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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연구
한국 토속해운업의 발자취를 추적하며…27년간 종사한 신연호 사공의 구술을 토대로
옛 옹기돛단배의 기록①…강진 봉황리의 마지막 흔적
2019. 09. 10 by 전우홍

 

이 글은 2015125일 강원도 삼척문화원에서 사단법인 이사부기념사업회 주최 세미나에서 전우홍씨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현대 디지털 자동화시대에 살면서 돛단배 시대가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마지막 돛단배의 운항이 한반도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언저리까지였다. 그 무렵까지 실제로 옹기를 실은 무동력의 돛단배가 도서와 해안지방의 항과 포구를 방문해 판매하는 일종의 토속 해운업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남 강진은 고려청자로 너무 유명세를 타서 인근 칠량옹기의 지명도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강진 칠량면 봉황리는 1980년대 까지 특이한 경제구조를 가진 자연부락으로 노동력이 있는 주민 대부분은 옹기생산과 해상판매 및 그와 관련 일에 종사했다.

이 글은 봉황리의 옹기생산과 그 판매가 옹기배(돛단배)에 실어 제주도를 포함해 전남 목포에서 부산까지 남해안 전체해역을 대상으로 항포구를 방문해 판매했고, 그 운반 매체인 옹기돛단배를 부리던 뱃사람들의 언어와 토속적인 해운업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옹기돛단배는 최소한 1988년까지 실제로 운항되었고, 그 형체는 1995년까지 봉황리 포구 갯벌에 남아 있었다.

 

전남 강진 칠량면 봉황리를 중심으로 운행하던 돛단배는 옹기를 가득 실고, 수로(水路)의 출구인 마량과 까막섬 사이를 바람을 가득 안고서 범주(帆走)하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1980년경 당시 마량포구 장터에서 서울사진관을 운영하던 박득만씨가 찍은 것이다.  한국에서 마지막 돛단배(風船)라 할 수 있는 옹기운반의 특수성(큰 부피 와 진동에 취약함) 때문에 비교적 근래(1988년)까지 실제 돛단배가 운항되었다.  1980년 대 초반에 5척의 돛단배가 있었고, 1990년까지 2척 남아 있었으나 1993년 무렵 마지막 2척의 돛배는 해체되고 배의 밑바닥은 1997년경까지 봉황 포구 갯벌에 남아있었다.  실제 토속 해운업에 종사하던 한국 마지막 돛단배의 역사는 마감되었다.  사진의 옹기돛단배는 당시 지역 수협 소장을 했던 김 종섭 선주의 배로 1980년 웃동무로 한 도영씨가 탔었다. /사진=전우홍 제공
전남 강진 칠량면 봉황리를 중심으로 운행하던 돛단배는 옹기를 가득 실고, 수로(水路)의 출구인 마량과 까막섬 사이를 바람을 가득 안고서 범주(帆走)하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1980년경 당시 마량포구 장터에서 현대사진관을 운영하던 박세만씨가 찍은 것이다. 한국에서 마지막 돛단배(風船)라 할 수 있는 옹기운반의 특수성(큰 부피 와 진동에 취약함) 때문에 비교적 근래(1988년)까지 실제 돛단배가 운항되었다. 1980년 대 초반에 5척의 돛단배가 있었고, 1990년까지 2척 남아 있었으나 1993년 무렵 마지막 2척의 돛배는 해체되고 배의 밑바닥은 1997년경까지 봉황 포구 갯벌에 남아있었다. 실제 토속 해운업에 종사하던 한국 마지막 돛단배의 역사는 마감되었다. 사진의 옹기돛단배는 당시 지역 수협 소장을 했던 김 종섭 선주의 배로 1980년 웃동무로 한 도영씨가 탔었다. /사진=전우홍 제공

 

필자가 옹기 돛단배를 처음 본 것은 1975년 제주항 산지천 입구에서였다. 당시 옹기를 판매하던 그 배를 보았고, 돛단배의 운항이 아직 남아있음을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이후 해군을 제대하고 1981년 다시 제주를 찾았을 때도 옹기돛단배를 다시 보았고, 이번에는 직접 배에 올라 사공과 면담하며 옹기배의 항해와 특성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당시 1,000여개 이상의 옹기를 돛단배에 싣고서 제주도에서 약 2개월간 판매하고 돌아 갈 때 좋은 바람을 받으며 제주에서 강진 봉황리까지 8시간이면 주파한다는 돛단배의 속도가 믿기지 않았었다. 사공에게 그들의 고향(故鄕)이며 모항(母港)인 봉황리 귀항(歸航)길에 승선을 허락받았지만 끝내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이후 한선(韓船)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하면서 그 배를 타보지 못한 미련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다시 옹기배와의 인연은 1995년 일본을 요트로 방문후 조선통신사들이 타고 다니던 사신선(使臣船)을 알게 되면서였다. 예전에 만났던 옹기배가 떠올라서 옹기배가 아직까지 존재할까, 하는 마음으로 당시 봉황리 김오응 이장에게 문의했다. 김 이장은 그 옹기배 1992년 까지 포구에 돛단배 형체가 남아 있다가 지금은 완전히 패선되어 그 잔해(늑골) 포구의 갯벌에 박힌 채로 남아 있다고 대답했다.

