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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보수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내전으로 분열…두차례 연방 시도 무산
중앙아메리카 단일연방 결합에 실패한 모라산
2019. 12. 22 by 김현민 기자

 

중앙아메리카는 북미와 남미 대륙의 중간부에 다리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지리적으로는 북미의 일부분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에 속한다. 중앙아메리카에 속하는 나라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벨리즈 등 7개국이다. 면적은 52, 인구 47백만(2016)으로, 하나의 국가로 운영될 법한 곳인데 여러 개 나라로 쪼개져 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스페인에서 독립할 때엔 하나의 나라로 독립했는데 독립 후 지방 세력들을 결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1543년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면서 북미 지역에 누에바 스페인 부왕령을 두고, 중앙아메리카에는 과테말라에 총독을 두어 부왕령의 관할 아래 두었다. 과테말라 총독은 현재의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와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Chiapas) 주 일부를 통치했다. 파나마는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 관할로, 후에 콜롬비아령이 되었다가 미국이 운하를 뚫으면서 독립시켰고, 벨리즈는 영국령이어서 통치권에서 배제되었다. 스페인이 내려보낸 총독은 200년 이상 중앙아메리카를 지배했다.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앙아메리카에서도 멕시코에서처럼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 1811년 현재 엘살바도르 지역에서 현지에서 태어난 백인 크리올로 주도로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반란자들은 카톨릭 신부가 주동이 되어 그해 115일 교회 종소리를 계기로 일제히 봉기하기로 계획했지만, 그 시각에 종이 울리지 않았다. 이에 신부는 교회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이제 스페인 국왕은 없다. 총독도 없다. 이제 이곳의 주인은 바로 우리다.”고 외쳤고, 그 외침과 함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궐기했다. 시위는 엘살바도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한달후, 니카라과 지역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José Matías Delgado) 신부가 곳곳에서 번지는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 반란은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중앙아메리카 위치 /위키피디아
중앙아메리카 위치 /위키피디아

 

멕시코에서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던 1821915, 과테말라의 중앙아메리카 의회는 독립을 선포했다. 이날이 중앙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인 독립기념일이 된다. 중앙아메리카의 스페인 총독 가비노 가안사(Gabino Gaínza)는 반역자들과 손잡고 독립을 지지한다. 그는 임시 수반으로 남아 정식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중앙아메리카를 지켰다.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델가도가 이끄는 급진파들은 이 기회에 조속히 독립을 이루자고 주장한 반면에 보수파들은 보다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 가운데 18221월 멕시코에서 아구스틴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가 독립을 선언했다. 중앙아메리카 보수세력들은 멕시코와의 합병을 희망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반대했다. 곧이어 멕시코 독립정부의 군대가 과테말라를 점령하고 자유주의자들을 쫓아냈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는 누에바 스페인 시절로 돌아가 합병했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합병(1821~22) /위키피디아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합병(1821~22) /위키피디아

 

그러나 멕시코의 이투르비데 황제는 곧바로 쫓겨나 공화정이 수립된다. 멕시코 공화정은 중앙아메리카 의회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권을 주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아메라키 의회는 18231월 멕시코와 결별하고, 완전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나라 이름은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Central America)으로 정했다.

그들이 하나의 연방국가를 형성하기로 한 것은 개별 주들이 작고 힘이 없기 때문에 뭉쳐야 외부의 공격을 저지할수 있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생 중앙아메리카는 미국처럼 연방제를 선택했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5개 주로 구성된 연방체제는 1830년대말까지 이어진다. 5개 주는 독자적인 자치권을 가졌다. 말이 연방이지 5개 독립국의 연합이나 다름 없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연방이 유지되었다. 주정부 지도자들이 타협적 자세로 나오고 시민들을 설득하고 커피 산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를 일으켰다.

한때 과테말라 산악지역과 멕시코 치아파스주의 일부가 로스 알토스(Los Altos)라는 주로 독립해 6개 주가 되었다. 이 주는 1840년에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의해 분할되어 해체된다.

연방은 근대적이고 민주적이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해 무역국가로 성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기는 위아래에 푸른색을 둘러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르키고 그 사이에 다섯 개의 산을 그렸는데, 각 주별로 산 하나씩을 의미한 것이다. 중앙에는 프랑스혁명의 상장인 피라미드를 그렸다.

중앙아메리카 연방은 오래가지 못했다. 1823년에 결성된 연방은 183821일 해체되어 15년의 짧은 수명을 고하게 된다. 그후 몇아례 연방 건설의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중앙아메리카 국기 /위키피디아
중앙아메리카 국기 /위키피디아

 

중앙아메리카의 역사는 프란시스코 모라산(Francisco Morazán, 1792~1842)이라는 자유주의자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과테말라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비교적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크리올로(criollo), 독학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배웠다.

중앙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하던 1821년에 그는 테구시갈파 부시장으로 정치에 뛰어 들었다. 신생 멕시코와 합병 여부가 논의에 붙여졌을 때 그는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추구했다. 1년만에 멕시코와의 합병을 끝내고 중앙아메리카 연방이 성립될 때 그는 연방의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한다.

