져야 작은 나무들이 클 기회가 생긴다. 몽골의 징기스칸 후예들이 중동지역을 난도질하고 지나갔지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패배한뒤 아나톨리아 반도에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런 세력의 공백이 오스만에게 성장할 틈을 열어준 것이다.

둘째, 동로마제국(비잔티움)과 접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성전(지하드)를 치른다는 명분을 갖게 되어 다른 부족들의 지원을 얻기 쉬웠다. 누군가 강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투르크 부족들 사이에 기독교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자 쪽으로 힘이 쏠렸다.

건국자 오스만 가지는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그의 영토는 북쪽으로 비잔티움과의 전쟁에서 빼앗는 것이었다.

1302년 오스만 부족은 니케아(Nicaea) 근처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오스만은 남쪽으로 동족의 당으로 진출하기보다 북쪽으로 기독교도들의 땅을 빼앗는 일에 힘썼다. 몽골족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온 부족들의 인구압을 북쪽으로 빼주는 역할을 했다. 자연히 부족들이 힘이 오스만의 휘하로 몰려왔다.

그는 비잔티움 세력을 아나톨리아 북쪽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말년(1323~1324)에 오스만은 마마라해(Sea of Marmara)에 바짝 진출하게 된다.

건국자의 마지막 공격지는 부르사(Bursa)였다. 부르사는 비잔티움에겐 해협 건너 최고의 군사요충지였다. 오스만은 부르사의 함락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은 1326년에 부르사를 점령하게 된다.

 

14세기초 아나톨리아 반도 /위키피디아
14세기초 아나톨리아 반도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의 건국자에 대한 기록은 매우 희박하다. 후의 오스만 술탄들이 그의 직계가족인지에 대해서도 불투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제국이 된 후에 건국자의 신화를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어쨌든, 오스만 가지가 건국한 조그마한 나라는 후세들에 의해 제국으로 발전한다.

신화적 존재인 오스만 가지가 죽은 지 130년후인 1453525, 그의 후손 술탄 메메드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서기 324년에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수도로 삼았던 도시로, 마지막 남은 로마제국의 영토였다. 이로써 천년 이상 존재해왔던 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동유럽이 아시아 종족에 의해 점령당한다.

이후 유럽사는 아시아 민족인 오스만 투르크와 유럽인들이 세운 합스부르크,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점철하게 된다.

 

오스만 투르크 최대영역 (1638년)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 최대영역 (1638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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