1981년 당시 제주에서 옹기배를 타고서 방문하려고 했던 봉황 포구를 1995년 승용차로 처음 방문하여 옹기배의 잔해를 직접 보았고, 마량선창의 사진관에서 옹기돛단배의 사진을 구입하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옹기돛단배 일성호. 사진은 완도항에서 청산도 혹은 신지도로 향하는 모습 /사진=조희춘
옹기돛단배 일성호. 사진은 완도항에서 청산도 혹은 신지도로 향하는 모습 /사진=조희춘

 

이후 한선에 대한 관심으로 MBC-TV에서 1996년 신안유물선을 복원해 중국 닝보(寧波), 한국 신안~목포, 일본 교오토~오사카의 옛 해운로를 탐사하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방치되어 있던 30m 길이의 목재범선 ‘700년전의 약속호을 구입해 2년간 운영을 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옹기배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4차례 봉황리를 방문해 김우식 사공과 그곳 노인정에서 옛 사공들을 통해서 돛단배에 대한 구술을 듣긴 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없는 매우 단편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때 김 사공으로부터 당시 옹기배에서 사용했던 저울과 제주도에서 바닥짐에 실어온 현무암 계주석(繫柱石) 그리고 부락 노인들로부터 배의 치와 몇 점의 해양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후 옹기배에 대한 열정으로,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20094~10월 사이에 매달 1차례씩 전통 돛단배 항해기술 연구 워크숍을 주관했다. 그 모임에 참여해 봉황리 옹기돛단배 출신인 신연호 사공을 만나면서 다른 사공들과 달리 옹기돛단배의 자세하고 구체적인 구술을 직접 듣게 된 것은 하나의 축복이고, 돛단배의 운항과 조정술을 정리 할 수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신 사공이 참여했던 청자보물선(온누비호) 항로탐사인 강진 마량에서 강화도를 왕복하는 6일간(200983-8)의 항해를 함께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구술과 현장학습을 통해 그간의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지만 단절되었던 돛단배의 조정과 운항에 대한 무형의 기술들을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2010년 복원항해 출항준비를 하는 봉황호 /사진=전우홍 제공
2010년 복원항해 출항준비를 하는 봉황호 /사진=전우홍 제공

 

당시 온누비호의 청자항로 항해탐사연구책임자로 승선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곽유석 과장은 신 사공 같은 돛단배의 마지막 세대가 살아계실 때 옹기 돛단배를 복원해 그들과 함께 직접 항해하면서 한반도 해운의 역사를 이어 온 선조들의 무형(無形)의 조정과 운항술을 배울 수 있도록 옹기배 복원을 구상했다.

그 구상을 실천에 옮겨 옹기돛단배 봉황호가 2010629일에 진수되었다. 30년간 단절되었던 강진 옹기배 해상로드 탐사길201098-11일 칠량옹기 기능장 정윤석님이 만든 다양한 종류의 옹기 300여점을 한 배에 싣고서 가능한 옛 방식대로 강진 봉황포구에서 여수 구항(舊港)까지 항해가 실행될 수 있었다. 그 탐사에도 참여해 신 사공으로부터 의문사항과 보다 세부적인 설명과 실습, 구술을 보충해 옹기-돛단배의 조정과 운항술의 90%정도는 정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록은 다음세대에 전해질 수 있음이 큰 수확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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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2023-07-11 11:31:15
수고에 감사합니다. 메일이 전우홍기자님께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본 기사안에서 마량항 돛단배 사진의 작가는 (서울예식장, 박득만)가 아니고 (현대예식장, 박세만)입니다. 본인은 박세만 사진작가(현재 83세)의 둘째아들 박진영입니다. 저 사진을 촬영할때 저는 8세 정도 였고, 부친이 까막섬에 돛단배가 지나가니 사진을 찍자며 달라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리고 저 사진의 필름 원본이 최근까지 부친이 가지고 계셨고.. 저 사진의 현상본(액자) 2매중 1매는 강진수협에 기증을 하였고 나머지 1매는 부친이 소장하고 계십니다. 부친이 어제 큰수술을 받으셔서 자식으로서 속히 정정을 요청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