1824년 마누엘 호세 아르세(Manuel José Arce)가 연방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르세는 1826년에 보수세력의 힘을 얻어 의회를 해산하고 비상대권을 쥐자, 온두라스 주지사인 모라산의 삼촌 디오니시오 헤레라(Dionisio de Herrera)가 반기를 들었다. 아르세가 헤레라를 해임하려 했지만 헤레라가 끝까지 직위를 유지하며 저항했다. 이에 아르세 대통령은 군대를 투입해 온두라스 수도를 점령했고, 온두라스에 있던 모라산은 수도를 탈출해 도피했다.

모라산은 니카라과로 도망쳐 자유주의 게릴라들과 합세했다. 그는 130여명의 군대와 무기를 얻어 본격적인 내전에 뛰어든다. 그는 라 트리니다드’(battle of 'La Trinidad)에서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앞세운 연방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일약 스타로 떠오르고, 온두라스주는 그를 지사로 선포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탄압받고 있는 엘살바도르 주의 요청을 받아 그곳에서 연반군을 격퇴하고, 1828년 과테말라로 진군해 연방수도를 포위하고 아르세 연방대통령과 장군들의 항복을 받는다.

 

프란시스코 모라산 /위키피디아
프란시스코 모라산 /위키피디아

 

모라산은 과도정부를 거쳐 1830년 연방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과감한 개혁정치를 밀어붙였다. 그는 자유주의에 입각해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교육제도 개혁 등을 추구했다. 이혼을 허용하는 등 교회의 불합리한 제도를 폐기하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개혁노선은 카톨릭과 지주 등 보수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1834년 실시된 재선에서 그는 낙선하고 보수세력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당선자가 곧바로 사망하고,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 그는 당선된다.

그의 재선 임기중인 18372월 과테말라에 콜레라가 발생해 1천명이 사망하고 3천명이 전염되었다. 과태말라 주정부는 의료진을 파견하고 전염병 확산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콜레라는 주로 가난한 원주민 마을로 확산되었다.

그때 라파엘 카레라(Rafael Carrera)라는 혼혈 메스티조가 인디오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보수 카톨릭 사제들은 이 기회를 포착했다. 사제들은 카레라가 하늘에서 보낸 라파엘 천사라며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와 자유주의자, 외국인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제들은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교회 천장에서 종이를 떨어뜨려, 원주민 신도들이 읽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성모 마리아가 카레라로 하여금 반란을 이끌도록 지시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카레라가 이끄는 반란군이 세력을 규합하자, 과테말라 주정부는 연방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모라산은 연방군을 투입해 카레라를 격퇴했다. 카레라의 원주민들은 산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와중에 1838115일 니카라과가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내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연방은 대통령선거를 하지 못했다. 183921일 모라산은 임기를 마쳤고, 의회도 해산되었다. 법률적으로 연방을 이끌어나갈 조직체가 없어졌다.

이후 교회와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연방구성을 논의했지만 타협에 이르지 못하고, 5개주가 개별적으로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중앙아메리카 연방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1839년 중앙아메리카 /위키피디아
1839년 중앙아메리카 /위키피디아

 

그후 모라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라산은 연방대통령직에서 물러나 1839513일 독립한 엘살바도르 수반에 선출된다. 그러자 과테말라를 장악한 카레사와 보수주의자들이 니카라과와 연합해 엘살바도르를 침공했다. 모라산은 연방의 상징인물이었기 때문에 보수세력과 반모라산파들이 단결해 그를 공격한 것이다. 모라산은 이때만 해도 힘이 있었다. 그의 군대 600명은 카레사의 군대 2천명을 제압했다. 모라산은 1840년에 연방을 복구하기 위해 엘살바도르군을 이끌고 과테말라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카레사의 매복전술에 속아 궤멸당했다. 그와 일부 측근만 살아 돌아왔지만, 엘살바도르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사임하고 말았다.

 

그는 사임한 후 코스타리카, 파나마, 볼리비아, 페루 등지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했다. 그런데 1841년 영국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국경 근처의 영토를 요구하며 개입했다. 모라산은 다시 귀국할 명분을 얻었다. 1842년 그는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에게 귀국하겠다고 연통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이번에는 작전을 바꿔 보수주의자들의 횡포가 심한 코스타리카를 정복하기로 했다. 그는 남미 군지도자들의 금융지원을 얻어 배 세척을 구해 코스타리카에 상륙했다. 코스타리카 국가수반 브라울리오 카릴로(Braulio Carrillo)는 병력을 보내 모라산을 제압하려 했지만, 모라산은 장군들에게 연방 재건 후 후한 상을 주겠다고 제의해 코스타리카군을 흡수해 버렸다. 카릴로 수반은 모라산에게 항복하고 정부를 내주었다.

모라산은 코스타리카에서 연방을 재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병력을 모집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그 소문은 금새 퍼져나갔다. 코스타리카 주민들은 모라산의 전쟁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 과테말라의 카레사가 잔혹한 인물이어서 패전할 경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코스타리카에 모라산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처음엔 400명이 모였지만 금세 1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와 군대 사이에 88시간의 치열한 유혈충돌이 벌어진 후에 모라산의 군대는 굴복했다. 장군들은 자결했고, 모라산은 체포되어 1842915일 화형에 처해졌다.

모라산의 죽음과 함께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물 건너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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