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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군벌로 40년간 권력을 좌지우지…미국과의 전쟁에서 영토 절반 잃어
대통령만 아홉 번…멕시코 산타안나의 시대
2019. 12. 20 by 김현민 기자

 

1822519일 즉위한 멕시코 초대황제 아구스틴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는 초기엔 인기가 있었다. 멕시코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데다 구질서를 유지한다는 약속으로 지주와 카톨릭 사제 등 스페인 치하 옛지배층들의 지지를 얻어 냈다. 민중들은 현지인 황제가 탄생했다며 열렬히 환호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그를 싫어했다. 그들은 의회 다수를 차지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의회가 권력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입헌군주국에서 황제는 명목상 지위를 유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에 의원 일부가 황제와 그 가족을 납치해 입헌군주제를 붕괴시키려는 음모가 드러났다.

즉위 5개월 되던 1031일 아구스틴 황제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군사위원회를 조직해 입법권을 맡겼다.

황제의 의회 해산 조치는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를 지지했던 옛 왕당파, 그와 제휴했던 민중반란 지도자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빈센테 게레로(Vicente Guerrero), 니콜라스 브라보(Nicolás Bravo),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와 같이 멕시코 독립전쟁의 지도자들도 황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이투르비데는 식민지 시절의 세금을 전면폐지해 민중을 무마하고, 황실 근위대를 최신식 무기로 무장해 반란에 대비했다. 그는 모자라는 세수를 확대하기 위해 재산세를 40%나 부과했지만, 황제의 유일한 지지기반인 군대에 줄 봉급도 밀렸다.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드디어 반황제파 세력들이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 /위키피디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 /위키피디아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1794~1876)라는 지방군벌이다. 산타 안나는 변신의 귀재이고, 기회를 잘 포착하는 인물로, 멕시코 역사상 유례없이 9번이나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운명의 사나이’(the Man of Destiny)라는 별명처럼 멜로드라마와 같은 정치역정을 보냈고, 결국 멕시코를 망친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1822년부터 1960년까지 40년간 멕시코에는 무려 50번의 정권교체가 있었고, 그증 35번은 군벌의 쿠데타에 의해 발생했다. 그 중심에 산타안나가 있었다. 역사가들 중에 이 시기를 산타안나의 시대라고 정의하는 이들도 있다.

 

산타안나는 멕시코 동해안 베라크루스(Veracruz)에서 태어났다. 베라크루즈는 스페인 지배 시절에 본국과 연결하는 거점이었고 스페인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스페인군의 고위장교였다. 그는 16살에 스페인군에 입대해 전투에 참여했으며, 스페인 왕실을 지지하는 왕당파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데 투입되었다. 그는 전투에 맹활약하면서 빠르게 승진해 베라크루즈의 스페인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멕시코 베라크루스 일대 /위키피디아
멕시코 베라크루스 일대 /위키피디아

 

또다른 왕당파 이투르비데가 인디오 민중반란 지도자들과 연합해 멕시코 독립을 추진했을 때, 산타안나는 재빠르게 변신해 이투르비데를 지지했다. 이투르비데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는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군부지도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투르비데가 의회를 해산하고 퇴진압박을 받게 되자, 산타안나는 또다시 변신한다. 182212월 그는 황제 퇴진을 요구하며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시티로 진군했다. 그때 나이 28살이었다.

산타안나의 거병에 공화주의자와 민중 지도자들이 합세했고, 이듬해인 1823319일 이투르비데는 퇴위했다. 이투르비데는 그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리보르노(당시는 투스카니 공국)로 탈출했다. 전직 황제는 신생 멕시코에 다시 정쟁이 벌어지고 혼란스럽게 되자, 1825714일 가족과 함께 멕시코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체포령이었다. 이투르비데는 곧바로 체포되어 719일 처형되었다. 나이 41세였다. 이를 멕시코 제1제국이라 한다.

 

산타안나는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민중반란의 지도자 빈센트 게라로와 니콜라스 브라보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자신은 베라크루즈 군영으로 돌아갔다. 독립 초기 멕시코에는 수많은 무장집단이 난무했는데, 이들을 카디요(caudillo)라 불렀다. 산타안나는 베라크루스의 카디요로 사병화한 자신의 군대를 통해 수시로 정치에 개입했다.

멕시코 공화정은 1824년 초대 대통령으로 민중운동가 과달루페 빅토리아를 선출했다. 과달루페는 4년 임기를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연임에 나서려 했다. 이 때 산타안나가 끼어들었다.

산타안나는 이번에 과달루페 대신에 게레로를 지지했다. 그러자 과달루페는 연임을 포기하고 게레로가 출마했다. 하지만 보수세력이 지지하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Manuel Gómez Pedraza)가 유력했다. 19289월 선거 개표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산타안나는 선거를 무효라고 선언했다. 산타안나를 지지하는 카디요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고메스 페드라사는 당선후 곧바로 사임했다. 그뒤를 이어 산타안나가 지지하는 게레로가 대통령이 되었다. 게레로도 1년을 못넘기고 또다른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1829년 산타안나가 스페인군 침공을 격퇴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1829년 산타안나가 스페인군 침공을 격퇴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1829년 스페인은 26백명의 병력을 보내 멕시코 서해안 탐피코(Tampico)를 점령했다. 산타안나는 베라크루스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군과 싸워 그들을 퇴각시켰다. 그는 이 전투의 승리로 스페인의 멕시코 재정복 야욕을 막은 인물로 부상해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833년 권력의 배후에 있던 산타안나가 마침내 선거에 나서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첫해에 그는 고향 베라크루스에 머물면서 실질적인 일을 부통령 발렌틴 고메즈 파리아스(Valentín Gómez Farías)에게 맡겼다. 고메스 부통령은 군벌을 해체하고 카톨릭의 토지를 몰수하는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이듬해인 1834년 산타안나는 전면에 나서 부통령 고메스의 조치를 받아들여 기독교와 군벌 개혁에 나서면서 이에 빈발하는 의회를 해산하고, 군벌들과 전투를 벌여 해체시켰다. 산타안나는 1835년에 1822년 독립할 당시 제정된 헌법을 폐기하며 독재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의 헌법 폐기는 텍사스 독립의 결과를 초래했다.

 

19세기초 텍사스 지역은 인디언 코만치(Comanche) 족의 땅이었고, 스페인인들이 거의 정착해 살지 않았다. 멕시코가 독립할 무렵인 1821년 스티븐 오스틴(Stephen F. Austin)이라는 사람이 300명의 미국인들을 데리고 텍사스에 정착했다. 이 사람은 텍사스의 아버지라 불리며 후에 텍사스 공화국의 초대국무장관이 되는데, 텍사스의 주도(州都) 오스틴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멕시코 정부는 이들의 이주를 환영했다.

신생 멕시코 정부는 토지 무상제공, 4년간 면세 조건을 내걸고 미국인들의 이주를 적극 권장했다. 이 특혜조치로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주가 급증했다. 미국인들은 노예들도 데려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국 이주민의 수가 먼저 이주한 멕시코 본토박이보다 늘어나게 되었다. 1835년엔 텍사스에 이주한 미국인들이 3만명을 넘게 되었다.

 

산타안나의 헌법 폐기로 미국인들이 텍사스 지역에서 누리던 자치권이 박탈되고, 미국인들의 이주가 제한되었다. 미국인 이주민들은 원래의 헌법을 수호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835102일 텍사스의 곤잘레스라는 마을에서 텍사스 이주민과 멕시코 군대 사이에 작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국인 이주민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승리했다. 텍사스 독립과정에서 벌어진 첫 전투였다.

화가 난 산타안나는 텍사스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5천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멕시코군과 텍사스 민병대가 마주친 곳은 알라모 요새였다. 알라모에서 멕시코 토벌대와 미국인 민병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민병대 183명 전원이 전사했다.

그러나 텍사스의 미국인들은 '알라모를 잊지 말라'고 외치며 토벌대에 맹렬하게 저항했다. 샘 휴스턴(Sam Houston)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민병대들은 이듬해인 1836421일 샌화킨토(San Jacinto)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궤멸시켰다. 텍사스 민병대는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로 무장했고, 그 무기들은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며 멕시코 토벌대 진영에 떨어졌다. 멕시코 군인들은 18분만에 진지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텍사스인들이 멕시코 병사들을 죽이는데 몇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멕시코군 사망자는 600, 포로 300명이 포로로 잡혔고, 텍사스 독립군의 사망자는 11, 휴스턴장군은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1836년 샌화킨토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산타안나가 부상당해 누워있는 샘 휴스턴 장군에게 항복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1836년 샌화킨토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산타안나가 부상당해 누워있는 샘 휴스턴 장군에게 항복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 전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대통령인 산타안나가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이한 행동을 좋아하는 그는 군인 출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싶었던지, 대통령으로서 직접 군대를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텍사스 민병대가 장교복을 입은 군인을 잡았더니 대통령이었다. 산타안나는 민병대장 휴스턴에게 끌려가 강요에 의해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벨라스코 조약(Treaties of Velasco)에 서명한다. 그 조약으로 멕시코는 리오그란데 강 북쪽을 텍사스에 넘겨준다. 텍사스는 즉시 독립을 선언하고 휴스턴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산타안나는 워싱턴으로 가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1837년 미군 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텍사스로 돌아갔다. 물론 그땐 멕시코의 권력이 바뀌어 있었다.

 

1838년 프랑스군 함대가 멕시코를 포격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1838년 프랑스군 함대가 멕시코를 포격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1838년 이번엔 프랑스가 재산을 몰수당한 프랑스인들의 보상을 요구하며 전함을 파견해 베라크루스를 포격했다. 당황한 멕시코 정부는 산타안나를 복권시켜 베라크루스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는 이번에도 또 직접 전장에 참여했다. 전투 도중에 왼쪽 다리에 포탄을 맞아 다리를 잘라야 했다. 멕시코가 프랑스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프랑스 해군은 물러났다.

산타안나는 이 패전상황을 잘 포장했다. 자신이 전투에 참여해 다리를 잃는 부상을 당했다고 선전하면서 엄숙한 장례를 치르듯 잘린 다리를 묻었다. 그로 인해 산타안나는 다시 멕시코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고,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1842년 그의 지시로, 1천명의 멕시코군이 텍사스 깊숙이 공격해 현지인 수십명 살해하고 돌아오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텍사스 공화국은 혼자 버티는 것보다 미국과 합병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18451013, 텍사스 공화국은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대다수의 텍사스 국민들은 미국과의 합병에 찬성했다. 그해 1229일 텍사스 공화국은 미국과 합병하게 된다.

 

한편 1842년 멕시코 총선에서 산타안나에 적대적인 의원들이 의회를 장악했다. 그는 숱한 전쟁으로 고갈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세금을 올렸다. 세금 저항이 드세지면서 유카탄(Yucatán)과 라레도(Laredo) 주정부도 독립을 선포하자 산타안나는 하야하고, 베라크루스로 돌아갔다.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그의 다리를 묻은 곳을 파헤쳤고, 베라크루스에서 그를 체포했다. 그는 당국에 넘겨져 재판을 받았는데, 목숨만은 부지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 식민지엿던 쿠바로 망명길에 나섰다.

 

1847년 미군의 멕시코 시티 점령 /위키피디아
1847년 미군의 멕시코 시티 점령 /위키피디아

 

텍사스를 합병한 미국은 영토분쟁을 이유로 1846년 멕시코에 전쟁을 걸었다. 산타안나는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권력 욕심이 없다. 다만 군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참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멕시코 대통령은 산타안나가 돌봐주던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였는데, 그는 미국의 침공에 절망적인 상태에서 산타안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산타안나는 미국에도 편지를 보내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미국이 원하는 땅을 주겠다고 했다. 미국은 멕시코 해안의 해군 방어망을 풀어 그의 귀국을 허용했다.

산타안나는 귀국하자마자 약속을 저버렸다. 그는 군사령관이 된 직후 대통령이 되었고, 미국과도 전쟁을 선언했다. 그의 숱한 패전, 배신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인들은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이 전쟁으로 멕시코는 영토의 절반을 미국에 넘겨줬고, 미국의 캘리포니아, 오레곤,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의 주가 이때 미국령이 되었다. 그는 1848년 다시 실각해 망명길을 떠나 카리브해의 영국령 자메이카, 콜롬비아를 전전했다.

 

1853년 멕시코가 미국에 매각한 땅(가즈덴 매입) /위키피디아
1853년 멕시코가 미국에 매각한 땅(가즈덴 매입) /위키피디아

 

1853년 그는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귀국 허용조치를 받았다. 1853년 그는 한때 자신이 탄압하던 카톨릭의 지지를 업어 대통령이 된다. 그는 고갈된 국고를 메우기 위해 남한 면적의 4분의3에 해당하는 북쪽의 땅을 미국에 팔았다. 가즈덴 매입(Gadsden Purchase)이라는 이 거래는 46,800의 땅을 1천만 달러에 파는 조건이었다. 현재 시가로 2억달러를 약간 웃도는 금액이라고 한다. 이때 양도한 땅이 미국의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남쪽 부분이다. 이렇게 하고도 그는 종신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듬해 1854년 자유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또다시 물러나 망명길에 나섰다. 이번 망명은 길었다. 1854년부터 1874년까지 20년 동안 그는 쿠바, 콜롬비아는 물론 한 때 전쟁을 했던 미국을 전전했다. 그는 그동안 긁어모은 돈으로 사업도 벌이다가 1874년 대사면령으로 귀국을 하게 된다. 그가 귀국했을 때엔 눈도 멀었고, 멕시코 동포들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는 1876621일 멕시코 시티의 자택에서 82세의 나이로 숨졌다. 멕시코 정부는 9번 대통령을 지낸 산타아나를 국립묘지에 정중하게 모셨다.

 

산타안나 재임시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기거나 매각한 영토 /위키피디아
산타안나 재임시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기거나 매각한 영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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